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17
216
‘네가 그 운명을 마다한다면.’
‘세라 로젠바움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겨 지상을 떠돌게 되리라.’
잔인한 운명을 예고하는 목소리가 채 꺼지기도 전에, 검이 뽑혔다.
마침내 자격을 갖춘 주인의 손에 들어간 성검이 길게 울었다. 영웅의 탄생을 알리는 찬란한 광채가 세상을 뒤덮었다.
“……!”
퍼뜩 정신을 차린 세라가 자신을 깔아뭉개고 앉은 상대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살짝 고개만 꺾어 공격을 피한 에녹이 가소롭다는 듯이 가녀린 손목을 틀어쥐었다. 그렇게까지 세게 잡지도 않은 것 같은데, 손목이 으스러질 것처럼 아팠다.
으윽, 억눌린 신음을 삼킨 세라가 나머지 팔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붙잡히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쿵, 에녹이 결박한 두 손을 바닥에 내리눌렀다. 뼈가 아릿할 정도로 거친 힘이었다.
완벽하게 우위를 점한 에녹은 손안의 먹잇감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듯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녹은 날 선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세라를 향해 무미건조한 감상평을 하나 툭, 내뱉었다.
“이번엔 꼭 진짜 같네.”
재수 없게.
“……!”
그 순간 세라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쭈뼛 솟았다. 찰나였으나, 자신을 내려다보는 에녹의 눈동자 속에 위험한 빛이 어리는 걸 본 것 같았다. 반사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린 그녀는 가까워진 에녹의 코를 부서뜨릴 기세로 제 머리를 쾅! 찧어 박았다.
이건 의외였는지 에녹의 몸이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 틈을 통해 빠져나온 세라가 자신이 들어온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한계까지 혹사당해서인지, 아니면 은연중에 느낀 위협 때문인지 땅을 내딛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늘을 향해 뻥 뚫린 입구 근처의 벽에 등을 기댄 세라가 에녹이 묻혀 있는 어둠 속을 노려보며 숨을 헐떡였다.
으윽, 뒤늦게 고통을 통감한 그녀가 발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부여잡은 채 신음했다.
있는 힘껏 부딪힌 머리가 빠개질 것처럼 아파왔다. 둥둥 울리는 통증 위로 긴 세월에 걸친 기억이 파편처럼 튀었다.
그건 정리되지 않은 서랍 속처럼 몹시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장면의 연속이었다.
‘황제를 끌어내라!’
‘마녀를 불태워!’
파편은 검은 연기가 치솟는 소서 황궁이었다가.
‘저기다! 저곳에 마녀가 있다!’
높이 솟은 첨탑이었다가.
‘왔니?’
마지막에는 그곳에 선 마녀를 비추었다.
‘생각보다 늦었네.’
지치고 피로한 낯을 한 여자가 그의 발치에 무언가를 던져 놓는다.
‘오랜만에 와서 헤맨 건가?’
성문은, 분명 잘 열려 있었을 텐데.
여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볼품없이 굴러온 머리통이 구두 끝에 부딪혀 멈추었다.
언제나 남자를 상처 입히지 못해 안달을 하던 못난 황제는 그렇게 비참한 꼴로 그를 맞았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금발을 빤히 바라보던 에녹이 여자를 향해 물었다.
‘왜 이런 짓을 하셨습니까?’
‘그냥…….’
여자가 대답했다.
‘지겨워서.’
그건, 한 제국을 뒤집어 엎어버리기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다.
‘너도, 황제도.’
‘이 빌어먹을 제국도.’
말을 마친 마녀가 새하얗게 웃는다.
‘전부 다, 사라졌으면 좋겠어.’
남자가 처음으로 마주한, 개운한 미소였다.
그에 반응하듯 남자의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성검이 길게 울며 속삭였다.
바로 지금이라고.
지금이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그 뒤로는 파편이 더욱 드문드문 지나갔다.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검게 칠해진 기억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절규인지, 고함인지, 울음인지 모를 서글픈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렇게 보이는 게 없더라도, 그 속에 담긴 감정만큼은 어김없이 세라에게 스며들었다. 흘러가는 파편이 쌓일수록 목 안쪽에 저릿한 덩어리가 맺혔다. 그 덩어리가 금방이라도 터져나갈 듯 아슬아슬하게 커졌을 즈음.
시야가 걷히며 에녹이 나타났다.
검은 방, 검은 벽, 검은 숲.
온통 새카맣기만 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에녹 소서.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나타난 그가 누군가의 앞에 쿵, 하고 무릎을 꿇었다.
‘알려줘. 진.’
그는 그를 숨 쉬게 만들었던 모든 목적을 잃은 듯 시들어 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스스로 마지막 잎새를 떨구고 메말라 죽기를 기다리는 나무와 같았다.
하지만 마르고 창백해진 얼굴 위로 악에 받친 두 눈동자만이 형형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남은 미련을 확인하듯, 투명한 눈물을 줄줄 흘려댄 영웅이 요정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구원받았나?’
그의 품에는 고요히 눈을 감은 마녀가 잠들어 있었다.
툭, 그가 쏟아낸 눈물이 마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영웅은 그 얼룩을 닦아냈다. 더없이 소중한 것을 대하듯이. 조심스럽게.
‘괴로워하지 마. 에녹 소서.’
그 모습을 착잡하게 지켜보던 요정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요정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러자 다른 요정들이 다가와 영웅의 품에서 마녀를 떼어냈다.
마녀를 조각배에 태운 요정들이 그 안에 이름 모를 꽃들을 가득 담아 넣었다. 그리고 안개가 자욱한 호수의 저편으로 조각배를 밀어 보냈다.
‘신께서 이르시길. 세라 로젠바움의 영혼은 그녀가 닿을 수 있는 최선의 결말에 닿았으니.’
배가 떠난다.
에녹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조각배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광경을 고요히 지켜보다가.
‘그렇군.’
그렇다면 나는 그걸로 되었다.
서글픈 혼잣말을 읊조리고는 말릴 틈도 없이 성검으로 제 목을 내려쳤다.
“……!”
허억, 목에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에 세라가 진저리를 치며 깨어났다.
그곳을 관통하던 통증은 환상에서 놓여남과 동시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 대신 아직도 이마에 알싸하게 내려앉은 감각이 현실을 일깨웠다.
긴 시간을 한꺼번에 경험한 그녀와는 달리, 실제로는 이 방의 주인으로부터 탈출한 지 단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세라의 시야 너머로 검은 방이 비쳤다.
홉 뜨여진 두 눈은 방금 자신이 본 게 무엇인지 가늠하는 것처럼 바짝 동공을 좁혔다.
자신의 안위보다도 세라의 안식에 진심으로 안도하던 얼굴.
스스로를 향해 떨어지던 검.
마지막 장면으로 찬찬히 되짚어보던 그녀는 기어이 애써 덮어두었던 질문의 해답을 깨우치고야 만다.
“……그것도, 나 때문이었구나.”
검은 집. 진득한 절망이 묻어나오던 검은 책.
에녹의 기록.
그가 그렇게나 죽음을 열망하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도 놀라움보다는 역시라는 말이 앞서는 이유는.
사실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모른 척 덮어두었다는 거추장스러운 진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이곳에서 보았던 그 모든 기억들, 감정들, 고뇌,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그때는 몰랐던, 그러나 명확하게 실재하고 있었던 애정은 그녀가 감히 넘겨짚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맹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그게 어떻게 가능해…?
살갗에 날 것 그대로 와 닿았던 애절함에 뱃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
세라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아내듯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문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제자리를 빙빙 돌았다. 마땅한 해답을 뱉어내지 못하고 축적되기만 하는 질문에 머리가 터져나갈 것 같았다. 이성이 하수구에 빠진 것처럼 자꾸만 한쪽으로 매몰되었다.
안 돼. 더 이상 생각하지 마.
가까스로 생각을 끊어낸 그녀가 퉤, 쓴맛이 올라오는 입안을 뱉어냈다.
그즈음 자리에서 일어선 에녹이 다시 성검을 손에 쥐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생각으로 가득 찬 그가 또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세라는 방금 전의 일방적인 추격전을 겪으면서,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다른 놈들은 ‘목소리’가 잘만 통하던데, 이 에녹은 잠깐 움직임을 멈칫거리는 게 고작이었고, 반대로 자신에게 암시를 퍼부어 보아도 우위는커녕 아슬아슬하게 도망치는 게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통하지 않을 모양인지 방금 전에는 완전히 붙잡혀 끝장이 날 뻔했다.
그렇다고 약점을 잡아 정신을 박살내자니 이미 스스로 맛이 가버린 놈이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말이 통할 상대인가부터도 의문이다.
이렇게 보아도, 저렇게 보아도 그녀가 내려야 하는 결론은 하나였다.
저건 이기지 못한다.
무력으로도, 말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방법을 바꿔야 했다.
이 녀석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광신도를 여기까지 끌어올려 둘을 마주치게 하는 게 더 쉬운 일일 터다.
그러니 지금은 도망쳐야 했다.
저 무시무시한 남자가 이곳에 도달하기 전에 입구 바깥으로 몸을 날리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데…….
“…….”
벽을 따라 입구까지 미끄러진 세라가 마지막 순간 무엇을 떠올렸는지, 뒤로 몸을 날리지 못하고 멈칫거렸다.
그 잠깐의 망설임이 화근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남자의 검이 순식간에 세라를 향해 휘둘러졌다. 피하기에도, 뒤로 몸을 날리기에도 이미 늦어버린 타이밍이었다.
부우웅-. 얼굴로 불어온 차가운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
“…….”
연약한 목을 두 동강 내어버릴 기세로 휘둘러지던 검이 거짓말처럼 살갗을 베어내기 직전에 멈춰 섰다.
가까워진 거리의 두 사람이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에녹은 죽자 사자 도망치더니 이제 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녀가 한심한 듯 픽, 비웃음을 내쉬었다.
“멍청하네.”
그대로 뛰어내렸어야지.
덜 떨어진 무언가를 대하듯 그녀가 취했어야 할 최선의 대답을 속삭여 준 그가 뭐 이런 게 다 있지 하는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사람이라면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내렸을걸?”
그리고 가짜라도 노력을 해보라는 듯 진짜 세라 로젠바움이었다면 이렇게 했을 것이라며 비교질을 해댔다.
“그러게. 나한테 이렇게, 멍청한 면이 다 있더라.”
너무나도 맞는 말이어서, 세라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네 덕에 이런 것도 다 알게 되네. 고맙다?”
참, 고마워.
상대에게 감사를 표하는 목소리에는 전혀, 호의가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어딘가 허탈하고, 짜증스럽고,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지긋지긋함이 깃든 감정이었다.
“이 등신 새끼야!”
이를테면 분노 같은.
신랄한 욕을 씹어뱉은 그녀가 불시에 제 목을 겨눈 칼날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남자가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
푹-. 새하얀 손에 이끌린 새카만 검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