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59)
259 사장들
벚꽃.
한 소설가는 벚꽃을 두고 무더기로 일시에 피었다가 꽃샘바람을 타고 숨 자지러지도록 나부끼는 지향 없는 슬픔이라고 표현했다.
가슴을 저리게 하는 그 꽃. 그 꽃이 피기까지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사랑의 결실로, 누군가에게는 청소하기 힘든 고난으로 다가오는 그 꽃이 피기 전에 내 할 일을 마무리하고, 진짜 내 일을 하자.
잠시 회사 일을 등한시했어도 회사는 아주 잘 굴러 갔다. 이가 없어도 잇몸으로 줄을 물어 끌고 가는 선원이자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내 방문을 벌컥 열고 황미연 사장이 들어왔다. 날이 춥든 덥든 늘 씩씩하면서도 쑥스러워하는 사람. 뭔가 좋은 소식을 들고 왔을 것이란 기대감이 벌컥 열린 문과 함께 다가왔다.
“어서 오세요. 요새 어수선하고 정신없죠?”
“뭐 어수선한 게 하루이틀인가요? 다음 달에 새 공장 들어서면 정리되겠죠.”
공장의 대대적인 확충으로 사방에서 공사 소리가 요란했다. 회사들을 분사했지만, 독립된 사업장이 없어 더부살이하는 소란함까지 가중되는 상황이다. 황 사장은 이 정도 소란은 일도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네, 한 달만 잘 버텨 주세요. 공사 끝나고 회사별로 새집에 자리 잡고 나면 일하기 훨씬 수월해질 겁니다. 계획하고 계신 것도 척척 진행될 거구요.”
“안 그래도 그거 말씀드리려고요.”
ODI에서 가장 큰 포션을 차지한 코아사업부가 분사해 떨어져 나가자, 황 사장이 그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몇 달을 동분서주했다. 그 성과가 나올 때가 됐다.
“어제 탭판이랑 방압변 시제품이 나왔는데, 아주 잘 나왔어요.”
“들고 오신 게 그겁니까? 어디 한번 볼게요.”
황 사장이 김치통에 고이 모셔 들고 온 신제품을 개봉했다. 제품만 잘 나왔다면 판로야 문제가 없다. 이미 조합을 통해 우리 제품 구매해 달라며 약사발을 거하게 풀어 놨다.
“설명을 드리면요, 탭판은 조립하기가 힘들잖아요? 권선에서 결선한 선을 일일이 나사 풀어서 끼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걸 줄여 보려고 설계부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오호. 그 과정을 다 없앴다는 말씀이죠?”
“하하. 그 정도는 해야 어디 가서 신제품 나왔으니 써 달라고 얘기할 수 있죠. 최형택 부장님이 설계하느라 고생 좀 했어요. 아! 김진욱 이사님도 고생 많이 했구요. 아무튼 여기 보시면 기존 제품보다 조립이 훨씬 수월하게 개선했어요.”
“딱 봐도 한눈에 보이네요.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대한전력에 납품하는 주상변압기에는 개당 5천 원짜리 탭절환기가 들어간다. 탭판이라고도 하고, 탭체인저라고도 하고.
전기라는 것이 이론대로 항상 일정한 전압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 대한전력이 변압기까지 22.9kV로 쏘고, 변압기가 그걸 220V로 바꿔 주지만, 1, 2차 전압이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그래서 5천 원짜리가 정격전압을 유지하도록 해 준다.
문제는 고작 5천 원짜리 주제에 조립시간을 꽤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4파이짜리 황동볼트 풀다가 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거 찾는데 하세월이다. 볼트 찾다가 성질나서 대충 철볼트로 채우다가 변압기 터지는 일도 종종 생긴다.
황 사장은 그걸 획기적으로 개선해 버렸다. 결선된 선을 꽂고 원터치로 잡으면 끝이다.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것이지만, 생각만 하던 것을 구현하는 것이 기술이지.
“현장에서 엄청 좋아하겠는데요? 판매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 이 걸로라도 재미를 봐야죠. 요걸로 연매출 18억 정도는 나올 거예요. 에휴, 그래 봐야 푼돈이네요.”
“코아사업부 내보낸 것이 못내 아쉬우신 모양입니다? 하하.”
“그럼요! 매출 500억짜린데요. 지금 준비하는 거 다 모아도 50억도 안 되잖아요.”
아쉽다고 얘기하지만, 아쉬움이 아닌 그만큼 다시 키우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20년 가깝게 보냈던 전업주부의 모습은 이제 찾으래야 찾을 수가 없다.
“탭체인저는 뭐 더 얘기 들을 것도 없이 백프로 합격입니다. 그다음은 방압변인가요?”
“네네. 이것도 뭐 애들 짤짤이 하는 수준이라 민망하긴 하네요. 그래도 이것도 아주 물건이 잘 나왔어요.”
개당 3천 원짜리 방압변. 변압기 내부의 가스를 빼 주는 보조장치인데, 이것도 조립이 지랄 같다.
기름이 새지 않도록 테프론 테이프로 감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업대에 앉아서 방압변에 테프론 감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하는 무아지경에 빠진다.
“테프론이 아주 예쁘게 잘 감겨 있네요? 계획대로 나온 건가요?”
“네, 맞아요! 처음엔 록타이트를 자동으로 쏴 주는 식으로 해 볼까 했는데, 가격도 가격이고, 생산도 쉽지 않아서 테프론을 자동으로 감는 것으로 했죠. 이것도 최 부장님 아니었으면 못했을 거예요.”
황 사장이 밥상 차린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며 모든 공을 최 부장에게 돌렸다.
솔직히 이건 인정이다. 최 부장이 문자님의 기똥찬 설계로 만든 기존 설비를 활용해 생산설비 설계를 뽑지 않았으면 눈앞에 이 제품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공은 문자님께 바쳐야겠군.
“테프론만 자동으로 감아 줘도 아주 감지덕지죠. 좋은 제품들 만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기연구원 시험의뢰는 하셨죠?”
“회장님께 이거 보여 드리고 나서 바로 신청하려구요. 최대한 빨리 성적서 받아서 바로 납품 들어가야죠. 유 사장님이 설비 바로 만들어 주기로 했으니까 양산도 차질 없을 겁니다.”
두 제품 다 해서 30억짜리. 자동으로 팍팍 찍어 내니 자재 값 빼고는 다 수중에 들어온다. 회사가 커지는 통에 몇백억, 몇천억 운운해서 그렇지, 이것도 아주 꿀맛이다.
“전기연구원 재촉해서 성적서 빨리 받아 주세요. 올해도 사장님 덕분에 영업이익 엄청 나오겠습니다. 하하.”
“지금 놀리시는 거죠? 이런 조막만한 걸로 얼마나 재미를 본다고 그러세요! 기다려 보세요. 제가 어떻게든 작년 매출 비슷하게 올려 볼 테니까요.”
“하하.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합니다. 태인산업이 오디아이 따라잡겠다고 눈에 불 켜고 있으니까 분발하세요.”
황 사장도 눈에 불을 켜며 나갔다.
황 사장 덕분에 변압기에 들어가는 부품 대부분을 자체 생산으로 해결하게 됐다. 하다못해 장갑과 면보루 같은 잡다한 용품까지도 말이다. 공구상가 덕이다.
3월이 되자마자 상가단지에 세운 공구상가가 혁신산단 공장들의 애로 사항을 해결해 주고 있다.
혁신산단 분양률이 60퍼센트를 넘었지만, 실제 공장을 세운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계약만으로 받을 수 있는 대출 혜택만 이용해 먹고 착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이다.
가동에 들어간 공장이 서른 곳이 채 되지 않아 편의시설이 여전히 부족하다. 편의점과 공장식 뷔페식당에 이어 공구상가까지 들어섰으니 좀 나아지겠지.
공구상가 사장이 커피도 팔겠다고 하니 가끔 찾아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해 진하게 한 잔 마시고 와야겠군. 공단의 칼칼한 공기와 함께 들이마시는 아이스아메의 알싸한 맛, 기대된다.
뉴욕 125가에 앉아 커피 마시며 뉴요커가 된 기분에 빠져 있자니, 두 김 사장이 문을 벌컥 열며 찾아왔다. 사채 받으러 온 사람 같은 두 김 사장을 보니 이곳이 이스트할렘인가 싶다. 십 원에 한 대씩 때릴 건가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앉으시죠.”
중국 순회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두 김 사장. 내일이면 수출품 첫 출하가 이뤄진다. 얼마 되지 않은 금액이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희철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크게 기대했던 폴리머부싱 수출이 생각만큼 풀리지 않았어도 의욕만큼은 중국 전역을 휩쓸고 온 사람 같다.
“이번에 샘플로 나가지만, 반응이 괜찮을 거라고. 가격도 최대한 맞춰 주기로 했으니까 이제 주문 많이 들어올 거야.”
“난통전기 양푸첸 총경리가 열심히 팔아 보겠다고 했으니 믿고 기다려 보죠 뭐. 수출변압기에 들어간 부싱 때문이라도 잘될 겁니다.”
“맞아맞아. 안 그래도 양 사장이 그 얘기 하더라고. 우리 변압기 수입하는 회사들 때문에 폴리머부싱 좋다는 소문이 많이 퍼졌다는 거야. 가격만 도기 부싱 수준으로 맞춰 주면 좋겠다고는 하는데, 어휴, 그건 도저히 못 맞추겠더라고.”
폴리머부싱 중국 수출이 잘 안 풀린 것은 역시 가격 때문이었다.
우리가 만드는 제품이 중국산 애자를 수입해 부싱으로 만든 것보다 살짝 저렴한 수준이라 중국 현지에서는 가격 차이가 꽤 난다.
희철 사장이 영업 마인드로 달려들어도 가격 차이까지 좁힐 수는 없었다. 뭐 어때!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잘 팔아먹고 있는데!
“밑지면서까지 무리하게 수출할 이유는 없죠. 폴리머부싱은 별도의 시장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 마음 편하실 거예요. 폴리머부싱 시장에서는 우리 제품이 최고니까 수요가 꽤 있을 겁니다.”
“하하. 우리 회장님은 이게 좋아. 다른 회사 같았어 봐. 어떻게든 수출 성사시켜서 매출 키우라고 들들 볶았을 거 아냐? 진짜 우리 회장님, 사랑합니다. 하하.”
“반사!”
일이 항상 잘 풀리면 사기지. 안 풀릴 때 격려하고, 잘 풀릴 때 박수 쳐 주는 게 내 역할이지 뭐.
분위기가 이완되자, 원코아 김신우 사장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코아는 내일 두 컨테이너 물량 나갑니다. 중량물이라 많이 싣지 못하는 것이 아쉬운데, 김상진 사장이 운임 최저가로 보내 주겠다고 해서 좀 낫긴 합니다.”
“잘하셨습니다. 코아 수출은 힘 좀 써 주세요. 원단 구입량이 조금만 더 많아지면 단가 더 낮출 수 있거든요. 한덕준 부장이 조건만 되면 당장이라도 가서 킬로당 백 원씩 더 빼겠다고 하니까, 수출 확 키워 봅시다.”
“네, 회장님. 한 부장하고도 얘기 나눴습니다. 원단 단가가 백 원씩만 빠져도 엄청나죠.”
호주에서 들여온 철광석과 석탄으로 포스코가 코아 원단을 만든다. 그걸 사서 예쁘게 코아로 만들어 중국에 판다. 중국 사람들은 좋은 품질과 솔깃한 가격에 띵호와를 외친다. 아름다운 국제 무역 흐름에서 우리 회사는 꿀을 빤다.
“우리 김 사장님이 알고 보니까 영업 귀재더라니까. 나는 고작 부싱 하나도 제대로 못 팔았는데, 김 사장님은 술 몇 잔 마시더니 아주 신 나게 팔더라고. 하하.”
“하하. 내가 몰랐던 재능이 있었나 봐. 물건 파는 것도 해 보니까 아주 재미있더만?”
희철 사장이 부러움과 시샘 섞인 감탄사를 내뱉었고, 김 사장이 그걸 날름 받아먹었다. 서로에게 가하는 적절한 채찍질이 서로를 성장케 하고, 회사를 살찌우게 할 것이다. 서로 양껏 채찍을 휘두르셔.
“같이 중국 다녀오더니 아주 형제라도 된 것 같습니다?”
“하하. 김 사장님이 나보다 나이 많으니까 형님이지 뭐. 형님! 말 나온 김에 이따 퇴근하고 술 한잔 콜?”
“술 좋지. 회장님도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가시죠?”
“에이, 우리 회장님은 술 안 좋아하잖아요. 소주 한 병도 마실까 말깐데. 그냥 우리끼리 가자고.”
얼씨구? 거참, 보기 좋네. 회사에서 잘리고 집에서 놀던 실력자를 데려온 희철 사장. 그 기대에 부응하며 회사 급성장에 일조한 김 사장. 두 김 사장의 우정 영원하길.
“참, 이번에 중전기조합에서 빠져나온 회사들이 새 조합 세우겠다는 얘기 들으셨죠? 늦어도 여름 전엔 새 조합 만들어질 겁니다.”
“혹시 그 조합도 우리랑 거래하기로 한 거야?”
술 마실 생각에 얼굴이 환해진 희철 사장이 더 환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맞습니다. 중전기조합 다 죽이지 못할 바엔 그나마 나은 회사들만 빼내서 꿀 좀 빨아야죠. 조합 세우기 전이라도 자재 공급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으니까 준비들 해 주세요.”
“그거 짭짤하겠네. 우리 조합보다 당연히 비싸게 팔아야겠지? 하하. 새 조합에 들어갈 업체가 몇 군데나 되는데?”
“열두 곳인데, 이번 광풍에 몇 군데 날아가긴 할 겁니다. 그래도 발주량이 꽤 될 거예요.”
희철 사장이 수출로 못다 이룬 매출 신장의 꿈을 이룰 것이란 기대감에 부푼 듯이 보였다. 기대감에 빠진 사이에 김 사장이 다시 치고 들어왔다.
“업체들 연락 오면 협의 잘하겠습니다. 이거 진짜 영업 잘하는 사람은 회장님이십니다. 하하. 회장님께서 알아서 일감 물어다 주시니 일도 없습니다.”
입사 이후로 계속 아부를 놓지 않는 김 사장. 그 아부가 불편하게 들리지 않는다. 기분이 좋다. 술이 살짝 당기는데?
“하하. 그럼 오늘 저도 합류할까요? 한 병 이상 마실 자신 있습니다.”
그날 무려 2병이나 마셨다. 아따 마,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