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71)
271 구름과 비
6월 초의 저녁 날씨. 바람길을 잘 뚫어 놓은 혁신도시에서는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온도이다.
변압기혁신조합 회의와 뒤풀이까지 화려하게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산책처럼 편하게 느껴진다.
내 옆에 박준희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기 때문일까? 살짝 냉기가 어린 바람이 불어왔지만, 손잡고 걸어가니 몸 전체가 따뜻했다.
“정수 씨, 근데 우선배정 나중에 신청하겠다고 하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아요.”
누가 봐도 우리는 연인의 행색이지만, 늘 대화의 시작은 사업 얘기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인 한마디를 꺼내지 못하는 상황. 이제 좀 타개할 때가 된 듯하다. 그건 그거고.
“그건 무슨 의미예요?”
“우선배정을 나중에 신청해도 되는지 이번에 알긴 했지만, 미루지 말고 바로 받는 게 좋지 않았겠어요? 지금 전력용 변압기 하겠다고 준비하고 있잖아요? 그거 시작하면 매출 확 뛸 텐데…….”
양보 아닌 양보로 다른 업체들이 대한전력 입찰에서 11억 원 어치를 더 받게 됐는데도, 나와 우리 회사를 걱정해 준다. 경쟁사 사장이라는 인식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우선배정 신청을 미뤘다가 나중에 회사가 더 커져서 대한전력 입찰에 들어갈 수 없게 되면 그 많은 물량 날리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겠지.
“중소기업 인정기준 말하는 거죠? 저도 그거 때문에 좀 고민했는데, 전력용 변압기가 바로 성과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하려구요. 그리고 사업별로 분리돼 있어서 괜찮습니다.”
“그렇긴 한데, 혹시나 대한전력이 발주 줄여 버리면 손해잖아요. 우선배정 받을 수 있을 때 빨리 받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몇 푼에 연연하지 않는 것 아시잖아요? 우리 조합 회원사들 나주 내려오느라 투자 부담도 큰데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 줘야죠. 회원사들이 잘나가야 저도 재미 보는 구조잖아요.”
누나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저는 정수 씨가 경쟁사들한테 막 퍼 주고 그러는 줄만 알았어요. 근데 알고 보니까 몇 곱절로 뽑아내는 것 같아요. 하하하.”
“이런 게 상생 아니겠습니까? 자재 저렴하게 공급하니 좋고, 저는 돈 벌어서 좋고 말이죠.”
“진짜 프라임일렉트릭이 얼마나 더 성장할지 궁금할 지경이에요. 이제 전력용 변압기도 하니까 아주 질주하겠어요.”
“아휴, 질주는요. 그저 거북이처럼 기어갈 뿐입니다.”
“모를 일이죠. 또 대박 터져서 자산 5조, 10조 넘어가는 것 아니에요? 하하.”
공시대상기업집단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대기업이라고 부르는 그 집단. 자산은커녕 매출 1조도 안 되는 우리 회사가 꿈꿀 수준은 아니다. 그래도 생각만 해도 기분은 좋네.
“푸하하. 뭐예요? 생각만 해도 막 웃음이 나와요?”
“어처구니없는 상상이라도 진짜 그리될까 봐 겁나네요. 하하.”
“정수 씨는 대기업 총수가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쉼 없이 달려 보세요. 참! 전력용 변압기 생산 들어갈 때 얘기해 주세요. 우리 회사에 경험자들 꽤 있으니까 노하우 전수 좀 해 줄게요. 그게 조립이 아주 까다로워요.”
말만으로도 고마운데, 이 사람은 말로 그치지 않는다. 전력용 변압기 만들어 본 경험, 그거 비싼 노하우일 텐데 아무렇지 않게 전수해 주겠단다. 뭘 어떻게 혼내 줘야 하려나.
“하하. 고맙습니다. 저한테 너무 잘해 주는 거 아닙니까? 자꾸 이러면 헤어 나오기 힘든데…….”
“뭐래요. 맞다, 정수 씨. 근데 갑자기 푸켓 가자는 말은 왜 한 거예요?”
뜬금없이 해외여행이나 가자며 던진 말이 4시간 만에 되돌아왔다.
“일만 하느라 놀러도 제대로 못 가서요. 누나도 마찬가지잖아요? 대한전력 입찰 들어가기 전에 물 좋은 데 가서 힐링 좀 했으면 싶어서요.”
“정수 씨도 가만 보면 참 즉흥적이에요.”
즉흥적인 삶. 의도적이긴 했다. 어렵게 살았던 경험 탓인지, 인생을 너무 아끼며 살았다는 자각이 생겼다.
이제 고작 30대이면서 노후를 걱정하며 살고 있었다. 아빠처럼 나이 먹고도 고생하며 살지 않으려면 젊었을 때 빡세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믿기 힘든 경험으로 부를 거머쥐고 나니,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씩 달라졌다. 젊어 고생해서 행복을 적금해 봐야 다 늙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내가 3년 만에 소득세 최고 구간을 내는 부자가 됐듯이 사람 일 모르는 것이다.
사람 일은 모르지만,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면서 즉흥적으로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누가 그러더라. 마지막에 웃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 아니라, 자주 웃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라고.
“갑자기 그럴 때 있잖아요? 해외 나가고 싶다. 그러면 가는 거죠 뭐. 그래서 저랑 같이 가기 싫어요?”
“저도 좋다고 했어요. 좀 뜬금없어서 궁금하긴 했어요.”
잡은 손에 힘을 줬다.
“회사 생각 싹 내다버리고 가서 재미있게 놀고, 푸욱 쉬고 오자구요.”
누나도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정수 씨. 아까 사장님들한테 했던 말 듣고 기분이 어땠어요?”
습관적으로 무슨 말이냐고 되물어 볼 뻔했지만, 잘 참았다. 사귀고 있다는 누나의 외침.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을 묻고 있는 것이다.
“좋았고, 미안했어요. 왜 그리 뜸을 들였나 싶기도 하고, 누나도 애가 탔구나 싶기도 하고. 하하.”
“하하. 네, 맞아요. 애 아주 많이 탔어요. 처음에는 내가 연상이라서 그랬나 싶었어요.”
“네, 맞습니다. 아주 그랬습니다.”
말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지만, 매도 벌 수 있다. 옷이 얇다 보니 손바닥 스매싱이 꽤 아프다.
“농담이구요. 궤변 같지만 그런 건 있었어요. 내가 누나랑 이런 사이가 됐다는 것이 안 믿겨져서, 그 기분을 더 즐기고 싶었다고 할까? 이 연예인 같은 사람이 주는 신비감을 느끼고 싶다고 할까?”
“아휴, 연예인 얘기 좀 그만해요. 정수 씨 아니어도 많이 들으니까요.”
“얼레? 이 사람 좀 보소.”
서로 진솔함과 농담을 섞으며 얘기하다 보니 대한전력 본사 건물 뒤쪽의 공원이 나왔다. 이 공원만 지나면 각자의 집으로 가게 된다.
누나가 마주 잡은 손을 빼고는 내 앞에 섰다. 도발적인 눈빛. 자연히 발걸음이 멈췄다.
“정수 씨, 우리 오늘부터 1일로 할래요?”
즉흥적인 나나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누나나 별 차이가 없네. 내 대답은 정해져 있다.
“아니요.”
“응?”
예상했지만, 당혹스러워하는 누나의 표정을 직접 보니 웃음이 터질 뻔했다. 연상이라고 해서 귀엽지 않은 것은 아니군.
“왜요? 그렇게 대답하면 안 되는 겁니까?”
“아니, 하아. 아니에요. 제가 착각했나 봐요.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하는 사람을 더 이상 괴롭혀서는 안 될 것 같다. 일단 한 번 안아 주고.
“아, 왜 이래요. 우리 이러면 안 되지 않아요?”
단단히 삐쳤군. 3년 전 이 사람을 처음 봤을 때, 이런 모습을 감히 상상조차 못했다. 이런 사이가 될 것이라는 것은 꿈도 못 꿨으리라.
“누나. 그 말은 제가 하면 안 될까요? 대신 누나 대답은 예스뿐이에요.”
즉흥적으로 나온 시나리오였지만, 나 자신에게 대단히 놀랐다. 이런 오글거리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다니…… 옆에 덕준이가 있었다면 멍석을 말아 발길질을 아끼지 않았으리라.
“아휴, 못됐어!”
누나의 매서운 손맛이 이어졌다. ‘초록매실 네가 좋아, 깨물어 주고 싶어’에 버금가는 멘트를 날렸다면, 응당한 벌을 받는 것이 맞겠지.
“그래서 지금 대답하면 돼요?”
구타를 멈춘 누나 입에서 나온 말은 아주 급박했다. ‘언니가 좀 급해’ 이건가?
“급준희 씨. 왜 그리 급하십니까? 하하. 제가 그래서 푸켓 가자고 한 거 아닙니까? 우리 장미꽃 뿌려진 호텔에서 분위기 잡으면 안 될까요?”
“아휴, 진짜!”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를 봤다면 공포에 저린 손가락으로 112를 눌렀을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누나 손길이 왜 이리 매운지 원.
일방적인 폭행이 끝나고 나서 서로의 자기 고백 시간이 이어졌다.
“누나. 우리가 서로 좋은 감정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잖아요? 그게 아닌데 이렇게 손잡고 다니는 것은 말이 안 되죠. 맞죠? 제가 틀리게 얘기한 것 아니죠?”
맞잡은 누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알면서 뭘 확인하려 그래요. 저는 그랬어요. 자격지심 같은 거랄까요? 나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한편으로는 뭐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구요.”
나 역시 손에 힘을 줬다.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서로에 대한 감정과 믿음이 중요하죠.”
“그래서 감정은 있었는데, 믿음이 없었다는 뜻이에요? 난 정수 씨 믿었고! 이거 실망이네요.”
“하하하.”
누나 말도 어느 정도 맞다. 썸이 연애로 진전되고 나서도 좋은 감정이 지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남자건 여자건 연애가 시작되면 ‘내 것’이 됐다는 안도감으로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처음엔 안 그랬는데 변했어’와 ‘한두 번 얘기한 것도 아닌데 왜 못 고쳐’로 대표되는 균열. 난 그게 두려웠다.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춰야 한다는 강요. 아름다운 구속이라며 사람을 소유할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상대에게 그랬고, 상대도 그랬었다.
누나가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이 채워지고 진해질수록 두려움이 더 커졌다. 난 예전처럼 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지, 누나도 예전의 상대들처럼 변하지 않을지.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한없이 신중해졌다. 한편으로는 사람 가지고 노는 나쁜 짓은 다 하는구나 싶은 자책감이 들기도 했다. 남들이 결혼 적령기라도 얘기하는 30대의 연애가 이리 어렵다.
결국 두려움보다 누나에 대한 미안함이 이겼다. 두려움은 내가 극복할 일이다.
“우리 관계를 정립하는 이벤트 없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내 생각만 하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누나가 이렇게 급한지도 모르고…… 하하.”
“또 시작이다, 아주. 전 정수 씨 좋아요. 웃으며 농담처럼 얘기하는데 머뭇거림이 느껴졌다고 할까요? 내가 나이가 많아서 그런가, 아니면 무슨 아픔이 있어서 그런가. 온갖 생각을 다 하다가 그냥 기다려 보자 했죠.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았으니까요.”
여러 잡생각 끝에 나온 말이 실없는 농담이었는데, 그걸 받아 주며 이해해 준다. 이해와 배려의 아이콘답다. 이 사람이라면 내 스스로 두려움을 가질 이유가 없을 것이란 믿음이 생긴다.
“전 그래서 더 이상 머뭇거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누나가 그렇게 급하게 치고 들어올 줄은 몰랐어요. 하하.”
“푸하하. 제가 좀 마음이 급해졌어요. 여자들은 그럴 때 있어요. 민망하니까 깊이 알려고 하지 말고 그 정도로 넘어가요. 그리고! 제가 먼저 얘기 좀 하면 어때요!”
“그건 맞는 말이네요. 누가 먼저 해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구요.”
“다시 물어볼게요. 그래서 예스예요, 노예요. 누나니까 예의 바르게 대답하는 거예요, 알았어요?”
“하하. 어쩔 수 없이 예스네요. 역시 나이가 깡패예요.”
땅거미가 내려앉은 인적 드문 공원에서 또다시 구타가 이뤄졌다. 분위기 있고 멋있게 이뤄졌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우리는 웃고 즐기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것이 우리만의 방식이랄까?
“말 잘 들으니까 참 이쁘네. 일루 와요. 안아 줄게요.”
내가 안았지만, 안긴 것 같은 모양새를 취했다. 서로의 심장 뛰는 소리가 요란했다. 둘 사이에 놓인 낮은 둑이 무너졌을 때의 감정을 심장이 나대며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 마음껏 나대라.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나서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 이미 흘렀다. 둑이 무너졌으니 이제 서로 조심할 것도 없었다. 쌓여 있던 호기심과 욕망이 한순간에 분출할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구름과 비의 즐거움을 이끌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