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elist Running Through Time RAW novel - Chapter (240)
EP 14 – 미래 >
한때는 사람이 선량하다고 믿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따스한 양심이 있으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면 친절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막연한 믿음과는 달리, 사람은 선량하지 않다.
애초에, 선량이니 뭐니 선택할 만한 능력 따위.
인간에게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조종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욕망에게 조종 당하는, 기계적 꼭두각시들이다.
“안 그래요, 언니?”
“으, 으응······”
배우 김별의 삶은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제법 간편해졌다.
김별은 이제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돌리지 않는다.
괜히 커피를 사서 동료 배우들에게 나눠 주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적대시하는 이들에게, 웃어 주지도 않는다.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제가 다시 찍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도, NG가 나거나 한 것도 아닌데···”
“그건 PD님이 마음이 너무 약하셔서 그래요. 배우들 기 죽을까봐 애매한데도 NG 싸인 못 보내고······”
김별이 막무가내로 재촬영을 밀어 붙이는데도, 상대방 배우 정효린은 겁 먹은 어린아이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댈 뿐, 뭐라고 반항하지도 못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패거리를 우르르 끌고 다니며 김별의 악담을 퍼뜨리고 다니던 모습과는 천양지차였다.
김별은 PD를 끌어들였다.
“안 그래요, 피디님? 방금 좀 애매하지 않았나요?”
김별의 머리 속에서 슬며시 백과사전이 펼쳐졌다.
주호상 PD. KBS 공채 35기. BMB 이적 3년차. 히트작 전무.
성격이 줏대가 없는 편이긴 해도, 드라마 말아먹으면 짤리게 생긴 마당에 설렁설렁 일하진 못할 것이다.
“······쓰읍,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네.”
“그렇죠?”
“신통방통하기도 해라, 김 스타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
“보는 사람도 애매한데, 하는 사람은 오죽할까요.”
그렇게 김별은 ‘스스로의 부족함’을 빌미로 재촬영을 강행시켰다.
그러나 연기를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촬영에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던 건, 김별이 아니라 상대방 배우, 정효린이었다는 사실을.
“······”
김별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을 파르르 떨었다.
물론 머리 속에 퇴근 시간과 오늘 저녁밥 메뉴 고민만 들어 있는 사람들은 김별이 자기 실수를 그냥 넘기지 못해서 재촬영을 요구한 줄로만 알았다.
조금 더 기민한 사람들은 김별이 공개적으로 정효린의 연기를 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 촬영장의 그림자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언어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난 며칠 사이, 김별이 자신의 뒷담화를 일삼던 정효린의 패거리를 하나 하나 박살내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심장에 쇠말뚝을 박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언니. 저 때문에 고생 시켜드려서 어쩌죠?”
김별은 마지막까지 정효린을 ‘언니’라고 불렀다.
김별이 ‘선배’였으니까.
EP 14 – 미래
「한때는 사람이 선량하다고 믿었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따스한 양심이 있으며,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면 친절이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믿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막연한 믿음과는 달리, 사람은 선량하지 않다.
애초에, 선량이니 뭐니 선택할 만한 능력 따위.
인간에게는 없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조종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욕망에게 조종 당하는, 기계적 꼭두각시들이다.
“안 그래요, 피디님?”
배우 강은채의 삶은 그 사실을 깨달은 이후로 제법 간편해졌다.
강은채는 이제 웃는 얼굴로 계약서를 들이미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아니라 종이를 본다.
괜히 하는 말에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하는 대신, 자신도 공허한 감사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탐하는 쓰레기들을, 굳이 욕하지도 않는다.
“지난 주에 촬영을 일곱 번이나 했잖아요. 오늘 회식은 힘들어서 못 가요. 정말이지······”
“에이, 그래도 우리 은채 씨가 빠지면 다들 섭하지. 와서 딱 얼굴만 비추고 가, 응?”
“하······ 내일 스케줄 있는데.”
사실 없다.
없는데도 강은채는 제법 인상을 찌푸리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리고 PD의 간절함이 서서히 고조되고, 그 간절함이 불쾌함으로 전환되기 직전.
“오케이! 우리 김 피디님 부탁이니까 제가 딱 얼굴만 비추고 가겠습니다!”
“정말? 정말이지? 은채 씨 나랑 약속한거다?”
“대신 술은 많이 못 먹는 거 아시죠? 제가 주량이 약해서······”
안 약하다.
그런데도 강은채가 주량이 약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술을 덜 먹여서는 아니고, 이 사회의 통념상 여자가 술을 많이 마시면 발랑까졌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은채는 조신한 척, 연약한 척, 까다로운 척을 하며······
오늘도 불쌍한 PD 하나를 어장에 넣었다.
“좋아! 그럼 오늘 저녁에 보는 거다? 은채 씨?”
“네, 그때 봐요 피디님-”
강은채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
헤벌쭉한 표정을 짓는 피디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PD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강은채는 ‘연기’를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지고, 싸늘한 무표정이 미소가 있던 자리를 대체했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못했을까?’
강은채는 이제 이 세상이 두렵지 않다.
사장이 직원에게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PD가 여배우를 룸싸롱으로 불러내는 이 잔혹한 약육강식의 세상이 두렵지 않았다.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도, 누군가에게는 ‘약자’임을.
두려움은 미지에서 비롯되며, 강은채는 세상에 절대적 강자가 없음을 깨달았다.
무시무시한 문신을 하고서 주먹을 휘두르던 사장도 방송국 PD 앞에선 순한 양이 되며, 무명 배우의 인생을 말 한 마디로 짓밟을 수 있는 PD도 방송국 사장 앞에선 파리 목숨이다.
방송국 사장이라고 두려운 사람이 없을까? 그 역시도 동네 국회의원만 뜨면 쫄래쫄래 달려가서 허리를 굽신거려야 한다.
그 대단하신 의원 나으리 역시도 선거철이 되면 공천권을 가진 거물 정치인에게 재롱을 피우고, 그 거물 정치인 역시 대통령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무적인가?
IMF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절대적인 ‘강자’는 없다.
모든 강자는 누군가 앞에서는 약자이며, 자신의 비굴함을 바로 그 윗사람에게 바친다.
그리고 그 비굴함이 사라진 자리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와 치욕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당장 룸싸롱으로 튀어 오라고 윽박 지르며 푸는 것이다.
그랬다.
이 세상은 피라미드의 모양을 한 지옥이었다. 뾰족한 꼭대기 위에는 누구도 설 수 없다.
모든 이는 강자에게 비굴함을 바치고, 한편으론 약자에게서 비굴함을 받아낸다.
모든 강자의 마음 속에는 약자가 있다.
그러므로······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면, 일이 아주 간단해진다.
“휴우······”
그것이 배우 강은채가 최 PD의 요구를 ‘좆 까’고도 업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강은채에게 주어진 시련이란 딱 최 PD 같은 사람이 ‘너 이제 이 바닥에서 영영 일 못하게 해줄게’라고 선포했을 때 일어날 법한 일들이었다.
붙은 줄 알았던 오디션이 갑자기 불발되고, 맡고 있던 광고 모델에서 짤리고, 누구도 먼저 일자리를 주지 않고······
이른바 어른의 이지메다.
그러나 강은채는 사회의 쓴 맛을 보면서 점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지식 중에는 이러한 것도 있었다.
PD는······ 생각보다 열악한 직업이다.
갓 입사한 PD는 수많은 선배 PD의 시종이 된다. 박봉과 과로, 그리고 수많은 인격 모독을 오랜 시간 거치고 나서야 PD는 그제야 자기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얻어낸 촬영장 안에서는 PD가 왕이다. 그러나 그런 폭군에게도 콤플렉스는 있다. 그건 영원히 대중으로부터 사랑 받을 수 없다는 열등감이다.
제아무리 좋은 드라마를 만들더라도, 영광은 PD가 아니라 배우의 것이 된다.
PD 자신은 대중의 사랑을 느낄 새도 없이, 곧장 방송국 내부의 치열한 질투를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을 떠안고, 다음 작품을 제작하러 나선다···
그렇게, 명예는 배우에게, 돈은 방송국에게 빼앗긴다.
그렇다면 PD에게 남은 것이라곤?
공허한 자존심 뿐.
그래서 PD들은 아무리 많은 아첨을 들이부어도 채울 수 없는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캐스팅을 원하는 이들의 비굴함을 빼앗에 제 아가리에 집어넣는 것이다.
매니저를 무릎 꿇리고, 여배우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음악 방송에 출연한 가수들을 방송국 복도에 줄 세우면서···
“안녕하세요, 배우 강은채입니다. 김 피디님이 좋은 사람들 소개시켜준다고 하셔서 잠깐 와봤어요.”
“어? 뭐야? 진짜 불렀네?!”
“아이고! 어여쁘신 분이 이런 자리에··· 앉으세요! 앉으세요!”
“이야아- 김 피디 이 자식···!”
“팬입니다! 팬!”
그러므로 PD란 존재는 언제나 비대한 자아를 충족시켜 줄 권력욕을 갈구하는 애정결핍 싸이코들이다.
그리고 그런 결핍을 채워주는 데에는 성상납은커녕 손조차 잡아줄 필요가 없다.
언제나 서로를 비교하고, 질투하며, 급을 나누는, 가혹한 남자들의 사회에서···
젊고, 유명하고, 아름다운 여배우와 친분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권위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 김 피디님 잘 봐주세요, 여러분-”
“아! 물론이죠! 물론이죠!”
그 부분만 잘 이용한다면, 여자는 남자를 바보로 만들 수 있다.
그렇다.
강은채에게는 그녀를 미워하는 1명의 PD가 있었다.
그러나 이젠, 강은채에게는 그녀를 선망하고, 갈구하고, 동정하는, 여러 명의 PD가 있다.
그것이 강은채가 최 PD의 음습한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난 비법이었다.
물론 이런 비법에는 약간의 ‘기술적인’ 테크닉이 요구된다.
대개 남배우에 비하면 외모가 특출나지 않은 PD들은, 여배우를 권위로 찍어누를 순 있어도 꼬실 순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본인들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부쩍 눈에 밟히고, 제법 친해진 여배우 하나한테, 그녀를 감싼 이상한 소문들에 대해 슬쩍 물어봤더니···
‘사실, 제가 어느 PD의 성상납 요구를 거절해서··· 으흑···!’
-이란 대답이 돌아온다면?
어차피 최 PD가 강은채를 괴롭힌다는 사실은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마침 본인은 최 PD와 그리 친하지도 않다.
이때 PD들의 머리 속에는 동화 한 편이 스쳐 지나간다.
악당에게 괴롭힘 당하는 아리따운 공주를 지켜주고,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는 용맹한 기사의 이야기가 말이다.
‘아니, 그런 쓰레기 새끼가···!’
이때, 강은채가 의도적으로 최 PD와 사이가 안 좋은 PD들만을 골라서 찾아다녔다는 추측마저 기대하는 건, 이미 장밋빛 미래에 취해 있는 PD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다.
그렇게 강은채는 정의로운 명분과, 아리따운 외모, 그리고 자신조차 미처 몰랐던 가스라이팅 실력을 십분 발휘하며 여러 PD들을 어장에 넣었다.
그리고 어장 속 물고기들을 꼬박꼬박 관리하며, 박살난 평판과 부족한 연기 재능을 가지고도 그럭저럭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휴우······”
오늘도 강은채는 PD 한 명의 체면을 제대로 세워주며 고깃집에서 나왔다.
날씨가 추워져서 하얀 입김이 솔솔 올라왔지만 문제는 온도 따위가 아니다.
‘김 피디··· 잔뜩 신났겠네,’
어장 속 물고기들에겐 너무 잘해줘도 문제가 된다. 주말에 둘이서 밥 먹자고 불러내거나, 자꾸 촬영 끝나고 술 마시러 가자며 치대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다시 얌전하게 만들려면 기강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강은채는 조만간 김 PD를 야코 죽여놓을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며 어둑한 밤거리를 걸었다.
“저기요.”
아니, 걸으려 했다.
고깃집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던, 신입 PD 하나가 그녀를 붙잡기 전까지는 말이다.
강은채가 젊은 PD를 흘겨 보았다. 그녀가 사람 이름은 잘 기억 못해도 직위는 확실히 기억한다. 분명, 김 PD 밑 조연출 밑에서 시다바리 노릇을 하는 막내 PD였다.
저 정도면 촬영장에서 PD 소리도 못 듣는다. 다들 ‘막내야-!’라고 부르지.
하지만 강은채는 다르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말을 높였다.
“어머, 무슨 일이세요, PD님?”
“···!”
호기롭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막내 PD는 살면서 ‘PD님’이란 호칭을 처음 들어보는 것처럼 흠칫 놀라더니, 이내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강은채는 그 모습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강은채··· 배우님?”
“네?”
“저희 김 피디님한테 잘해주시는 거··· 이제 그만해주셨으면 합니다.”
강은채는 눈앞의 막내 PD가 제 직장상사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줄 알았다.
아니, 그, 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도 있지 않은가.
다만 살면서 동성애자를 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던 찰나···
“김 피디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그냥 넘기기 힘든 말을 들었다.」
EP 14 – 미래 > 끝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