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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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부터 환하게 피어나는 검은 불꽃이 새하얀 모래 위에 이리저리 춤을 췄다. 그 그림자 아래에 겹친 두 인영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데굴데굴 바닥을 굴러다녔다.
“아악! 잠깐! 내 머리칼을 다 뜯어 갈 셈이야?!”
세라에게 또 한 움큼 머리를 쥐어뜯긴 진이 고통에 찬 절규를 내질렀다. 자비 없는 손길 아래 머리채를 뜯기고, 모래를 옴팡 뒤집어쓴 요정에게는 본래의 우아한 자태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꼬우면 너도 뽑아 가든가!”
후-. 손에 쥔 은빛 머리칼을 바람에 날려 보낸 세라가 어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이죽거렸다. 그에 진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고상하신 요정께서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싸움에 재능이 없어서, 아까부터 반격은커녕 세라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초조하게 흔들리는 시선이 연신 불타는 집을 힐끔대는 게, 이 꼴이 되어서도 눈앞의 세라보다 저 너머에 있는 성검의 기록이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대체 왜 이래. 에녹 소서가 불쌍해서? 정작 걔는 저걸 봐도 별 감흥 없을걸?!”
거친 숨을 몰아쉬던 진이 이래 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며 세라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녀야말로 세라가 방금 말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알려 준 것을 금세 잊어버린 모양이다.
“신성한 결투 판에 다른 사람 이름이 왜 나와?”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규칙도 없고, 미학도 없는 이딴 게 무슨 결투, 아악!”
“이게 내 체스판이다. 이년아!”
세라는 하라는 싸움은 안 하고 입만 나불거리는 진에게 다시 달려들어 머리를 뜯어 놓았다.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면 악에 받쳐서라도 한 대 칠 만도 한데, 진은 끝까지 인간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는 없다며 세라의 머리칼 한 올 건드리지 않았다.
“하-. 잘난 교양인 납셨네. 그래 봤자 남의 죽음이나 부추긴 음침한 변태 주제에.”
귀중한 자료? 정당한 거래?
아주, 듣는 인간 입에서 비웃음이 절로 터져 나올 기막힌 발언이었다. 저 말을 레니스처럼 요정에 대한 환상을 가진 사람에게 했다면 먹혀들었을지 모르겠으나, 세라는 전혀 아니었다.
그녀는 지성을 가진 생명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매한가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지성이 발달했다면 누구든 거짓말을 하니까.
그 거짓말로 인해 겉과 속이 달라지고, 그럴싸한 거짓 안쪽에 추악한 진심을 감춰야만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게 그들이었다.
“너희만 특별히 다른 척하지 마. 어차피 한 꺼풀 벗겨 보면 추악하긴 다 매한가지니까.”
요정이라고 해서 그 가설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은 수없이 죽음을 시도해도 방치하지만, 제 숲의 나뭇가지 하나만 꺾어도 거품을 물고 지랄을 해대는 걸 보면 말 다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진이 가진 허울 좋은 신념을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싸움에 끼어들어, 자신도 결국은 자기가 무시하던 저급한 존재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았으면 했다.
“그건 편견이야…! 우린 잘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지상에 사는 모두의 공익을 위해서-.”
말에 칼날을 박아 정신을 난도질하는 세라에게 끝까지 반항했다. 그 순간 때마침 방향을 바꾼 바람이 자그마한 모래바람을 일으켜 둘을 덮쳤다. 눈에 모래가 들어가 버린 세라의 몸에서 순간 힘이 느슨하게 빠져나갔다.
지금이다!
빈틈을 놓치지 않은 진이 세라를 밀치고 얼른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바닥을 기어 충분히 거리를 벌린 그녀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자세를 잡았으나.
“아…!”
그대로 몸을 날린 세라가 온 무게로 진의 등을 짓눌러 버리는 바람에 다시 바닥에 얼굴을 처박아야만 했다.
유리한 고점를 차지한 세라가 뒤에서부터 요정의 목에 팔을 걸어 악랄하게 숨통을 졸랐다.
“커헉, 켁, 하, 항복…!”
얼굴이 시뻘게진 진이 세라의 팔뚝을 탁탁, 내려치며 항복을 선언했다. 이것이 경기였다면 이쯤에서 싸움은 마무리되고 세라는 승리자로 관중들에게 환호를 받겠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은 험한 모랫바닥 위이고 승자가 모든 규칙을 정하는 개 싸움판이었다.
“항복 같은 게 어딨어? 그냥 죽어!”
“나, 나를 죽이면, 안 된다고! 우리 지금 거래 중이라는 거 잊었어?! 네가 바라는 건 나만 알려 줄 수 있다니까?!”
진이 자신을 정말로 죽일 기세인 세라에게 다급히 거래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었다.
“그럼 살려는 줄게. 대신 네 머리를 죄다 뽑아서 대머리로 만들고, 변태들이 만든 책들도 모조리 불태워 버릴 거야…!”
그걸로 목숨값을 갚아라.
야수처럼 이를 드러낸 그녀가 묘지에 묻힌 조상 요정들의 망령이 화들짝 놀라 깨어날 정도로 잔인한 협박을 해댔다.
“뭐?! 그런 짓을 했다간, 숲이 널, 가만두지 않을-.”
“네 체스판도!”
“그건 건드리지 마…!”
무엇을 욕보여도 침착을 유지하던 진의 눈빛이 회까닥 바뀐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표독스럽게 눈을 빛낸 진이 제 목을 조르고 있는 세라의 팔뚝을 있는 힘껏 물어뜯었다.
“아아…!”
비명을 내지른 세라가 비로소 떨어져 나왔다. 씩씩대며 몸을 일으킨 진이 불타는 집을 구하기 위해 일어서 달리다가.
“어억…!”
뻐억! 세라의 몸통 박치기를 맞고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굴데굴 굴러간 둘은 불타는 집과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화기에 얼굴 반쪽이 불타는 것처럼 뜨거워졌지만 둘은 누구도 그 사실을 개의치 않았다.
“이게, 모처럼 좋은 마음으로 초대해 줬더니!”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진이 세라를 향해 달려들었다.
“네가 한 게 납치지 초대냐?!”
흥! 코웃음을 치며 머리채를 노리는 손길을 피해 낸 세라가 바닥에 있는 모래를 한 움큼 집어다가.
“어딜 노려봐?!”
촤아악! 자신을 노려보는 면상을 향해 뿌렸다.
“아! 내 눈!”
생전 처음 맛보는 고통에 진이 두 눈을 움켜쥔 채 쓰러졌다.
“너 진짜 싸움 못한다. 그래서 기록을 지킬 수 있겠어?”
깔깔대며 요정의 허리를 타고 오른 세라가 진의 머리칼로 찰싹찰싹 뺨을 때렸다. 머리가 뜯길 때만큼은 아프지 않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충분히 치욕적이고 기분이 나쁜 공격이었다.
“제발 그만해! 저 기록마저 사라지면 에녹 소서가 그 고생을 한 의미가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고…!”
눈물을 질질 흘리느라 눈도 뜨지 못한 진이 세라에게 자비를 애걸했다.
우지끈!
그때, 약해진 기둥이 무너지면서 에녹의 집이 폭삭 내려앉았다. 안 돼! 사색이 된 진이 절규했다. 지혜로도 알 수 없는 귀중한 지식이 기어이 잿더미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세라 로젠바움! 이 악마 같은!”
그것만으로도 환장할 노릇인데 집이 무너지면서 바깥으로 떨어져 나간 파편이 근처에 있는 나무에 불까지 옮겼다. 아까 전 세라가 나뭇가지를 꺾었던 바로 그 나무였다. 새카만 불꽃이 순식간에 나무 하나를 먹어 치웠다.
아련하게 가지를 흔든 나무 기둥이 툭 끊어져 바닥으로 쓰러졌다. 나무 하나가 쓰러지자 그 옆에 있는 둘에 불이 옮겨붙었다. 둘이 쓰러지자 넷에, 넷이 쓰러지자 여덟에….
우우우웅-.
더 이상 그 불길이 좌시할 수 없는 지경까지 번지자 보다 못한 숲 저편에서부터 울음소리와 닮은 스산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나무들이 불타 사라진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듯 몸을 흔들었다. 사락. 사락.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숲을 울렸다.
사락. 사락.
사락. 사락.
바람은 이미 그쳤는데도,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땅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에는, 세라와 진이 뒹굴고 있는 바닥 밑에서 누군가 쿵! 하고 발을 구른 것 같은 육중한 땅 울음이 울린 뒤였다.
어찌나 거센 힘으로 두드렸는지, 세라와 진의 몸이 충돌의 순간 살짝 공중에 떴다 가라앉을 정도였다.
“뭐, 뭐야?”
심상치 않은 이변을 느낀 세라가 진을 괴롭히던 손을 놓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뜰 수 있게 된 진은 어느새 불에 타고 있는 숲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졌다.
두두두두-. 위아래로 진동하던 대지가 조금씩 그 진폭을 키우더니 종국에는 파도치듯 땅이 너울거리기 시작했다.
“어어어!”
중심을 잡기 힘들어진 세라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그녀는 거대한 짐승이 가지고 노는 실뭉치처럼 대지가 꿀렁거릴 때마다 이리 굴렀다 저리 굴렀다 했다.
그렇게 하도 굴러다녔더니 눈앞이 빙글빙글 돌면서, 제가 지금 앞으로 구르고 있는지 옆으로 구르고 있는지. 아니면 안 구르고 있는데 어지러워서 그냥 눈앞이 빙빙 도는 건지 모를 경지에 이르렀다.
균형 감각을 상실한 그녀가 이러다 딱 눈알이 돌아가 죽겠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이 바보야!”
누군가 두 팔로 그녀를 낚아채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게 내가 불 끄라고 했잖아!”
있는 대로 그녀를 구박한 진이 세라가 더 이상 굴러다니지 못하게 끌어안아 고정시켜 주었다. 몸싸움은 더럽게도 못하던 사람이 꿀렁이는 대지 위에서도 능숙하게 중심을 잡는 것으로 보아 이런 상황을 자주 겪어 본 것 같았다.
겨우 실뭉치 신세를 면한 세라는 어지럼증이 좀 가시자마자 뒤늦게 찾아온 멀미에 황급히 진의 옷자락을 쥐었다.
“우욱-.”
“토하지 마! 내 옷에 토하면 거래고 나발이고 전부 끝이야! 그럴 정신 있으면 불이나 끄라고. 제발! 네 눈엔 이 분노가 보이지도 않아?!”
“우욱-. 분노하면 뭐 어쩔 건데, 뭐 날 저 멀리 날려 버리기라도 할 거래?”
갸갸르르릉-!
비아냥대는 그녀의 물음에 응답하듯, 세라가 딛고 있는 바닥이 위협적으로 꿀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세라와 진이 서 있는 땅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동그랗게 푹 파였다가.
“우와앗!”
“아아악!”
바로 다음 순간, 두 사람을 하늘 높이 퉁겨 보냈다.
숲의 상공을 가로지르며 떠오른 둘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지다가, 땅을 향해 빠르게 추락했다.
“……!”
등골이 쭈뼛해지는 섬뜩한 부유감에 세라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웅-! 사나운 바람이 그녀의 피부를 찢을 듯이 할퀴고 지나갔다. 보지 않아도 등 뒤로 대지가 가까워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충돌을 기다리는 찰나의 순간.
세라의 눈앞에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죽음이 보내는 예고를 도저히 볼 용기가 나지 않았던 그녀가 찔끔 눈을 떴다가, 이미 저 멀리 멀어진 하늘에 공포를 느끼고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세라의 뇌리에 추락해 완전히 으깨진 과일의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부딪힌다. 부딪힌다. 부딪힌다……!
끔찍한 고통을 예상한 세라가 저도 모르게 숨을 흐읍, 하고 참은 순간.
아래에서 치솟아 오른 물웅덩이가 공중에 있는 두 사람을 부드럽게 집어삼켰다. 풍덩, 소리도 내지 않고 물에 빠진 육체에는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떨어지는 두 사람을 받아 낸 물웅덩이가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 호수가 되었다.
으깨진 과일 꼴은 면했으나 세라의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 수영 못한다고!’
물속에 잠긴 몸이 바닥을 향해 빠르게 가라앉았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 발버둥을 쳐 보지만, 수영은커녕 물에 뜨지도 못하는 탓에 오히려 역방향으로 쭉쭉 내려갈 뿐이었다.
폐활량이 좋지 않은 세라는 금방 한계에 다다랐다.
꼬르르륵. 그녀의 입에서 터져 나온 공기 방울이 위를 향해 떠올랐다. 그것이 채 수면에 닿기도 전에 세라의 눈앞이 흐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