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60)
260 기분 좋은 날
여론 형성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기사가 나오면, 그걸 근거 삼아 여기저기 퍼 나른다. 그게 또 기사로 나온다. 그렇게 몇 바퀴 돌고 나면 한 지역의 여론으로 자리 잡아 버린다.
정치인들과 언론들이 영혼의 단짝인 악어와 악어새 관계로 그걸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메커니즘을 활용한다면, 사장될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그러고 있다. 오윤경 기자가 쓴 기사가 적당히 무르익기를 기다리면서 사방에 전화를 돌렸다. 나주빛가람로타리클럽의 위력을 받아 보자고!
그 덕에 시민단체 몇 곳이 ‘우리나라를 좀 먹는 기업들의 불법적 행태를 묵인해서는 안 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 동네에서 끗발 있는 한 정당의 시당과 도당도 ‘착한 중소기업에는 당근을, 악한 중소기업에는 채찍’이라는 브리핑을 내기에 이르렀다.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특히 나주를 넘어, 전라남도와 광주를 먹여 살릴 혁신산단에 대한 수도권 기업들의 잦은 공격을 분노하는 여론도 꽤 형성됐다.
바로 임필성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지 사장! 안 그래도 전화할 참이었어.”
“전화할 참 맞습니까? 하하. 형님, 이제 슬슬 움직이시죠?”
임 변호사와 호형호제를 약속한 이후로 말이 한결 편해졌다. 나주 내려와서 형, 삼촌, 누나 등 가족이 참 많이 생겼다. 식솔이 많아졌으니 부지런히 돈 벌어야 할 판이다.
“내가 어제 최 프로랑 저녁 한 끼 했거든. 지 사장, 최 프로 알지?”
“잘 알죠. 그 검사님이 대한전력 일을 무혐의로 종결시켜 줘서 제가 이러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 나중에 기회 되면 육회비빔밥이나 한 그릇 사 줘. 아무튼 최 프로한테 건수 하나 생겼으니까 와꾸 잘 짜서 일 좀 키워 보자고 했지. 광주시민일보? 그거 지 사장 작품이지? 기사 아주 공들여 잘 썼더라고.”
오 기자한테 진짜 맛있는 것 사 줘야겠다. 광주시민일보에 후원도 두둑이 하고.
“형님이 보시기에 여론이 좀 조성됐다 싶습니까?”
“됐다마다. 최 프로도 그 얘기 하더라고. 지역 지도층들이 말이야, 여론 수렴한다는 핑계로 기관장들이랑 국회의원 등등 해서 정기적으로 만나고 그래. 거기서 최대근 의원이 지검장한테 뭐라고 했나 보더라고.”
“최 의원님도 맹활약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 회사에 힘이 돼 주는 분입니다.”
“지 사장도 인맥이 꽤 화려해 아주. 암튼 최 프로도 냄새 맡았으니까 내일 쑈 좀 할 거야. 고발장 내면 바로 수사 들어간다고 보면 돼. 중전기조합이 대한전력이랑 관련 있으니까 광주지검에서 맡아서 할 거야. 이제 공은 검찰에 넘어갔으니까 지 사장은 뒷마무리나 잘해.”
“증거 자료가 부족하진 않죠?”
“그럼. 나도 놀고만 있지 않았어. 돈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지 사장이 준 거에 나도 많이 보탰으니까 걱정 마. 이렇게 친절하게 고발하는데 수사 제대로 안 하면 최 프로랑 연 끊어야지.”
“하하. 형님만 믿겠습니다.”
리볼버에 총알이 장전됐다. 한 발이 아닌 여섯 발 꽉 채웠다. 러시안 룰렛인 줄 알고 방아쇠 당겼다간 바로 골로 간다. 중전기조합이 방아쇠 당기는 모습을 지켜보면 된다.
마음 편하게 감사 전화나 돌리자고. 괜한 오해를 살까 봐 연락을 멀리했던 최대근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 지 사장님! 아니 좀 자주 연락 주시지. 이러다 목소리 까먹겠습니다. 하하.”
“의원님 바쁘신데 방해해서 되겠습니까? 하하.”
“작년에도 후원금 그리 보내 주더니, 올해는 뭐 이렇게 빨리 보내 주십니까? 이거 감사합니다.”
“오백 보낸 거 가지고 그러십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올해는 활동 더 열심히 하시라고 미리 보내 드렸습니다. 하하.”
정치후원금은 한 명에게 최대 500만 원까지만 보낼 수 있다. 맘 같아서는 더 보내고 싶지만, 법이 그러니 지키는 수밖에.
그 아쉬움을 덕준이가 달래 줬다.
우리나라 근로소득자 절반 가까이가 면세자라고 하지만, 우리 회사 직원들은 소득세를 아주 많이 낸다. 세테크 전도자 덕준이는 정치후원금 10만 원씩 내라고 틈만 나면 홍보를 하고 나섰다. 나주에서 일하는 이들이 정치후원금 낼 곳은 최대근 의원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지 사장님께서 많이 도와주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영수증 보낼라고 주소 보면 죄다 혁신산단로예요. 하하. 후원금 좋은 곳에 아주 잘 쓰겠습니다.”
“이거 감사 인사 드리려고 전화했는데, 되려 인사를 받았습니다? 하하.”
“감사 인사요? 내가 한 게 없는데 뭔 감사 인사요?”
뗀 굴뚝에 연기 나고 있는데, 아니 뗀 척을 한다. 따지고 보면 이번 공격도 최 의원의 의정 활동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최 의원이 총대를 메고 PCB 함유 변압기 교체 지원 법안을 통과시킨 덕에 대한전력이 연말 입찰 이벤트를 열었다. 그 입찰에서 중전기조합의 몇몇 놈들이 나를 공격할 것이란 낌새를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도와주는 일은 절대 하지 않지만, 의도치 않게라도 도와주는 최 의원이 고마울 따름이다.
“의원님께서 저 많이 도와주는 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압니다. 저번 대한전력 일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매번 신세만 집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지역구에 있는 회사들이 잘되라고 의정 활동하는 것이지, 지 사장님 도와주겠다고 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왜 그러십니까? 하하.”
그래, 우리 사이에 무슨 고맙다느니 그런 소리를 하나 싶다. 조용히 정치후원금이나 두둑이 내면 그만이지.
“하하. 맞습니다. 제가 열심히 회사 키워서 의원님 덕분에 나주 발전했다는 소리 듣게 할 테니, 뭐가 됐건 그걸로 퉁 치시죠.”
“좋습니다, 좋아요. 지 사장님께서 나주에 공장 차리고 나서 인구가 꽤 늘었어요. 이게 다 사장님 덕분이에요.”
“인구 더 늘어서 단독선거구 되도록 힘 좀 쓰겠습니다. 하하.”
“단독선거구 되면 지 사장님 출마하는 것 아닙니까? 이거 긴장 좀 해야겠습니다. 하하.”
덕담을 주고받는 전화가 종료됐다. 돈 잘 벌어서 펑펑 쓰고 살면 그만이지, 무슨 고관대작 되겠다고 출마냐. 맘 편하게 사는 게 낫지.
벚꽃 필 때도 됐는데 말 나온 김에 옷이나 사러 가자. 산뜻한 봄 옷 입으면서 봄기운을 만끽하자고.
“누나! 쇼핑하러 광주 갈 건데, 가이드 좀 해 줘요!”
“쇼핑요? 웬일이래요?”
준희 누나에게 쇼핑 데이트 신청을 했더니, 화들짝 놀란다. 그래, 내가 나에겐 너무 안 쓰고 살았어. 그러고 보니 손목도 좀 허전해.
“돈 많이 버는 사람이 팍팍 소비를 해 줘야 경제가 잘 돌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돈 안 써 봐야 세금으로 다 나가는데, 좀 쓰고 살아야죠.”
“하하. 좋아요. 언제 갈 거예요?”
쇠뿔 당겼는데 바로 빼야지. 반차 내고 일찌감치 나와 광주로 차를 몰았다.
아주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충동적으로 돈 쓰고 싶을 때 말이다. 돈 없던 시절에는 인고의 노력으로 버텨 냈고, 돈이 넘쳐 나는 지금은 오늘이 그날이다. 이젠 참지 않으리.
“정수 씨, 오늘 무슨 날이에요? 뭐 로또라도 됐어요?”
백화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누나가 신기하다는 듯 질문을 쏟아 냈다. 로또는 3년 전에 이미 됐고.
“아무 날도 아니에요. 그냥 일도 잘 풀리고 괜히 기분이 좋아서 막 지르고 싶네요. 이런 날 제 옆에 잘 붙어 있으면 콩고물 마구 떨어지니까 기대하세요.”
“하하. 뭐 명품이라도 선물해 주려구요?”
대답하지 않고 누나 손을 잡았다. 돈 쓰고 싶은 날인데 그깟 명품 따위야!
덕준이와 나주 간다고 처음 광주에 도착했을 때 눈에 뜨였던 백화점에 도착했다. 1층부터 샅샅이 훑어 주마.
“여기는 명품 매장이 많지 않아요. 일데나 미래백화점이 더 낫다고 하더라구요.”
“오호. 누나도 그쪽으로 빠삭한 모양이네요?”
“뭐 저도 오늘 정수 씨처럼 지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가방 하나 정도 사죠. 날 위한 투자랄까? 하하.”
“그럼 오늘 누나를 위해 투자 한번 하겠습니다.”
누나 손을 잡고 명품 매장 한 곳으로 끌고 갔다. 왜 비싼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하나씩 갖고 싶어 한다는 그 매장.
기세등등하게 들어가려는데, 젠장. 웨이팅이 웬 말이냐! 느낌 안 나게시리.
“오늘 돈 못 써서 안달 났나 봐요? 정수 씨 기분 한번 맞춰 주죠 뭐. 원하는 거 하나 고르면 되죠?”
준희 누나. 이 여자의 장점이 이것이다. 부담스럽겠지만 내색하지 않고 상대방 기분을 맞춰 주는 배려. 받은 만큼 줄 수 있는 가진 자의 여유일 수 있겠지만, 타고난 성품이 그렇다.
“가방 고를 줄 알았는데, 지갑요?”
“여기서는 지갑이라고 안 하고 월릿이라고 해요. 가방 잘 안 들고 다니니까 정수 씨 거랑 제 거랑 하나씩 해요. 어때요?”
홍길동도 아니고 지갑을 지갑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 매장. 맘에 안 든다. 가격도 맘에 안 들어.
결국 명품 냄새 최대한 안 나는 걸로 한 개씩 지르고 났더니 280만 원이 날아갔다. 이런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자기 최면을 걸며 매장을 벗어났다.
돈 쓰는 것도 쉽지 않다. 카드 긁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집어치워야 가능한 일 같다. 벼락부자의 삶도 썩 좋진 않네.
“자, 이제 옷을 사러 가 볼까요?”
“일단 2층부터 가요. 돈 쓰기로 마음먹었으면 손목에 시계 하나는 둘러 줘야죠.”
그나마 돈을 좀 써 본 누나의 리드에 맡기기로 했다. 몇천만 원은 우습다는 시계. 까짓것 하나 지르지.
“4천만 원요?”
놀라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부끄럽게도 살짝 놀라고 말았다.
진짜 회장이나 찰 것 같은 올드한 이미지의 브랜드 건너고, 아방가르드하고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이 맘에 들었는데 너무 과하다는 누나의 만류에 또 건너고. 그렇게 찾아간 이 매장에서 딱 마음에 드는 시계를 골랐다. 그런데 가격이 참 거시기하다.
누나가 귓속말을 건넸다.
“좀 비싸긴 한데, 더한 것도 수두룩해요. 맘에 들면 눈 딱 감고 질러요. 이럴 때 아니면 절대 못 사요.”
악마의 속삭임 같다. 그 유혹에 넘어가 주겠다.
“이걸로 할게요.”
그냥 구경하러 온 사람 취급하던 직원이 중국 벼락부자 보는 눈빛으로 바뀌었다. 오기를 부리게 하는 고도의 영업 전략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력으로 나가는 변압기 50대를 지불하고 매장을 나왔다. 손목이 묵직한 것이 영 어색하다.
수시로 걸려 오는 은행 전화를 이기지 못하고 한도 넉넉한 카드 하나 발급받은 것이 여기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카드 포인트 무지하게 쌓이겠네. VIP의 삶이 이런 건가 싶다.
누나가 매장을 나오자마자 환한 미소로 지름신 강림을 축하해 준다.
“설마 했는데 진짜 살 줄은 몰랐어요. 정수 씨 이제 보니까 진짜 부자 느낌 나는데요? 하하.”
“누나도 하나 골라요.”
“투자는 이미 충분히 받았어요. 이걸로 수익 내서 배당 화끈하게 해 줄게요.”
“근데 지름신 온 건 전데 누나가 더 신 난 것 같아요.”
누나가 크게 웃으며 느닷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수 씨. 그동안 소처럼 일만 하며 살았잖아요. 직원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베풀면서 말이에요. 가끔씩은 이렇게 자신을 위해 과소비해도 괜찮아요. 정수 씨는 그래도 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제가 신 난 것 같네요. 하하.”
“어휴. 민망하게 면전에 대고 그런 소리를 합니까? 하하.”
“과분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정수 씨는 그럴 자격이 충분해요. 사람들의 애정과 칭찬을 받아도 넘치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누나의 목소리가 헝가리 칸테무스 합창단의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이 사람의 존재. 난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구나.
“지금이야 돈 쓰는 것이 조금 어색하긴 한데, 나중에 익숙해지면 어쩌나 싶기도 해요.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이러다 돈에 욕심이 생길까 싶기도 하고.”
“내가 아는 정수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좋다고 이렇게 붙어 있는 거구요. 망나니들처럼 살 사람도 아니고, 초심을 잃을 사람이 아닌 걸 아니까.”
누나가 애정을 듬뿍 담은 팔짱을 끼며 고백을 던졌다. 부지불식간에 던지는 고백, 이게 참 사람을 뜨겁게 만든다.
그 뜨거운 기운을 이어 7층 남성 의류 매장까지 화끈하게 섭렵했다. 오늘 여기에 변압기 60대 하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