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37)
037 따뜻한 겨울
공장 준공이 두 달 앞으로 다가왔다.
벚꽃 피는 4월부터는 직원 채용과 함께 바로 교육에 들어갈 생각이다. 열흘 정도 교육하면 준공과 함께 바로 실전에 투입될 것이다.
직원 채용을 위해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나주 백지원. 나주에서 제일 크다는 보육시설을 찾아갔다. 전화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자니 사기꾼 취급 받을 것 같아서, 나주 내려온 김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계십니까?”
“어디서 오셨어요?”
피노키오 만든 할아버지같이 약간 꼬질꼬질한 사람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네, 저는 4월부터 나주에서 회사를 운영할 사람입니다. 지금은 인천에서 사업체 이끌고 있구요. 지정수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이민호입니다. 여기 사무국장 맡고 있습니다. 봉사나 후원 때문에 오셨나요?”
“일단 차에 애들 먹을 것 조금 사 왔는데요. 상무님, 좀 부탁합니다.”
상무란 소리에 사무국장도 자세를 고쳐 잡았다. 중소기업이 직책 인플레가 심하다고 한들, 아무나 상무가 되는 것은 아니지. 사장이란 사람이 상무까지 대동하고 왔다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도리지.
“저희는 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요즘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후원도 예전 같지 않고 늘 힘들죠. 사장님께서 많이 후원해 주시면 우리 아이들이 더욱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겠는데요?”
“후원이라기보다 부탁을 좀 드리려고 왔습니다.”
“부탁요?”
사무국장이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고는 의심쩍은 눈초리를 보낸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곧 나주에 공장을 세우는데요, 저기 혁신산단에 말이죠. 아이들이 성년이 되면 보육원에서 나가야 한다고 해서, 저희가 아이들을 고용하면 어떨까 해서 말이죠.”
“아, 그렇습니까? 우리 애들이 성년이 되면 여기 머물 수가 없어서, 저희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착 자금 400만 원으로 어디서 뭘 하겠습니까? 고아라고 하면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아직도 많잖아요? 취업도 잘 안 됩니다. 편견이라는 것이 그리 무서워요.”
“아! 노파심에 말씀드리면, 제가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돈 조금 주고 일 시키겠다, 이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사회 초년생이라도 충분히 먹고살 만큼 급여 지급할 생각입니다.”
* * *
여기 오기 전 회의에서 신입 연봉을 가지고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연봉은 월 250만 원씩으로 잡아서 3천만 원을 주려고 했는데, 다들 결사코 반대를 외쳐 댔다.
업계 급여 수준에 빠삭한 상무가 포문을 열었다.
“사장님, 직원들 많이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천천히 단계를 밟아 가야지.”
“그래. 김 상무 말이 맞네. 당장 매출도 많지 않고, 또 들어올 돈보다 나갈 돈이 엄청 많은 상황 아닌가! 그렇게 퍼 주다간 회사 망해. 회사 망하면 월급 많이 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나? 일단 처음이니까 좀 박하다 싶을 정도로 주고, 자네 말대로 내년에 회사 확 커지면 그때부터 챙겨 줘도 충분하네.”
공장장도 참전했다. 아직 은행 대출이 실행되지 않은 상황을 이래저래 걱정해 왔었기에 참전은 매서웠다.
나도 반격에 나섰다.
“중소기업 문제가 젊은 사람 데려와도 몇 달 못 버티고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가 급여입니다. 급여가 박하면 누가 헌신적으로 일하겠습니까? 기껏 가르쳐 놨는데 한두 달 하다가 그만둬 버리면 뽑으나 마나잖아요.”
“지 사장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 어차피 도망갈 애들은 월급 많이 줘도 도망가게 돼 있어. 그 많은 사람들 다 품고 가겠다 생각하면 사업 못해. 냉정할 땐 냉정해야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법이야.”
그 말도 맞다. 도망갈 애들은 어차피 도망가게 마련이지. 그래도 회사가 직원들 넉넉하게 챙겨 준다는 인상을 주고 싶은데…… 공장장이 말을 멈추지 않는다. 이거 강공이군.
“처음에야 다들 열심히 하겠다고 으쌰으쌰하겠지만, 한두 달 지나면 버틸 놈 나갈 놈 딱 보여. 그러니까 일단 지켜보자고. 처음 두 달 정도는 수습 기간도 둬야 할 걸세. 야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우리 사정 봐 가면서 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 사장님. 나도 그렇고 공장장님이나 다 같이 신입 들어오면 냉정하게 평가하고 잘 관리할 테니까 처음부터 너무 무리하지 말자고.”
충분한 여력이 되는데, 중역들이 반대하는 통에 결국 신입 연봉은 2,500만 원으로 책정했다.
더 주고 싶은 사장과 그걸 말리는 임원. 뭔가 바뀐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다들 하나같이 회사 걱정해 준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이 또 있겠나.
* * *
백지원 사무국장에게 그렇게 결정된 급여 조건과 회사 이모저모에 대해 굳이 더하지도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얘기했다. 일이 힘들 수도 있지만, 즐거운 분위기일 것이며 힘든 만큼 확실하게 보상할 것이란 포부도 있는 그대로 전했다. 젊은 직원들을 위한 특별한 복지 제도까지!
“젊은 사장님께서 참 대단하십니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희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미리 연락을 좀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지금 원장님이 안 계셔서…….”
“오늘은 그저 인사차 온 것입니다. 4월 중순부터 공장을 가동하는데, 그 전에 성년이 되는 아이들 의사를 좀 알아봐 주십사 합니다. 혹시 다른 보육원에도 저희 뜻을 대신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이 지역을 잘 모르는 데다, 일일이 찾아가기도 벅차고 말입니다.”
“잘 오셨네요. 저희 원장님이 전라남도에서 보육원 모임 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아 참…… 원장님은 왜 이럴 때 자리를 비우셨을까. 잠시만요, 전화 좀 해 볼게요.”
“아닙니다. 저희도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늘은 이만 가고, 조만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그때는 미리 연락드리고 올게요.”
“네, 감사합니다.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그나저나 아이고 뭘 이렇게 많이 사 오셨습니까?”
“뭘 사야 할지 몰라서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았습니다. 맞다. 여기 온 김에 후원 서류 하나 쓰죠.”
“아이들 생각하시는 품이 참 넓으십니다. 세상 사람이 다 사장님만 같아도 아이들이 더없이 행복할 텐데 말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후원이라는 것을 해 봤다. 워낙 없이 살았기에 후원 같은 것은 나와 관련 없는 일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 팔자가 이리 바뀌다니.
나주백지원 후원서 빈칸에 글자를 채워 넣는데, 오르가즘이랄까? 짜릿한 뭔가가 느껴졌다. 일종의 과시일 것이다. ‘나 이런 사람이야,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쓰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정신승리? 뭐가 됐건 기분이 좋았다.
“사장님. 되게 기분이 좋은 것 같네.”
“좋은 일 했는데 기분이 당연히 좋아야지 않겠습니까?”
“다들 좋은 일 하겠다고 맘은 먹지만, 막상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지 않잖아. 내가 우리 사장 오래 본 것은 아니지만,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 딸내미가 10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우리 사장이랑 선이라도 보라고 했을 텐데 말이야.”
“저 32살밖에 안 먹었는데, 나이가 너무 많습니까?”
“아직 고등학교도 안 들어갔거든?”
“하하.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라고 해 주세요. 당분간은 어렵겠지만, 내후년 정도면 직원 자녀들 학자금도 줄 생각이니까요.”
주요 거래처 돌며 전국 일주 하고 나니 3박 4일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짠돌이 최철민 사장 빼고는 다 밥을 사주더라. 멀리서 와서 명절 잘 보내라고 상품권도 주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냐? 하여간 짠돌이.
마지막 날 나주 백지원을 다시 들렀다.
부산에서 마지막 거래처를 들르고 경부고속도로 타고 올라가려는데 백지원 사무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얘기가 꽤 진척이 됐으니 한번 들러 달라는 간청이었다. 뜸들일 것도 없다. 바로 남해고속도로를 탔다.
나주백지원에 도착하니 우리 온다고 나름 신경 쓴 모양이 역력했다. 물청소도 한 모양인지 건물 입구까지 물 뿌린 흔적도 남아 있었다. 대접 받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싶다.
“사장님! 어서 오세요.”
이마가 훤한 사무국장이 반가움 가득한 표정으로 맞이했다. 처음에는 머리 좀 까진 꼬질꼬질한 동네 아저씨 같더니만 차려입으니 제법 회사 생활 한 중역스러움이 물씬 풍긴다. 역시 옷이 날개야.
“원장님, 인사하시죠. 저번에 말씀드린 프라임일렉트릭 지정수 사장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지정수입니다.”
“반갑습니다. 백지원 원장 최봉숙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원장 이름을 듣자마자 괜히 움찔했다. 이름 가지고 그러면 안 되지만, 봉숙은 참기 어렵잖아? 이게 다 장미여인숙 때문이야. 그러게 왜 데낄라 시켜 묵고 집에 드갈라 하냐고!
봉숙 원장은 이름만큼 푸근하고 좋은 향기를 뿜어냈다. 보육원을 운영한다는 것이 신념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사장님께서 저희 아이들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참 감동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같은 이유로 여러 회사가 찾아오기도 하지만, 깊게 고민해서 오신 분은 사장님이 처음입니다. 사장님이라면 내 새끼들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를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생각대로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기억해 주세요. 진심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회사가 별로일 수 있습니다. 밤낮으로 고민하며 회사를 끌어가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진심이 느껴지길 바라겠습니다. 원장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세요.”
말하고도 왠지 자전차 타면서 술 한잔 마신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지?
“저희야 양팔 벌려 환영이지요. 그래서 말인데요.”
사람들은 왜 자꾸 뜸을 들이며 말을 하는지 원. 가끔씩 가슴이 철렁철렁할 때가 있단 말입니다!
“네, 말씀하시죠.”
“사장님 오신다고 해서 저희가 그냥 인사만 하기 뭐해서 조금 준비를 했는데요. 괜찮으실는지…….”
원장실 벽에 ‘내일을 위한 희망-취약 계층 인재 채용 협약식’이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적극 알려야 하는 일이니 간소하게나마 사진이나 찍자고 한다.
나야 땡큐지. 하기 싫다고 해도 내가 나서서 사진 찍어야 한다고 고집부려야 할 판에 먼저 나서서 준비까지 해 놓으니 얼마나 좋나!
“자, 찍겠습니다. 원장님 긴장 좀 푸시구요. 사무국장님 초상났어요? 좀 웃으세요.”
“하하하. 호호호.”
“찰칵. 또 찍습니다. 하나둘 셋!”
봉숙 원장은 백지원에서 퇴소 예정인 청년 4명과 퇴소하고 딱히 일을 못 구해 알바를 전전하는 3명이 지원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다른 보육원에도 연락을 돌리고 있으니 원하는 만큼 충분한 이들을 채용할 수 있을 것이란다.
두 가지 큰 걱정. 사람과 돈 중에서 사람 문제가 해결됐다!
“다음 달이죠? 3월 말에 면접을 보고, 4월부터 근무에 들어갑니다. 모집 인원은 최종 확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만…….”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일회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 계속 이어 갈 것인데, 저희가 도울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와 드려야지요.”
“공장 준공이 4월 중순이라 신입 사원 교육할 장소가 마땅치 않습니다. 혹시 장소 제공이 가능할는지요.”
“난 또 뭐라고. 내 새끼들 교육시키는데 그것 하나 못해 드리겠습니까?”
감사한 일들투성이다. 태양전기 다닐 때 세상이 어두워 보이고, 사람들이 다 미워 보인 적이 있었다. 어찌나 시달렸던지 정신병이 걸릴 지경이더라. 그런데 회사 밖으로 나오니 좋은 이들이 이리도 많다.
나주 백지원을 끝으로 전국 일주 순회공연을 마무리했다. 돈을 신 나게 썼다.
직원들한테도 명절 잘 보내라고 보너스 50만 원씩 돌렸다. 회사 형편을 뻔히 아는 직원들이니 화들짝 놀라며 아주 감지덕지이다. 이 맛에 사장 하는 것이로구나!
그렇게 추운 겨울이 가고 꽃피는 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