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18
217
검에 꿰뚫린 자리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아프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는 순간, 세라는 곧바로 역시 가슴을 뚫어 버리는 건 너무 갔다며 후회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감질나게 이어지던 기억의 편린들이 상처를 타고 범람하기 시작했다.
‘…….’
이어진 기억 속의 에녹은 죽음에서 살아 돌아왔음에도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초점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짚는 동공은 상이 맺히는 기관이 아니라 그냥 뻥 뚫린 구멍 같았다. 힘없이 기대어 앉아 살아났음에 절망하는 그는 최소한의 삶의 의지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영웅의 곁에, 은빛의 요정이 나타났다.
그리고 말한다.
네가 요정의 숲에 머무르는 사이, 세상에는 또 한 번 전쟁이 일어났다고. 사악한 마왕이 선량한 인간들을 괴롭혀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노라고. 그들에겐 네가 필요하다고.
에녹은 처음부터 끝까지 멀거니 듣기만 하다가.
‘……그래.’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요정들은 그가 또 돌발 행동을 벌일까 경계했으나 그는 그대로 걸어 요정의 숲을 빠져나갔다. 죽음을 바라면서도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 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에는 망설임이랄 게 없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에녹은 자신이 구한 사람들의 환호성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지상에 마지막 남은 구원자로 칭송받는 그의 얼굴은 조금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다시 또 장면이 바뀐다.
요정의 숲으로 돌아온 에녹은 자신을 맞이하는 요정들의 첫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죽음을 시도했다.
그리고 성검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삶의 절망에서 헤어 나오기도 전에, 요정이 다시 그를 찾았다. 세상엔 아직 그가 필요했다. 영웅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났다.
구원, 죽음, 소생, 절망, 구원, 죽음, 소생, 절망….
그 지긋지긋한 고리는 끊어지지 않고 수백 년을 이어졌다. 원하는 것을 얻지도, 그렇다고 잊지도 못한 영웅은 지나는 세월 속에 하루하루 피폐해져 갔다.
“…….”
세라는 버려진 아이처럼 서글픈 얼굴의 영웅을 향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가슴을 꿰뚫은 검이 더 깊이 틀어박혔다.
더럽게 아프네.
세라는 골이 저릿해질 정도로 울리는 통증에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싶었으나,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그녀가 앞으로 걸어간 거리만큼, 새로운 기억이 밀려들었다.
‘에녹-!’
진이 소리 높여 영웅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기겁을 한 그의 발치에는 에녹이 있는 대로 때려 부순 집기들로 엉망이었다. 진이 방 안에 들어서자, 서늘한 칼날이 곧장 진의 목에 겨누어졌다.
‘저거.’
미친놈처럼 형형하게 눈을 빛낸 에녹이 자신이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침대를 가리켰다.
‘내 눈앞에서 당장 치워.’
그곳엔 세라가 보기에도 자신과 꼭 닮은 여자가 누워 있었다. 잔뜩 흐트러진 이불과 옷가지가 지난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변해 주었다. 다만,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이불을 감싸 쥔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목각 인형처럼 갈라져 있어 인간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감히 내 앞에 저딴 걸 들이밀어?’
진심으로 화를 내는 그는 실로 오랜만에 살아 있는 인간같이 느껴졌다.
치를 떠는 에녹에게서는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배신감, 낭패감, 지독한 자기혐오…….
미친놈처럼 형형한 눈으로 진을 노려본 그가 어젯밤 자신이 삼켰던 약병을 요정의 발치에 내던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깨지며 요정의 발등에 길게 상처를 남겼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했는데?’
붉게 벌어진 살을 내려다보던 요정이 한참 후에 겨우 말문을 열었다.
네가 죽도록 내버려 뒀어야 했나.
아니면 완전히 미쳐 버릴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나.
요정은 그들에게 주어진 좆같은 선택지 중 무엇을 선택했어야 옳을지 따졌다.
‘어차피 넌 원하는 걸 얻을 수 없어. 이제 그만 받아들일 때도 됐잖아.’
잔인한 현실을 읊조리는 목소리에는 그동안 꾹꾹 눌러 담은 인내가 느껴졌다.
에녹은 요정을 지나쳐 검은 집을 떠났다.
성큼성큼 멀어지는 그의 등 뒤로 악에 받친 진의 고함이 뒤따랐다.
‘차라리 타협을 해! 나가서 비슷한 사람이라도 붙잡고 위안이라도 삼으란 말이야!’
세라는 멀어지는 그를 따라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가, 더욱 깊이 파고든다.
장면이 바뀐다.
어느 날의 그가 조각배를 띄운 호수에 뛰어들었다.
충동적이었다.
호수 깊이 가라앉은 그는 이대로 눈을 뜨지 않기를 소원했다. 제게 가혹한 운명을 물려준 신에게 동정심이라는 게 남아 있다면, 세라를 띄워 보낸 이 호수에 자신도 함께 묻어 주기를.
‘일어나라. 에녹 소서.’
하지만 신은 끝까지 잔인했고, 뭍까지 밀려난 에녹은 멀쩡히 숨이 붙은 몸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의 눈동자가 떠오르는 보랏빛 별 무리를.
‘죽음은 아직 네 운명이 아니다.’
신은 이 지긋지긋한 삶이 더 이어질 것이라 속삭였다.
에녹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저는 언제 만날 수 있습니까.
신이 대답했다.
‘네가 그리워하는 그 사람은 결코 네 곁에 돌아오지 못한다.’
‘…….’
‘이 예언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이보다 확실한 사형 선고가 또 있을까.
원하는 무엇도 얻을 수 없음에 가슴팍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다시 눈을 뜨면 자신은 멀쩡할 것이다.
그게 신이 허락한 자신의 운명이니까.
까마득한 절망에 삼켜진 에녹은 차라리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또 한 걸음.
세라가 전진했다.
어느새 검은 더는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깊게 박혀 들었다.
‘에녹. 또 애인이 늘었네?’
나른하게 늘어진 그가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누군가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 대꾸해 주었다. 술과 담배, 약, 신경을 늘어뜨릴 수 있는 모든 것에 취한 동공이 방탕하게 벌어져 있었다.
검은 집을 떠나온 그는 적어도 이전보다는 사람 같아 보였다.
더는 죽기 위해 애꿎은 시도를 하지도 않았고, 말라 죽은 나무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술과 약, 여자, 영광, 명예, 찬사, 환호.
그 모든 것들에 파묻힌 그는 제법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영웅처럼 보였다.
‘…….’
그렇게 흥청망청 살다가도 어느 날은 사무치는 외로움에 주저앉았다.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면 에녹은 언제나 눈보라가 치는 소서 황궁을 헤매고 다니는 환각에 시달렸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항상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제나 문을 열어 주었다. 내키지 않는 얼굴을 하면서도, 결국은 외면하지 않았다.
‘마녀가 쓰러졌다!’
‘영웅이 승리하셨다!’
그 꿈은 언제나 같은 결말을 맺는다.
‘……!’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악몽에서 깨어나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를 괴롭힌다.
영혼이 찢겨 꿰뚫리는 소리.
빛을 잃어 가던 눈동자.
제 품에 쓰러지는 가녀린 무게.
서서히 식어 가는 온기.
마지막 숨을 내뱉던 입술.
식은땀을 줄줄 흘린 에녹이 두 손을 벌벌 떨어댔다.
악몽의 잔재가 남아 있는 눈동자가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두 손을 훑었다.
그곳에 아직도, 제 손을 적시던 뜨거운 피가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자신이 준 게 정말 구원이었을까.
그딴 게 구원이 맞나.
제 손안에서 일어난 건 틀림없는 죽음이었는데.
독처럼 퍼진 의심이 그를 괴롭혔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그녀를 구해 주고 싶었는데, 정작 그녀를 위해 줄 수 있는 게 죽음뿐이었다는 게.
그게 정말 제게 일어난 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흔들리던 마음은 다음 순간 신의 전언을 기억해 내고 그것이 최선이었노라 위안을 얻었다가, 그런 것으로 합리화를 하는 스스로가 또 증오스러워졌다.
삶이 이렇게 버거운데 아직까지 숨을 쉬고 살아 있는 게 이상했다.
그렇게밖에 그녀를 구하지 못한 자신이 증오스럽고, 따라 죽고 싶은데 죽지도 못하게 하는 신이 증오스럽고, 계속 위험에 빠져 자신이 필요하다는 세상도 증오스러웠다.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제게 남은 게 고작 그것뿐인 세상이라는 게 싫었다.
그냥 다 부숴 버릴까.
어차피 구해 내고 구해 내도 위기만을 답습하는 세상이라면 없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파괴적인 충동에 시달리면서도 끝끝내 이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냥 착하게 살아. 나 같은 사람 말고. 훌륭하고 멋진 사람 돼.’
가파르게 오르내리던 에녹의 호흡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악몽에서 깨어난 그가 허무한 눈으로 방을 훑었다. 하늘만 보이도록 막아 놓은 창문에 달이 뜨지 않은 밤하늘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운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그 광경을, 에녹은 아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오, 에녹. 오늘은 우울증이 좀 나았나 봐?’
해가 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에녹은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친근하게 농지거리를 해 왔다. 에녹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픽, 웃으며 상대가 건넨 술잔을 받아 들었다. 누군가가 아침부터 술이냐는 핀잔을 해 왔지만 개의치 않고 잔을 기울인다.
닥치는 대로 술을 들이부으니 날이 서 있던 눈가가 다시 나른해졌다.
태양 아래로 걸어 나온 영웅의 주변으로 금세 사람들이 몰렸다.
의자에 등을 기댄 에녹은 제 곁에서 재잘대는 이들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지루한 삶이 반복된다.
“…….”
가슴속에 뻐근하게 차오르는 짙은 우울감에 세라가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숨을 쉴 때마다 에녹이 이 검은 방에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시시각각 형태를 바꾸어 넘실거렸다. 그것은 사무치는 그리움이 되었다가, 외로움이 되었다가, 절망하여 지하 깊이 꺼졌다가, 분노로 용솟음치다, 종국에는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가 되어 자신을 찔렀다.
그 답도 없는 흐름을 따라가던 세라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상대를 인지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뭘 또, 그렇게까지 놀라.”
죽이려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픽, 웃음을 내쉰 세라가 기절한 것처럼 굳어 버린 상대를 향해 신랄하게 이죽거렸다.
“……!”
그녀의 말에 흠칫 어깨를 굳힌 에녹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텅 빈 우물처럼 새카맣게 죽어 있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감정이랄 게 어렸다. 스르륵, 움직인 눈동자가 손잡이 부근까지 깊이 박혀 든 검에 멈췄다.
“미쳤군.”
에녹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는 스스로에게 치명상을 입히는 그녀가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미친 건 너지…. 난 정상이고.”
세라는 그 상황에서도 엄한 사람에게 누명 씌우지 말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넌 애가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그리고 여전히, 네가 문제라는 듯 검을 쥔 에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쥔 에녹의 손은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스스로도 제 상태가 어떤지 몰랐던 모양인지, 에녹의 미간이 한층 더 깊이 팼다.
세라는 그 떨림을 진정시키고 싶은 것처럼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어설픈 손길로 쓸어내린다.
“…….”
그에 에녹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혼란과 경계심으로 요동치는 시선이 관찰하듯 세라를 바라보았다.
꼭 사람의 손을 타지 않던 야생 동물이 처음으로 손길을 느낀 것처럼, 낯설지만 어딘가 그리운 느낌이 드는 이 상황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러운 반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훌륭한 사람 되지 말고 막 살라고 할 걸 그랬지.”
“……!”
에녹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는 듯이.
검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시간을 늦춘 듯 느리게 그녀의 얼굴을 향해 올라붙었다.
바짝 조여든 동공이 고통으로 희게 질린 얼굴을 구석구석 살핀다.
세라는 공간을 가득 채우던 에녹의 살기가 완전히 사라졌음을 눈치챘다.
무언가를 하려면 지금이었다.
지금이라면, 에녹은 세라가 하는 무엇이라도 순순히 당해 줄 것이다.
검으로 그를 찌르든, ‘목소리’로 홀리든, 아니면 이대로 저 하늘 밑으로 떠밀어 버리든.
그는 기꺼이 당해 줄 것이고, 세라에게도 그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해야 할 일을 해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세라는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그것이 얼마나 매정하고, 잔인한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너?”
메마른 우물 같은 눈에서 투명한 눈물을 뚝, 떨구어 낸 순간.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아마 앞으로 평생.
이 남자에게만큼은 매정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누가 첫사랑을 이렇게 하냐. 이 등신아.”
패배를 인정한 세라가 항복이라는 듯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눈앞의 에녹을 매정히 부숴 버릴 수도, 홀로 두고 내뺄 수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못해 계획이 많이 어긋났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탈출 계획을 영영 포기해 버린 것도 아니었다.
자고로 제가 할 수 없는 일은 남에게 미루는 게 제일이라고 했다.
세라는 제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특한 마음을 고이 접어 하늘 멀리 날려 버렸다.
“이런 칙칙한 곳에 갇혀 있으니까 성격이 이상해지지.”
그러고는 지독한 첫사랑을 앓고 있는 멍청한 남자를 끌어안고서 까마득한 공중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