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11)
211 하오하오
여름에 갔던 중국 출장을 겨울이 되어 다시 맞이했다.
출장이 아닌 여행으로 해외 가 보겠다는 다짐은 여전히 다짐뿐이다. 이번 출장도 오로지 일만 하다 오게 생겼다.
“사장님, 1박 2일은 너무 짧지 않아요? 그래도 반년 만에 다시 가시는 건데, 여유 있게 관광도 하지 그러세요?”
유민희가 일정이 빡빡하다며 볼멘소리를 냈다.
난징변압기와 전장특수변압기, 두 곳과 연간 계약을 체결하러 가는 중국 출장. 연말이라 시간 내기가 힘들어 1박 2일이란 빠듯한 일정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내 팔자에 무슨 여행이냐.
“지금 한가하게 그럴 새가 어디 있니? 너 아주 놀러 가는 줄 알고 잔뜩 기대했지?”
상하이 푸동국제공항으로 가는 항공권을 예약하면서 살짝 고민했다.
해외 영업, 그것도 중국 출장이기에 민희를 당연히 데려가야 하는데도 고민하는 내 자신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이래서 내가 직원들하고 사적으로 거리를 두려 했건만…….
이런 속도 모르고 민희는 볼멘소리와 달리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속 편한 녀석 같으니.
“아,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저 그 정도 사리분별 못하지는 않거든요! 진심으로 사장님 힘드실까 봐 그런 거예요.”
당돌하지만, 맞는 말에 대꾸할 말이 사라졌다. 사적으론 질척거려도 일은 만족스럽게 하고 있으니 직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거지 뭐.
민희한테 수출 내역을 항목별로 정리해 오라고 했더니, 어디서 구해 왔는지 장쑤성 주요 변압기 업체들의 실적 자료까지 가져왔다. 우리 물건을 받아 가는 세 업체의 매출 증가세가 딱 보이는 자료.
막상 쓸 일도 없을 것 같지만, 뭐라도 하려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 나에 대한 감정을 일 잘하는 것으로 풀어내는 것도 예쁘다. 일 잘하는 직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예쁜 법.
“출장 준비하느라 고생했고, 연말이라 시간 많이 못 내니까 일정 빡빡해도 이해해 줘.”
“헤헤. 그럼요. 사장님 열심히 보필하겠습니다아!”
나와 여행이라도 가는 것인 양 신 나 있던 민희를 살짝 밟아 주고는 조용히 출국날을 기다렸다.
딱 반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퍼펙트한 변압기 수출로 에이전트 케이가 소개한 두 업체에게 확고한 신뢰를 안겨 줬다. 100억 원 가까운 물량을 안겨 준 그들이 여전히 고맙지만, 이젠 우리 회사의 이익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도 될 듯하다.
이번 중국행도 동방항공이다. 맛없는 기내식도 자꾸 먹다 보니 정 들게 생겼다. 다 좋은데, 기내식은 왜 이러는지 원.
가는 동안 말동무가 되어 줄 민희가 제 역할에 충실하며 쉴 새 없이 말을 걸어온다. 얘한테는 정들지 말자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은 준희 누나 안부나 생각하자.
“사장님, 중국말 공부 좀 하셨어요?”
“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겠니? 중국말은 뭐 읽기도 어렵고 쓰기도 어렵고, 아휴, 모르겠더라.”
“그래도 영어는 좀 하시잖아요? 그럼 수월할 텐데? 중국말이 처음이야 어렵게 느껴져도 익숙해지면 금방 배워요.”
“중국 사람이 말하는 것 듣고 있으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안 들려.”
“귀신 신나라 까먹는 소리? 그건 무슨 말이에요?”
9살의 나이 차이가 이리 크단 말인가? 요즘 애들은 그런 말 안 쓰나?
상하이 가는 비행기에서 깨달은 것은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사실이다. 아직 30대인데, 이렇게 아재가 돼 가는 것인가!
5개월 만에 다시 접한 푸동국제공항은 여전히 웅장하고, 여전히 사람이 많다. 피켓 들고 우리를 기다리는 에이전트 케이도 변함없다.
“어머, 지 사장님! 박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덕분에 수출도 척척 잘되고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박 사장님은 미모가 여전하시네요. 호호.”
가벼운 덕담으로 출전식이 끝났다.
상하이가 우리나라보다 많이 남쪽이라 따뜻하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겨울이다. 중국의 이 겨울. 따뜻하게 만들어 보자고!
초겨울의 살짝 으스스한 추위는 견딜 만한데, 최악인 대기 상태는 참기 힘들다. 우리도 미세먼지로 짜증 나지만, 원조 맛집에 사는 이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싶다. 다행히 서쪽으로 갈수록 노랜 하늘이 제 색깔을 찾아갔다.
달라진 것은 없다. 중국말은 여전히 시끄럽게 들리고, 기차역은 거대하고 복잡하다. 민희는 탑승권으로 생수를 받아 왔고, 까오티에는 여전히 빠르다.
달라진 것 없는 중국에서 12월의 두 번째 이벤트가 시작됐다. 난징변압기를 끼고 도는 끝없는 양쯔강의 물결은 도도하게 흐른다.
포마드를 잔뜩 바른 난징변압기 왕웨이 종징리가 환한 표정으로 우리를 반긴다. 저번에 봤을 때보다 살이 더 찐 것 같다. 요새 살림살이 좀 나아졌나 보네?
공장 마당 여기저기에 낯익은 흔적이 눈에 띈다. 우리가 만든 것 같은 변압기, 공장 한쪽에 쌓인 포장 박스들.
퇴근시간이 다 됐는데도 변압기를 실은 트럭이 오가는 분주함이 우리 덕인 것 같아 뿌듯하다. 바삐 돌아가는 공장 광경으로 왕 종의 환한 표정이 이해가 갔다.
“미스터 왕이 두 분 덕분에 요즘 재미가 좋답니다. 연체도 없고, 물건 잘나가니 아주 좋으시겠죠. 호호.”
에이전트 케이가 이 분주한 분위기를 한마디로 정리해 줬다. 사업가에게 돈 많이 버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저번에 왔었던 미스터 한은 안 보인다고 하네요? 그 부장님 얘기하는 거죠?”
왕 종이 덕준이를 그리워하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인연 한번 제대로 맺으면 평생 이어 간다는 중국 사람답다.
“아, 우리 한 부장요? 하하. 서로 죽이 아주 잘 맞았나 보네요. 이번엔 같이 못 왔습니다. 다음엔 꼭 같이 오겠다고 전해 주세요.”
“술 한번 마신 걸로 절친이 됐나 봐요. 호호.”
우리 덕준이.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귀가 몹시 가려울 테니 중국산 면봉이나 잔뜩 사 들고 가야겠다.
“자, 사무실 들어가서 계약서 쓰자고 합니다. 저녁 먹을 때 됐으니까 빨리 마무리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소리죠.”
“하하. 뭐 당장이라도 계약서 사인할 것처럼 그러시네요?”
“그럼요! 지금 난징변압기가 제2의 도약기라고 한다니까요. 왜 그러겠어요?”
에이전트 케이가 화기애애한 표정을 이어 가며 사무실로 인도했다. 저 밝은 표정처럼 계약도 잘될 것 같다. 의견 갈등도 없고 서로 만족하고 있으니 남은 것은 저녁 맛있게 먹는 일뿐이겠지?
준희 누나와 다른 느낌의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에이전트 케이가 말하다 말고 나에게 다가왔다. 다 들리는데도 다른 사람 들으면 안 된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말할 때 그 모습이다.
“전에 거래하던 업체들은 품질 때문에 문제가 많았어요. 변압기 납품하면 매일같이 문제 생겼다고 전화 오고 그랬단 말이죠. 근데 사장님들과 거래하고 나서는 그런 일이 확 줄어 버렸으니, 당장이라도 계약 못할 것이 없죠.”
“하하. 우리 회사나 여기 박 사장님의 금성전기가 변압기는 제대로 만듭니다. 앞으로도 품질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작년 대한전력 입찰 이후 1년간 단 한 번의 불량 판정도 없었던 업체가 우리 회사와 금성전기이다. 그거 정말 어려운 일이다.
1년간 총 48번의 검사를 받다 보면, 실수로라도 한 번쯤 불량 판정을 받기 마련이다. 불량이 없어도 대한전력 시험관이 일부러라도 불량을 때리기도 한다. 시험관과 업체의 유착을 의심 받을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이다.
그 많은 난관을 이겨 내고 무불량 납품 기록을 세운 회사다. 대한전력 납품 변압기보다 생산이나 검사가 훨씬 수월한 이깟 수출품 정도야 불량 내는 게 더 어려울 것이다.
“미스터 왕이 하자 보수비 절감한 걸로 저녁 대접 제대로 하겠답니다.”
“하하. 좋습니다. 들어가서 마저 얘기하죠.”
여름에 마신 따뜻한 녹차와 달리 지금의 따뜻한 녹차가 아주 좋다.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녹차처럼 대화도 따뜻하게 잘됐으면 좋겠다.
포문은 왕 종이 먼저 열었다. 에이전트 케이가 왕 종의 말을 번역해 알려 왔다.
“미스터 왕이 연간 계약에 대해서 설명하는데요. 역시나 올해 거래가 아주 만족스럽다고 합니다. 내년에도 좋은 거래로 서로 만족하면서 이 인연을 오래 이어 가자네요.”
“물론입니다. 앞으로 확실한 품질과 납기로 스트레스 받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박 사장님도 동의하시죠?”
“네, 그럼요. 품질은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모두 발언이 끝났다. 각자 내뱉은 말에서 이 자리가 협상의 자리가 아닌 계약 체결의 자리라는 향기가 가득 뿜어져 나왔다. 만년필이 어디 있더라.
“계약 규모는 사장님들 오시기 전에 제가 미리 미스터 왕이랑 얘기가 됐습니다. 이번에도 전력청과 계약을 따내서 물량이 화끈합니다. 호호. 총 48,900대에 액수로 2억 8,200만 위안이니까…… 잠깐만요. 계산 좀 해 보고요. 네, 원화로 하면 479억 정도 되겠네요.”
479억 원! 둘이 나눠도 240억! 아주 좋다. 수출을 관수에 버금갈 정도로 키우겠다는 목표가 이렇게 실행되는구나.
“계약규모는 좋습니다. 계약물량 세부내용을 알고 싶은데요. 상세내용을 알아야 다른 걸 논의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설마 이렇게 바로 계약하자는 건 아니겠죠?”
돈 벌게 해 주는 것은 고마운데, 너무 주먹구구식이다. 기껏 시간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녹차 한 잔으로 끝내려고 하다니! 최소한 계약서 초안이나 참고자료 정도는 내놔야지!
“아참! 내 정신 좀 봐. 호호. 제가 이렇게 정신이 없어요. 제가 자료 만들어 놓고 꺼내 놓지도 않았네요. 정신머리가 없어서 원.”
에이전트 케이가 부랴부랴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돌렸다. 나와 준희 누나가 사인만 하면 수수료로 10억 원이 떨어지니 신 나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너무 들떴어.
이제 본격적인 협상이다. 내가 먼저 시작하자.
“여기 보니까 삼상변압기가 전체 물량의 20프로 정도 되는데, 혹시 품목 조정이 가능합니까? 삼상 비중이 더 높았으면 좋겠는데요.”
누나를 바라보니, 눈빛만으로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 이번 협상은 누나를 위한 것으로 마음먹었다. 그나마 이윤이 남는다는 삼상변압기. 누나를 위한 내 이벤트다.
“미스터 왕이 주상은 계약액이 정해져 있어서 상관이 없는데, 삼상은 어떻게 될지 몰라서 주문량을 늘리기 어렵다고 하네요. 지금처럼만 좋은 제품을 꾸준히 공급해 준다면, 이번 계약과 별도로 삼상 주문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걸 기대해 보시죠?”
“긍정적인 뉘앙스로 얘기한 것이죠?”
“그럼요! 미스터 왕도 변압기 많이 팔고 싶어 하지 않겠어요? 저번에 저한테 내년엔 공격적으로 영업하겠다고 했으니까 기대하셔도 될 거예요.”
“네, 좋습니다. 일단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박 사장님, 괜찮으시죠?”
이미 눈으로 얘기를 끝냈다. 고맙다는 눈빛. 무슨 말이 필요하랴. 누나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음 요구 사항을 끄집어냈다.
“삼상은 앞으로 기대하기로 하고요. 주상변압기는 용량을 최소한으로 좁힐 수 있을까요? 왕 종도 아시겠지만, 만들 것이 여러 가지면 납기 맞추기가 쉽지 않거든요.”
당연한 얘기를 했다. 물건 만드는 사람은 한 종류로 쭉 뽑길 바란다. 반면, 사는 사람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꼴리는 대로 사고 싶어 한다. 이걸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과정이 협상일 것이다.
누나 말을 전달받은 왕 종이 고민하는 표정조차 없이 바로 ‘하오하오’를 외쳤다. 오호라, 화끈하네!
“미스터 왕이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최대한 편의 봐줄 테니 지금처럼 물건만 잘 만들어서 제때 납품해 달라고 합니다. 어때요? 맘에 드시죠?”
“하하. 감사합니다. 저도 하오하오입니다.”
이 소식을 들고 갔을 때 기뻐할 직원들 표정이 선하다.
변압기는 품목이 몇 가지 안 되지만, 용량이 사람 환장하게 한다. 주상은 5kVA부터 시작해 333kVA까지 수도 없고, 삼상은 거의 무한대다.
이것 찔끔 하다 저것 찔끔 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몸에 땀이 나면서 일이 손에 붙을 만하면 세팅 바꿔야 하는 짓이 어디 보통 일인가!
용량에 맞는 자재 찾기도 짜증 난다. 자재 헷갈려서 잘못 조립하면 짜증이 배가된다. 그걸 조금이나마 줄여 준 것만으로도 이번 출장은 성공이다.
이제 사인하고 밥 먹으러 갈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