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72)
272 카르페디엠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는지 모르겠다. 벌써 7월. 이제 여름이다.
올 여름은 작년처럼 덥지 않겠지 기대했건만, 역시나 덥다. 내년엔 얼마나 더 더울 셈인지 원.
7월이 오기 전에 푸켓에서 보낸 3박 5일은 내 생애 최고의 해외여행이었다. 여행 목적으로 해외에 가 본 적이 없었으니 당연히 최고였겠지만…….
* * *
신혼여행 가는 부부들로 가득한 비행기부터 설렘을 안겨 줬다.
미처 머리핀을 뽑지 못해 공항 검색대에서 걸린 신부를 보는 재미도 쏠쏠했고, 국적기 비즈니스클래스의 기내식을 먹는 재미도 아주 좋았다.
“우리 중국 갈 때 먹었던 기내식하고는 아주 클라스가 다르네요!”
“정수 씨! 조용히 좀 얘기해요.”
“제가 부끄러워요? 너무하네. 비행기 많이 안 타 본 사람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하하. 앞으로 이 누나가 비행기 많이 태워 줄게.”
상전벽해다. 비행기라고는 어렸을 때 아빠 발바닥 위에서 ‘슈웅슈웅’ 하던 것이 전부였던 내가 수학여행이 아니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비즈니스클래스로 탈 수 있다는 것이 말이다.
부자의 삶. 이번 여행의 콘셉트다. 돈 따위는 아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스케줄을 잡았다. 현지 가이드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액티비티를 다 즐겼고, 틈만 나면 마사지를 받았다.
스노쿨링하다 먹은 바닷물은 스테이크와 다채로운 해산물로 밀어냈다. 태국의 대표음식이라는 똠양꿍도 빠질 수 없지.
똠양꿍을 흡입하는 누나에게서 야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태양에 살짝 익은 얼굴, 머리를 채 말리지 못해 어깨 부위가 젖어 버린 티셔츠.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스윔슈트 이슈 촬영차 푸켓에 온 모델과 밥 먹는 이 기분.
“누나, 똠양꿍 맛있어요?”
누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도 알아. 똠양꿍이 세계 3대 수프니 뭐니 하는 거. 근데 이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맛이라고. 알로에 주스에 레몬과 김치를 넣고 끓인 맛이랄까?
“중국 음식은 그렇게 잘 먹었으면서, 이건 입에 안 맞아요?”
“맛있긴 한데, 이게 오묘하네요.”
“그 맛으로 먹는 거예요. 오묘한 맛. 하하. 이 누나가 비행기도 태워 주고, 요리도 다양하게 먹여 줘야겠네. 에휴, 이거 애 키우는 것도 아니고. 푸하하.”
어리다고 놀리지 말아요. 수줍어서 말도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 후훗.
즐기고, 먹고, 마시고. 풀빌라 들어와서는 망고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또 먹고, 마시고, 놀고.
에덴동산만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다. 이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에서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 년 살면 참 좋겠다.
“정수 씨, 회사 생각 나요?”
신 나게 먹고 풀장에서 물놀이하다 썬베드에 앉아 광합성하고 있으니, 누나가 햇빛을 막아서며 물었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비키니 자태에 프로포폴이라도 맞은 듯 의식을 잃게 만든다.
“아! 참 좋네요.”
“무슨 소리예요? 회사 생각 나냐구요.”
아무 생각도 안 나게 만들어 놓고는 무슨 질문이 그래!
“회사 생각 당연히 하나도 안 나죠…… 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어쩔 수가 없네요. 하하.”
“그쳐? 아휴, 우리도 어쩔 수 없나 봐요. 처음 왔을 때는 회사 생각 하나도 안 하고 푹 쉬다만 가자 생각했는데, 4일째 되니까 맘처럼 안 되네요.”
놀러 와서도 회사 생각을 하는 이 비운의 신세. 그나마 나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누나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며, 문자며, 깨톡이 날아왔다. 한시가 급한 거래처들, 눈치 없는 직원들.
사장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중소기업일수록 전화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난 회사도 쪼개고 권한도 쪼개 나눴다. 이런 나도 회사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누나는 오죽할까 싶다.
우리 악랄한 직원들한테서는 딱 한 번의 깨톡뿐이었다.
잘 놀고 무사히 복귀하라는 민희의 깨톡. ‘올 때 메로나’는 무슨 소리야? 그리고 숭어 만 원짜리 배달되냐는 잘못 온 문자 한 통. 오징어밖에 안 된다고 답장 보낼 뻔했다.
누나처럼 계속 연락 오는 것은 짜증 나지만, 나처럼 너무 연락이 없으면 서운하다. 우리 직원들은 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구만. 이 악랄한 직원들에게 호된 돈벼락을 내려야겠어.
“바쁜데, 괜히 같이 놀러 오자고 했나 봐요.”
“아니에요. 이렇게 안 쉬면 계속 못 쉬어요. 연락이 많이 와서 그렇지 놀러 온 것은 아주 좋아요.”
누나의 여운 있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화기가 또 울렸다. 내 시신경을 장악해 버린 누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아쉽네.
“아, 네. 사장님! ……표준 350kg 세 대요? 고맙습니다. ……단가는 그 전이랑 똑같구요. 언제까지 필요하세요? 다음 주 금요일까지요? 네, 알겠습니다. 매번 감사합니다. 조만간 식사 한번 해요. ……아, 네. 호호호.”
영업 냄새가 청국장 끓이듯 진하게 나는 저 목소리. 나 같아도 변압기 사고 싶겠다. 근데 푸켓까지 와서도 저러고 있다니!
“우리 박 여사님. 장사가 아주 잘되십니다. 하하.”
“아휴, 진짜 미치겠어요. 이 사장님은 우리 부장님 놔두고 꼭 저한테 전화를 해요. 변압기 많이 사 주는 사장님이라 뭐라 할 수도 없고.”
“여사님 목소리가 감미로워서 계속 듣고 싶어 그런가 보네요. 호호호. 웃음소리도 아주 예술이에요.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아주 녹아 버리겠네요.”
누나가 말없이 빈 썬베드 위로 올라갔다. 슈퍼플라이 스플래시라도 하겠다는 것인가?
“엄마야!”
고난도 스플래시에 잽싸게 피해 풀로 뛰어들었다. 저 에어백에 맞으면 죽을 수도 있다. 타박의 난이도가 점점 높아지는군.
“어디 한번 계속해 봐요.”
풀로 따라 들어와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누나에게 바디슬램을 걸었다. 이런 게 휴양지의 낭만이자 행복이 아니겠는가.
이 짓도 내일이면 끝이다. 사장이라고 해서 출근을 즐겁게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문득 회사를 운영하며 치열하게 사는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됐다.
돈? 이미 평생을 펑펑 써도 모자람 없이 벌었다. 권력? 명예? 34년을 살면서 한 번도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물에 빠져 씩씩거리는 누나를 구출해 주고는 삶의 만족도 조사에 나섰다.
“누나. 누나는 지금 생활에 만족해요? 저랑 이렇게 있는 거야 당연히 좋을 거고. 일하는 것 말이에요.”
씩씩거림을 멈춘 누나가 또 뜬금없는 소리 한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다 받아 주는 우리 착한 누나.
“내일 돌아갈 생각 하니까 현타 왔어요? 하하. 회사 일만 해도 정신없는데, 만족하니 마니 그럴 생각할 틈도 없죠. 벌려 놓은 거 자리 잡고 좀 한가해져야 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돈도 많이 벌었는데, 이렇게 놀고먹으며 살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전생에 배짱이였나 봐요.”
누나가 독일 유학생 시절을 연상케 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저기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면 딱이겠구나.
“노동이라는 것이 생계 수단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우리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한 도구라는 점을 잊지 마세요. 자본주의 모순 때문에 노동 소외가 생기는데, 그걸 우리만의 방식으로 극복해야죠. 저도 그렇지만, 정수 씨도 극복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어려운 말인데 개념이 낯설지 않은 것이, 대학교 때 어설프게 배웠던 것 같기도 한데 말이야. 그 비싼 등록금 내면서 공부를 너무 안 하긴 했어.
“변압기업계 빅4가 되겠다는 목표를 위해 계속 달려야 한다는 의미겠네요. 그러자니 얼마 안 남은 젊음이 아쉽기도 하고…… 오만 생각이 다 들어요. 어렸을 때 원 없이 놀 걸 그랬나 싶고.”
“하하. 나중에 이렇게 잘 될 줄 알고 미리 논 사람이 세상이 어디 있겠어요? 저도 하나도 못 놀았으니까, 앞으로 많이 놀아요. 시간 좀 내 주죠 뭐.”
“네, 마님. 누룽지 주면서 많이 놀아 주세요.”
“하하. 그러게 제가 전부터 일에 올인하지 말고 쉬엄쉬엄하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번아웃 증후군이에요. 일에 몰두한 만큼 큰 성과가 있었지만, 그만큼 허무해지는 것 아니겠어요?”
“허무함이라…….”
“저마다 출발점은 다르겠지만, 목적지는 다르지 않을 거예요. 빨리 가 봐야 나중에 올 사람들 기다리는 것밖에 더 하겠어요? 천천히, 더디 가도 괜찮아요.”
허무함.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처음에야 말도 안 되는 성공에 고무됐었다. 이대로만 가면 대기업 총수도 머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 달리기만 했더니 허무해진 것일까?
창업 3년 만에 매출 3천억, 4천억을 바라보는 빠른 성공이 독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빠른 성공은 빠른 은퇴를 부른다더니…….
나 홀로 깊은 생각에 빠져 있으니, 누나가 수건으로 머리와 얼굴을 닦아 주고는 선물 하나를 건넸다.
“생각이 많을 때는 이것만 한 것이 없다면서요? 이 경치 즐기면서 한 대 피워요.”
물놀이하고 나서 피우는 담배가 꿀맛인 것은 어찌 알고! 이 사람, 역시 배려의 아이콘이야.
“우리 회사가요, 저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잘 나와야 매출 100억이었어요. 그게 딱 5년 지나니까 600억을 넘기는 수준까지 커졌는데, 진짜 힘들었어요.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죠. 더러운 꼴도 많이 봤고, 스트레스도 정말 많았어요. 저도 그랬는데, 정수 씨는 어떻겠어요?”
담배 한 대 피우니 누나의 위로가 아리아처럼 들린다. 위로는 고맙지만, 핀트가 어긋난 것 같다. 힘들어서 현타가 온 것이 아니라, 사업이 너무 쉽게 풀려서 그런 것이니 말이다.
올해 입찰은 무난하게 끝날 것이고, 수출도 여전히 탄탄대로다. 새 아이템으로 준비하고 있는 전력용 변압기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개발을 끝내고 시장에 안착할 것이다. 그다음에는?
변함없이 갈 길이 멀다며 달릴 것이 분명하다. 그 와중에 문득문득 찾아올 현타가 문제다. 답은 신 나게 노는 것인가? 지금보다 더 정신없이 달리는 것인가?
누나는 담배를 피우며 사색에 빠진 나를 잠자코 지켜만 봤다. 저 얼굴을 보니, 답이 떠올랐다.
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답을 찾자며 깊이 생각하는 것은 내 스타일이 아니다. 그냥 내 감과 내 주변의 은인들을 믿고 그때그때 끌리는 대로 꼴리게 사는 것이 내 방식이지.
살아 보니까 장고 끝에 악수 두더라. 카르페디엠!
“하하하.”
“왜 그래요, 갑자기? 약 먹을 때 된 거예요? 하하.”
사색을 끝낸 의미로 허공에 웃음을 날려 보내자, 누나가 화들짝 놀라며 없는 약이라도 만들어 줄 것처럼 반응했다.
“누나 말대로 내일 돌아갈 생각 하니까 현타가 온 것 같네요. 뭐 어쩌겠어요. 충전 잘했으니까, 모레부터 또 미친 듯이 일해야죠. 현타 오면 누나가 잘 위로해 주겠죠. 하하.”
“일상에서 일탈하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요. 그래서 휴가보다 그 이후가 더 중요해요. 잘 이겨 내는 것도 능력이에요.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더 잘 이겨 낼 수 있을 거예요. 약 필요하면 바로 얘기해요. 하하.”
혼자가 아니라는 말. 가족 같은 우리 직원들이 했던 말보다 더 진득하게 귀에 꽂혔다. 이 사람,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야. 약 처방 좀 받아야겠어.
“아무래도 지금 약이 있어야 할 거 같은데요. 여기다 주사 한 대만 놔 줘요.”
내 입술을 가리키며 쌈마이스러운 멘트를 날렸다. 나도 참. 국빈관나이트에서도 안 통할 이 잔기술을 어찌 입 밖으로 꺼냈을꼬. 그 대가가 참 달콤하네. 냠냠.
“자, 주사는 여기까지. 이제 저녁 먹고 사이먼쇼 보러 가야죠!”
“이쁜 형들 나오는 공연 좋죠!”
가이드가 푸켓에서 유명한 트랜스젠더쇼라며 꼭 봐야 한다고 했다. 레이디보이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신혼부부들이 보고 나면 싸운다는 그 공연.
개뿔. 이런 표지 사기가 다 있나 싶었다. 기대 안 하길 잘했다. 형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닌 것 같아. 걸그룹 노래에 율동은 너무했더라.
그래도 고생했으니, 공연 끝나고 이어진 포토타임에서 20달러씩 주며 사진도 찍어 줬다. 2달러면 된다고 했지만, 태국도 한국전쟁 참전국이니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으마. 가진 자의 여유!
그렇게 푸켓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귀국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벌써부터 다음 여행지를 고민했다. 다낭도 좋고, 하이난도 좋고, 앙헬레스도 좋다. 어디든 가자. 나도 가고, 직원들도 팍팍 보내 주고. 그렇게 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