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become my concept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397
397화 한 사람이 (3)
“항상 궁금했던 건데, 계약서에 적힌 이름은 못 쓰는 건가요?”
나는 계약서를 갈무리하는 어릿광대를 보며 물었다. 계약을 체결한 후에는 이름을 알아도 뺏을 수 없는지, 광대는 이름이 적힌 계약서를 보면서도 어떠한 반응이 없다.
지금이야 기억에서 잊혀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지만, 당시의 그에겐 이름이 보였을 텐데도 그랬다.
[그대는 계약에 대해 잘 모르는가 보구려.]“이론 없이 실전으로만 배웠던지라.”
내 발언에 광대가 깔깔 웃었다. 내 자조 어린 말이 그의 유머 감각엔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뭐, 계약서에 이름이 적히는 순간, 그것은 서약에 의해 보호받으니 말이오. 그 전에 알고 있었다면 모를까, 적힌 이후에 빼앗는 건 불가능하오.]“그렇군요…….”
역시 그런가. 하긴, 계약서에 적혀 있는 걸 보고 추가로 수작을 부리는 건 좀 너무하긴 해.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의미 없는 맞장구를 보였다.
“하면 당신에게 손해뿐인 내기를 한 이유는 뭔가요?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런 내기를 해서 당신이 얻을 건 없어 보이는데.”
[내기의 본질이 유희임을 고려하면 꼭 손익이 맞을 필욘 없는 법이요… 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정답은 나도 모르오.]“……?”
그것도… 그렇네.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광대다 보니 쉽게 깜빡하는 사항이지만… 이건 그의 기억이 아니다. 아마도 나와 심상 동거 하는 그 개자식의 기억이지.
[아무튼… 나는 가 봐야 할 것 같소.]“네?”
[다시 말하지만, 기억의 주체는 내가 아니오. 자연히 그대가 따라가야 할 존재도 내가 아니지.]그래도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나는 광대의 손짓을 따라 중앙의 인간을 돌아보았다. 방 중심에 우두커니 서 있는 여인은 여즉 광대를 노려만 보고 있다.
기억의 주체이면서,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다.
[또 만나길 바라오.]“…네. 나중에 뵙죠.”
그래서, 결국 그놈의 틈새란 건 언제 나타나는 거야.
나는 광대가 나갈 때까지 독기 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는 여인을 물끄러미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서 있는 자세에서 미동이 한 점 없고,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 점에서 악에 받친 심정은 잘 느껴졌다.
달칵.
그리고 광대가 방의 문을 닫고 나간 순간, 그녀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툭 하고 주저앉았다. 콜록, 콜록! 다급히 입을 막은 손에선 피 섞인 침이 언뜻언뜻 비치고 있다.
“빌#@$@.”
악마 앞에서 겁먹지 않고 당당히 계약을 잇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아니면 타인이 없는 곳에서야 간신히 약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뿐인지.
나는 턱을 괸 채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사람의 심정으로 그 인간을 관찰했다. 객관적으로는 퍽 불쌍한 모습이었으나, 생각보다 마음이 쓰이진 않았다. 저 결과물이 메피스토펠레스임을 확신하고 있기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과거가 아무리 불쌍해도, 품성 자체가 글러 먹은 사람은 측은해할 이유가 없다.
“콜록.”
나는 그렇게 스스로의 연약함을 숨기고자 바르작거리는 이를 한참 지켜보았다. 기억의 교차로니, 틈새니 그런 건 나타날 기미조차 없고, 보이는 광경이라곤 따분하기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 계속 흘렀다.
* * *
“나리, 밥 드셔요.”
주작을 타고 갈 때 가장 좋은 것은 주작의 불로 무언갈 구울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어찌 보면 주작에겐 실례인 발언이나 편하다는 사실은 숨길 도리가 없다.
“나리?”
각설하고, 주작의 불로 구운─정화의 불로 구웠지만 다행히 정화의 힘은 담기지 않았다─연어 샌드위치를 들고 그는 무릎걸음을 했다. 평상시엔 부름만으로 깨던 이가, 오늘따라 반응이 없는 까닭이었다.
“나리이.”
하나 그를 부르며 다가가도, 바구니에 인접해도 모험가는 반응이 없었다. 30cm 이내로 접근하거나 그에게로 손을 뻗기만 하면 눈을 번쩍 뜨던 사람이 모험가건만, 참 드문 일이었다.
“…나리?”
사이가 누그러진 지금도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면 대부분 깨던데, 오늘은 또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리 오래 주무신담.
데스브링거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모험가의 앞 공간에 대고 손을 휘휘 저어 보았다. 여전히 모험가의 눈꺼풀은 올라갈 기미가 없었다.
“뭐 하냐, 너?”
“아니, 나리가 좀 깊게 잠드신 것 같아서요.”
“그래? 별일이네.”
“자도록 내버려 두게. 그간 일이 많지 않았는가.”
“넵.”
하지만 단순히 오래 잔다고 뭐라 하기엔, 지금껏 그가 겪은 일이 너무 많으니. 그들은 악마기사의 낮잠을 드문 일로만 치부하고 넘겼다.
사제 두 명과 주작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도 그들의 시큰둥한 반응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주가 모험가에게 닿은 것이라면 저 셋이 저리 태연할 리 없다.
“그럼 샌드위치는…….”
“언제 깰지 모르니 남겨 두세.”
“옙.”
어차피 주작의 따끈한 열기 덕에 식을 일도 없다. 데스브링거는 조그만 바구니에 샌드위치를 집어넣었다.
“그렇지, 아침에 나리랑 무슨 얘길 하셨던 겁니까요?”
그는 겸사겸사 궁금했던 것도 물었다. 질문을 받은 아크메이지가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건…….”
다만 그녀는 난처함의 끝에서 무언가 각오한 사람처럼 결연한 표정이 되었다. 사방으로 퍼지되 붕 뜨지 않고 곱게 흐드러진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두어 번 흔들렸다.
“차라리 자네들에게 먼저 말해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법사 나리?”
“이건 어리석기 짝이 없고, 또 오만했으며… 이기적인 죄인의 이야기라네. 비록 정돈이라곤 되어 있지 않겠지만… 어쩌면 자네들조차 나를 용서할 수 없게 될 수도 있겠지만. 어찌, 들어 주겠나?”
동시에 그녀가 마주한 이들의 머리카락 역시 하늘하늘 나부꼈다. 흘러가는 구름이 그들의 뺨을 가볍게 훑고 지나갔다.
* * *
[나#@ 아스모데우스@$^#.]기억이 진행되자, 군단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정중하다고 해야 할지…….”
형상만은 제법 분명한 주제에 말하는 대부분의 것이 기억에 새겨지지 못한 자. 군단장 아스모데우스.
그는 의외로 제법 정중하고 예의 바른 악마였다. 그의 수하, 어릿광대가 그러했듯 최소한 말투와 행동거지만은 존중과 격식을 갖춘 것이다.
[치@#%#@@$#$.]그는 예절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눈대중으로 치료된 상처와 질병을 확인했다. 여인을 치료했던 의사가 바로 옆에 있었기에 그에게 보고받기도 했다.
이 자식은 제대로 기억하는 게 뭐야. 나는 뭉개진 음성을 두고 시큰둥하게 무언가의 사건을 기다리듯 기다리지 않았다.
전자의 이유는 틈새가 나타난다면 가장 격렬한 순간에 나타나지 않을까. 뭐 그런 판단이었고, 후자는… 혹시라도 일어나선 안 될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어서였다.
[난$@( 진정% 랑@ 바라는 #$ 괴롭@#%@#.]하나 참으로 다행이게도 내가 걱정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잘 들리지 않는 대화 몇 조각을 끝으로 군단장이 떠나가 준 덕이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끔씩 찾아와 대화만 나눌 뿐, 접촉은 일절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인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출입조차 마음대로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그 정도로 인간을 대우하고 존중했다. 그래 봤자 족쇄는 풀어 주지 않았지만.
[@@#$%#@#가는 @#떻겠#니까?]그리고 어느 날. 언제나처럼 환심을 사기 위해 갖은 패물과 만찬을 가져온 이가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뭉개지지 않은 단어를 들은 기분이었다.
[나는 @#!$ 데려온 것# %@ 가둔 게 아니$@#$.]확실히, 오갈 수 없게 단단히 가둬 둔 건 아니긴 하지.
족쇄가 있긴 하지만 사슬이 달려 있지 않아서 원하기만 한다면 마음대로 밖을 오갈 수 있는 상태니까. 창문은 잠겨 있지만, 방문의 빗장은 단 한 번도 걸려 있던 적이 없었고.
[산책@#%!@#?]함에도 그녀가 외출하지 않은 건, 아마 밖이 무서워서일 것이다. 어디 악마의 성이 아니랄까 봐 심심찮게 짐승의 우짖음 소리가 들려오고 지진이라도 난 듯 성 자체가 흔들린 적도 많은 탓이다.
물론 내가 아는 메피스토펠레스는 공포와 정말 거리가 먼 존재이지만… 적어도 지금의 그녀는 겁을 알고 자신의 약함을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죽기 싫어서라도 방을 나설 생각을 안 했으리라.
“…#$%#어.”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사람임과 동시에 오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었다.
군단장이 들렀다 떠날 때면 세간살이를 박살 내는 것으로 격한 증오와 경멸을 표하던 이가 처음으로 그에게 유한 반응을 보였다. 눈가에서 미세하게 감정이 묻어나는 걸 보면 여즉 감정은 좋지 않아 보였지만… 그보단 바깥을 보는 게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에스코트를 위한 팔짱을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인 이가 살금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아, 드디어 나가네.”
지난 시간 동안 시험해 본바, 나는 기억의 주체가 되는 이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일정 거리는 정확히 방 안에 한정돼서, 바깥을 구경해 보고 싶어도 구경할 수가 없었고 말이다.
심지어 나와 유일하게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한 광대는, 이 이후로 방문한 적이 없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말 통하는 자 없이 지켜보는 일만 계속했단 소리다.
그게 얼마나 답답했던지. 시간순으로 흐르는 기억을 한 장면도 빠트림 없이 다 챙기려 들었다면 분명 엄청난 고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인상적인 부분만 보여 주고 나머진 스킵해 주지 않았다면 토 나왔을 거란 소리다.
끼이익.
그보다, 스킵되지 않는 걸 보면 이것도 인상적인 기억인가 보지? 나는 주체의 잣대에 따라 스킵되거나 이어지거나 결정되는 기억의 성질을 고려하며 시점을 움직였다.
주체의 입장에선 2, 3주 만에, 내 입장에선 하루 이틀 만에 하는 외출이었다.
콰앙!
“……!”
“지옥은 진짜 벌겋네.”
나는 고풍스러운 궁전의 복도를 걸으며 창문 쪽을 기웃거렸다. 기억의 불분명함으로 풍경이 좀 뿌옇긴 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던 까닭이다.
현실적인 것으로 비유하자면… 대충 해상도 480짜리 영상쯤 되려나? 아무튼 윤곽이 문댄 것처럼 부옇긴 해도 전체적인 색상이나 형상은 이해할 수 있다.
“이러니까 악마들 성질머리가 포악하지…….”
나는 붉은 바위의 대지와 검은 하늘, 링형의 붉은 태양등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이런 환경에서 살면 없던 신경증도 생길 듯. 반쯤은 농담이고, 반쯤은 진담인 말이었다.
쿵!
그러다 장면이 끊기고 다시 이어 붙여졌다. 기억의 건너뜀. 내 입장에선 스킵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뒤바뀐 주변 상황이 내게 약간의 버벅임을 선사해 주었다.
“여긴 어디야…….”
정원, 인가? 나는 조악하게나마 꽃과 나무를 심어 둔 곳을 둘러보았다. 저택의 벽면이 한쪽으로 보이는 걸 보면 정말 정원인 것 같은데…….
왜 갑자기 여기로 건너뛴 거지?
내 머리가 이해 가지 않는 상황에 얼떨떨해질 무렵, ‘털썩’ 하고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원인은 누군지 모를 악마였다. 아니, 넘어진 소리를 낸 사람만 따지면 그건 지옥 유일의 인간일지도 모른다.
[#$@#$@.]인간을 넘어트린 악마가 그녀의 다리를 지그시 짓밟았다. 뿌직. 연약한 다리에 하나의 관절이 더 생겼다. 자의로 움직일 수 없는 관절이었다.
“이 미친…….”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뒤로 눈에 띄는 폭력은 없었다. 단지 드문드문 단어가 해석될 정도로 인상적인 ‘경고’와 ‘교육’이 이어졌을 뿐.
[예의를#$#%.]정말이지, 광대의 충고가 맞았다. 이 성엔 예의범절에 집착하는 자들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