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9)
009 맨땅에 헤딩
“일어나 미친놈아!”
“…….”
“일어나라고! 돈 쓰러 가야지!”
“…….”
어제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술판에 노래방까지. 덕준이 맘껏 날뛰도록 내버려 뒀다. 사람이 금수만도 못할 수 있다는 얘기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래, 너라도 즐거웠으면 됐지.
“아, 죽겠네. 어제 너무 질렀더니 목이 다 아프다야.”
“알았으니까 빨리 씻어. 계약하러 가자.”
“놀 때는 정말 좋단 말이야. 이제 나이도 있고 매번 놀 수는 없겠지? 슬프다 슬퍼. 정수야. 나 너네 회사에서 진짜 존나게 열심히 일할 테니까 월급만 많이 주라. 돈 실컷 벌어서 신 나게 놀고 싶다.”
걱정 마라. 아직 벌이가 한 푼도 없지만, 신 나게 벌어서 신 나게 쓰게 해 줄 테니까.
“알았으니까 얼렁 씻어. 무슨 입 냄새가 이러냐. 아 진짜 개새끼. 음식물 쓰레기통이냐.”
내가 너 입 냄새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고! 아무리 꽐라가 됐더라도 양치는 하고 자야지. 그래, 그래도 즐거웠으면 됐지.
“우선 은행에 가자. 돈부터 마련해야지.”
“인터넷 뱅킹 안 하냐? 쩐주한테 분양 계좌로 넘겨 달라고 하면 되잖아?”
“아 쫌. 일단 가야 해.”
“하, 진짜 수상한 새끼네.”
그래. 수상한 놈이 맞다. 그래도 더 많은 돈을 뜯기지 않으려면 이 거짓말을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한다. 여차저차 회사만 세우면 거짓말 안 해도 되겠지?
은행이 늘 그렇듯 KGB은행도 바글바글하다. 진상이 하나 걸렸는지 대기 번호가 넘어갈 생각을 안 한다. 은행 일 한번 보려면 하루 날아갈 것은 각오해야 한다. 아오. 내가 안 기다리는 은행 하나 만들고 만다 진짜.
“27번 고객님.”
30분 넘게 기다려서야 내 차례가 왔다. 이 정도 기다렸다가 창구로 가면 점잖은 신사도 진상으로 돌변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면 인마, 그때는 진상이 되는 거야!
“무슨 업무 보시겠습니까?”
“가입한 상품 몇 개가 있는데 해지하려고요.”
“해지 말씀이세요? 신분증 부탁드립니다.”
“여기요.”
“어머 고객님. 고객님은 VIP라 VIP 창구로 가시면 되는데요. 왜 계속 기다리셨어요?”
하아. 뚜껑이 열린다. 얘기를 해 줘야 알지! 아오.
“뭐……. 그냥.”
아침부터 기운 빠지더니 은행 와서 탈진할 지경이다.
결국 온갖 번거로운 과정을 다 거쳐 상품으로 묶어 둔 20억 원 중에서 15억 원을 꺼냈다. 그리고 입출금 통장에 있던 돈을 추가해 총 20억 원을 새 통장에 밀어 넣었다.
20억 원. 이것이 내 종잣돈이다! 나름 뿌듯함을 느끼느라 창구에서 좀 뭉그적거렸다. 내 다음 순번 대기자는 분명 진상이 됐을 것이다.
로또 당첨금에서 20억을 써야 하지만, 그래도 우수리 떼고 8억 3,000만 원이 남는다. 이것만으로도 입이 쩍 벌어질 정도여야 하는데, 왠지 아쉽다. 핸드폰을 바꾸고 잠적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려다가 이내 멈췄다. 솔직히 문자‘님’, 무섭다.
“와! 진짜 대단하다. 뭐 하는 데 1시간이나 걸려!”
“덕준아, 여까지 내려온 김에 끝장을 보고 가자. 법인 설립까지 싹 끝내자. 어때?”
“며칠을 더 있자는 거야? 남자랑 둘이서 모텔 가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긴 하는 것이냐?”
“모텔이 어때서 그래? 뭐 호텔이라도 묵고 싶어?”
“사업한다는 놈이 투자 개념을 모르냐. 투자야 투자. 네가 쓴 것보다 몇 배를 뽑아 가는 것이 투자라고. 내가 투자당해 주겠다는데 고마운 줄 모르고.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만.”
“주둥이 안 아프냐? 일단 혁신산단 사무실 가서 그 과장부터 만나자.”
* * *
덕준이 표현으로 키가 좀 작긴 해도 이쁘장한 직원과 또 눈이 마주쳤다. 어제 봤다고 미소도 지어 보인다. 이놈들이 나를 해할 사람이 아니라는 안심이 생길 때 나오는 미소 말이다.
“아이고, 지 사장님 오셨습니까? 여기 앉으세요. 저기 유 대리?”
어제는 종이컵에 믹스커피 대충 저어 내오더니, 오늘은 비타300 한 병씩 꺼내 온다. 자고로 장사꾼은 돈 냄새를 잘 맡아야 성공하는 법이다. 내가 보아하니 이 과장은 후각이 좋은 것이 대성할 인물이다.
“사장님, 다음 주에나 오신다더니요.”
“어차피 할 거니까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바로 분양 신청을 하시려고요?”
“네. 반나절 걸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온 김에 일 다 봐야죠.”
내가 첫 계약자가 돼 주겠다고! 머리에 그림이 그려진다. 으리으리한 공장. 공장으로 물건 싣고 갈 트럭이 줄을 잇는다. 매일 주문이 몰려와 야근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돈 버는 재미에 빠진 직원들이 신 나 한다. 연말에는 보너스 팍팍!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일단 저희 사장님하고 인사를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장님요? 공무원 아니세요?”
“혁신산단을 민관 합동으로 하는 것이라 시행사를 주식회사로 만들었지요. 회사 이름은 주식회사 나주혁신산단인데, 그냥 혁신산단이라고 합니다. 지원센터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그럼 사장님하고 진행해야 할 절차가 있습니까?”
“그건 아니고요. 사장님께서 처음으로 투자 의사를 밝히셨으니까 뭔가 기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실무적인 것은 제가 처리합니다.”
혁신산업단지라고 멋진 이름을 붙였지만, 아무도 산단 분양을 받지 않는다. 대한전력이 밀어준다고 하는데도 꿈쩍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처음 계약 기업이 됐다. 여기가 그 정도로 안 좋은 곳인가? 내가 봤을 때는 꿀이 철철 넘치는 곳인데 말이다. 사업가의 냉철한 판단이 회사의 명운을 가른다. 이리 꿀이 나오는 곳에 내가 제일 먼저 깃발을 꽂았다는 것은 행운이다.
“어서 오세요. 나주혁신산단 대표이사 최대근입니다.”
이름처럼 묵직할 것 같은 사장이 명함을 건넨다.
“창업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명함이 안 나왔네요. 지정수입니다. 옆에 이 사람은 한덕준 과장입니다.”
난데없이 과장을 단 덕준이가 ‘크음’거린다. 과장이 맘에 안 든다 이거지?
“안녕하세요. 한덕준입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이고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지요. 여기 앉으세요. 어떻게 차는 뭘로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좀 전에 마셔서 괜찮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이 과장? 주전부리라도 준비해 줘. 사장님께서 산단에 투자하신다고 하던데요. 잘하셨습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 되실 것입니다.”
탁월한 선택일 것이다. 문자가 하라는 대로 로또 샀더니 1등을 두 번이나 맞혀 버렸다. 문자가 사표 내고 창업하라고 해서 그렇게 준비했다. 또 나주에 20억 투자하라고 하니 역시나 그대로 했다.
워낙 시크하게 단문만 보내지만, 좋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꼭두각시가 아니고, 볍씨 뿌려 수확하고 도정해서 밥 지어 먹여 주기까지 하면 재미없지. 나도 내 길을 가야지. 문자님 고맙긴 하지만, 내 사업이다. 내 힘으로 중소기업을 넘어 중견, 대기업까지 갈 것이다.
“그래서 투자 규모는 얼마 정도를 생각하십니까?”
“네, 3천 평 정도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초기 투자로 60억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3필지에 공장 세우려면 그 정도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요.”
“청년 창업가께서 포부가 담대하십니다. 저희가 절차상 입주자격 심사를 거쳐야 하니까 여기서 간단하게 서류 몇 가지만 작성해 주시고, 아니다. 일단 어디 좋은 데 가서 식사하면서 얘기 나누시죠. 아직 식사 안 하셨죠? 나주 오셨으니까 곰탕 한 그릇씩 하셔야죠?”
좋은 데란 소리에 덕준이 움찔한다. 이놈아 식당 가는 거야!
“네. 그러시죠. 그런데 제가 아직 법인을 안 세웠는데, 문제 되는 것이 있을까요?”
“창업하시는데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업 계획서 양식대로 써 주시면 문제 될 것 없습니다. 자본금을 확인할 수 있는 통장 사본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 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다 해결해 드립니다. 경영하시는 분들의 제일 큰 애로 사항이 바로 관공서 상대하는 일이지요. 내라고 하는 서류는 뭐가 그리 많은지, 서류를 내면 또 어떻습니까? 오타 났다고 다시 써 오라고 하고, 아주 진절머리가 나죠.”
박찬호가 LA다저스에 입단해 역경과 고난을 이겨 낸 스토리를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 끝이 없다. 문득 말 많은 공장장이 생각났다. 자강두천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나저나 나주에서 일하겠다고 할까? 나주에 공장 세우겠다고 하면 순순히 따라 줄지 걱정이다.
현지인이 데리고 간 맛집은 역시 차원이 다르다. 어제 간 곰탕집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맛이었다. 곰탕에 프림이라도 탔나?
맛은 훌륭했는데, 100점은 못 주겠다. 최대근 사장의 네버엔딩스토리 때문이다. 아휴 귀 아퍼.
훌륭한 곰탕집을 나와 다시 혁신산단 사무실로 들어갔다. 정성 들여 궁서체로 서류 작성을 끝냈다.
“서류 작성은 다 하셨고, 자격 심사가 끝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빠르면 내일 정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연락 부탁드립니다.”
지원센터를 나오자마자 바로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15억 원짜리 점심을 먹은 탓에 담배가 급 당겼기 때문이다.
“오호 지 사장님. 15억을 한 큐에 태우네. 나는 고작 과장이라 도저히 못할 것 같은데…….”
“잘되겠지? 알고 보니까 분양 사기 이런 건 아닐 거야. 그치?”
“아이고 사장님. 과장인 제가 뭘 알겠습니까? 고작 과장인데 말입니다.”
혁신산단 사무실에서 과장이라고 소개한 것을 두고 저리 뒤끝을 부리네. 백수한테 과장 달아 주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모르고 말이야.
“이 새끼 타이틀에 드럽게 목숨 거네. 직급이 중요하냐? 연봉 3천짜리 부장 할래, 연봉 4천짜리 과장할래?”
“네 사장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중소기업은 사실 직급이 아무 의미가 없다. 들어가자마자 과장부터 다는 경우도 허다하고, 임원이라고 해도 일반 직원이랑 별반 차이가 없다.
연봉이 중요하지. 아직 돈 한 푼 안 벌었지만, 내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최소한 돈 걱정하는 일 없이 일에 매진하게 하고 싶다.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은 돈에서 시작한다. 그 근심과 걱정을 줄여 주면 생산성이 높아진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일단 법무사 사무실 가자. 법인 세워야지.”
“우리 사장님께서 눈깔이 삐었구만. 존나 인재인 내가 있는데 무슨 문제야. 내가 이래 봬도 사법고시 2년 공부한 사람이야.”
“아니 그냥 돈 주고 맡길래. 나도 나름 알아봤는데, 맡기는 게 제일 나아.”
“사람 말을 못 믿네. 내가 서류까지 말끔하게 싹 처리해 줄게. 오케이? 아! 맞다. 일단 은행부터 가야 해.”
“은행은 왜?”
확실히 나는 아직 아는 것이 많이 없다. 월급쟁이 생활하면서 회사 욕하기만 바빴지, 내가 직접 회사를 이끌어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부족함이 많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부족함이 많다는 것은 앞으로 채울 일도 많다는 것 아니겠나! 밤을 새워서라도 배우고 익히자.
“자본금에 때려 박을 돈 있는지 잔고 증명서 받아 와야 해. 그리고 감사도 하나 있어야 하는데.”
“감사? 그렇지, 법인 대표 말고 등기 이사나 감사 한 명 있어야 하지. 그건 우리 한 과장님께서 해. 감사도 월급 줘야 하지? 내가 친구한테 베푸는 은혜라고 생각해.”
기뻐할 줄 알았던 덕준이가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감사로 월급 또 준다는데도 저러네.
“그런데 젤로 중요한 걸 안 하고 있는 것 알고 있냐?”
“뭐?”
“회사 이름 말이여. 이름! 상호는 지어 놨냐?”
회사 이름조차 생각하지 못한 나나 그걸 이제야 물어보는 덕준이나 한심하기 그지없다. 역시 우린 친구야! 이젠 로또 맞았다고 정신줄 놓고 다닐 때가 아니다. 정신 바짝 차리자.
“맞네. 이름! 생각지도 못했네.”
“와! 이 사장님 좀 보소. 존나 참신하시네요. 쩐주가 돈 준다니까 이름도 안 짓고 덜껑 땅부터 살라고 하네.”
“그러게. 하하하. 정신머리 바짝 차리고 살기가 이리 어렵네. 뭘로 지어야 하나. 뭐 그럴싸한 이름 없냐?”
“전기 쪽이니까 제네럴 일렉트릭? 아니면 변압기니까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 맘에 안 들어? 그럼 기계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뜻에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줄여서 RATM. 오호, 이거 괜찮은데?”
“1절만 하자? 난 제네시스 전기 생각했었는데. 제네시스 어떠냐?”
“제네시스? 창세기? 그건 차 이름 아니냐?”
“차 말고 내가 좋아하는 밴드 중에 하나인데, 좀 그럴싸하지 않냐? 너 피터 가브리엘 모르냐? 존나 유명한 아티스튼데.”
“푸하하하. 제네시스고 멤버 이름이 가브리엘이야? 존나 홀리하다. 할렐루야.”
“제네시스 일렉트릭. 줄여서 GE. 이건 좀 에러인가? 그냥 제네시스라고 해도 좋고.”
“뭐 나쁘지 않네. 근데 미래차에서 가만있겠어? 말하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을 하고 말하라고. 아! 맞다! 소프트 온 디멘드나 무디즈는 어때? 뭔가 변압기 공장의 남성스러움이 물씬 품기지 않아? 이름만 들어도 막 불끈거릴 것 같은데.”
“개, 새, 끼, 야.”
“아니 사장님. 왜 직원한테 욕을 하십니까?”
이러다 에스원, 프레스티지, 온갖 이름이 다 나오게 생겼네. 그냥 쉽게 가자.
“어차피 기업들 상대로 장사하는 것이니까 쉽게 쉽게. 프라임일렉트릭 어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상호가 결정됐다. 솔직히 소프트 온 디멘드가 맘에 들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