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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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 밖의 세상은 그가 상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물론, 비가 온 다음 날의 숲이나, 해가 지는 강가, 초원 가득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밭 같은 건 아름다웠지만. 세상이 지닌 타고난 아름다움을 좀먹는 존재가 너무나 많았다.
인간.
남자는 인간이라면 전부 제 ‘친구’ 같을 줄 알았다. 하지만 똑같이 두 팔과 두 다리를 달고 있다고 해서 내면까지 같을 수 없다는 건 협곡을 떠난 첫날 알 수 있었다.
세상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힘을 가진 자들은 더 큰 힘을 갖고 싶어 했고, 나약한 자들은 나날이 가난해져갔다. 인간들이 일으킨 전쟁, 악의, 음모, 탐욕 그 모든 것들이 끝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고도 자신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문제가 일어나면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바라면서도,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지 않고 눈치만 봤다. 그러다 사건이 해결되고, 원흉의 머리가 성문 높이 내걸리면 모두가 그 일에 제 덕이 있는 것처럼 목청을 높였다. 그리고 또 뒤돌아서면 죄를 지었다.
‘너는 왜 이런 자들을 구원하는 거지?’
어느 날, 그 한심한 반복에 이골이 난 남자가 물었다. 세상을 알 만큼 알아버린 그의 눈에 더 이상 지상은 처음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친구’가 이딴 멍청한 것들을 위해 수고를 감수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친구’는 한 치의 망설임도 묻어나지 않는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사랑?’
‘응. 사랑.’
사랑에 빠지면, 뭐든 귀엽고 예쁘게만 보이거든.
그런 말을 하며, 그녀가 웃었다. 자신이 지켜낸 세상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멍청한 것들이라며 차갑게 비웃던 그와는 사뭇 다른 시선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아, ‘친구’에게 들은 세상이 아름다웠던 이유는 이곳이 정말 낙원이라서가 아니라, 그녀가 저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구나.
그녀는 세상을 바라보던 것과 같은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마저 덧붙였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그 미소는 오래도록 남자의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지는 저녁놀, 산들바람이 불던 언덕, 주홍빛으로 물든 세상, 너와 나.
그곳에서 ‘친구’는 그에게 처음으로 사랑의 존재에 대해 알려주었다.
남자는 그전까지는 감정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그것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정의를 내리는 게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처음으로 감정의 실존을 인정했다.
각성은 벼락같았다. 감정의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 그는 바다에 떠밀린 사람처럼 그곳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사랑.
무언가를 아끼고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남자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이 엄청난 변화를 ‘친구’에게 알리고 싶었다.
너는 내가 아직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것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게 뭔지 알 것 같다고. 사실은 더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해일처럼 밀려드는 사랑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태어나 처음으로 통증을 느끼곤 그곳을 부여잡았다.
‘가슴이 이상해.’
‘어떤데?’
‘뻐근하고 아파. 눈물이 날 것 같아.’
‘축하해. ■■■■’
그가 아프다고 하는데, ‘친구’는 도리어 기뻐했다.
‘너에게도 드디어 감정이 생겼구나.’
그는 그렇게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과 가까워졌다.
세상을 구하느라 ‘친구’는 부단히도 애를 썼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제힘을 쏟아부었다.
‘친구’는 마법사지만 검술에도 능했다.
그녀가 휘두르는 검에서는 세상에서 본 적 없는 찬란한 빛이 쏟아졌으며, 그 궤적은 언제나 정의로웠다.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그녀를 상처 입힐 수도, 더럽힐 수도 없었다.
그녀는 그렇게 홀로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함께 용을 무찌르고, 저주에 걸린 공주를 구하고, 지상을 잿더미로 만들려는 마녀를 해치웠다. 아무리 강한 적이라도, 아무리 별것 아닌 일이라도 ‘친구’는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매번, 최선을 다해 사람들을 구원했다.
구원. 전쟁. 구원. 전쟁. 같은 이유로 멈춰 서는 세상은 꼭 고쳐도 고쳐도 고장나고야마는 시계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기분이 나빠.’
‘무엇 때문에?’
‘저 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잖아.’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니?’
‘……음식을 구해주고 싶어. 더 이상 밥을 굶지 않게.’
‘그건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동정심이라고 하는 거야.’
언제나, ‘친구’와 함께였으니까.
‘동정심?’
‘누군가의 처지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거.’
남자는 ‘친구’와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조금씩 감정을 배워갔다. 오랫동안 한곳에 머무르느라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이 조금씩 깎여나가 제 형태를 찾아가는 보석처럼 모양을 갖췄다.
변해가는 그와 세상을 이어주는 건 언제나 그녀였다.
‘축하해. 드디어 나 이외의 타인에게도 감정을 느끼게 되었네.’
처음 어린아이를 보며, 불쌍함을 느꼈을 때.
‘친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환하게 웃는 그 미소가 남자의 눈에는 성검의 빛보다도 더 찬란했다.
그토록 환하게 웃으며, 그녀는 때때로 아픈 말을 했다.
‘곧 나 말고 다른 친구도 만들 수 있을 거야.’
‘친구’는 영원히 그의 곁에 있어 줄 것처럼 굴다가도 한편으로는 영영 떠나버릴 사람처럼 굴었다.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를 찾아와 빛을 알려주고, 감정을 주었으면서, 자신이 손수 빚어낸 남자의 존재를 가지려 들지 않았다.
‘다음에는 새 친구를 사귀는 법을 알려줄게.’
‘……나는 다른 친구는 필요 없는데.’
‘하지만, ■■■■’
‘남자’는 언제나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이제 굶어 죽어가는 아이를 보며 가엾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었지만, 아끼고 귀중하게 생각하고 싶은 사람은 ‘친구’가 유일했다.
만약 협곡을 찾아온 게 그녀가 아닌 다른 누구였다면, 그는 두 팔과 두 다리를 얻어 바깥으로 기어 나올 생각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마법사라서. 그녀라서.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는 그곳에 존재하는 거였다.
‘나는 언젠가 사라지잖아.’
그 사실을 그녀만 몰랐다.
‘그때 네 곁을 채워줄 사람들이 필요해. 네가 혼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남자는 그 배려가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그에게 다른 ‘친구’ 따윈 필요 없었다. 남자가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보러 와주던 다정한 마법사 하나뿐이었다.
그 당연한 진리를 몰라주는 그녀가 미웠다.
‘틀렸어.’
그래서 남자는 처음으로, ‘친구’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내 곁에 수천, 수만 명이 남아도. 네가 없으면 그저 외톨이일 뿐이야.’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그 또한 함께 사라지고 싶었다. 그조차 못한다면, 그녀를 처음 만났던 협곡으로 돌아가 홀로 썩어 들고 싶었다.
너와 함께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홀로 죽는 게 수 천배 나았다.
그 사랑이 너무 깊고 짙어서, 남자는 하루에도 수십 번은 제 마음에 깊이 처박혀 익사할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친구’마저 자신을 버리고 떠날 것처럼 구니,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었다. 도저히.
‘사랑해.’
이 지독한 마음에 그녀도 함께 빠트리지 않고서는.
마법사에게 바짝 다가선 드래곤이 커다란 몸을 굽혀 이마를 맞댔다. 그저 흉내만 내어 온기가 없는 몸과 따스한 열을 품은 몸이 살며시 겹쳤다.
아, 사랑은 이토록 따스한 것이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남자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살갗 너머로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체온을 따라 제 몸의 온도를 높였다.
사랑해. 사랑하고 있었어.
네가 처음 그 말을 알려준 그때부터. 아니, 그보다 더 전부터. 이 몸에 두 팔과 다리가 돋아나던 그때부터. 아니, 어쩌면.
……네가 협곡에 처음 나타났던 그 순간부터.
그리고 이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감정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네가 알려준 사랑이니까.
봇물 터지듯 진심을 쏟아낸 남자가 눈을 떴다. 다시 불이 켜진 시야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이 비쳤다. 투명한 눈물이 아롱지는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남자가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했다.
‘내가, 너를 사랑해도 될까?’
‘……!’
그에 여인의 눈에서 기어코 보석 같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숨이 막힐 정도로 열렬한 고백에 대한 답은 짙은 입맞춤이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영원히, 둘이서 함께 하게 될 테니까.
……마지막까지.
‘정말 여기여도 괜찮겠어?’
‘응!’
첫 입맞춤을 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세상을 등지고 함께 떠났다. 남자는 어딘가 한적하고 아름다운 산이나 바닷가에 터를 잡으려 했지만, 그녀가 선택한 건 그들이 처음 만났던 검은 협곡이었다.
‘나는 여기가 마음에 들어.’
네 고향이잖아.
탐탁지 않은 그와는 달리, 그녀는 진심으로 그곳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마법사는 자신이 좋아하는 꽃 한 송이 나지 않는 황폐한 협곡을 따스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언젠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던 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네가 태어난 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났으면 좋겠어.’
마법사와 인간 흉내를 내는 드래곤 사이에서는 두 아이가 태어났다. 첫째는 엄마를 닮아 예쁘고 착한 딸이었고, 둘째는 유난히 눈이 맑고 씩씩한 아들이었다.
감히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녀와 함께 협곡으로 돌아온 이후,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에는 매일이 그러했다.
‘우리 아기들. 내일도 재미있게 놀려면 이만 가서 자야겠지?’
‘네에.’
‘녜!’
시간이 흐를수록, 드래곤은 그 생활을 사랑했다.
남자가 태어난 협곡은 황량했지만, 그렇기에 그가 싫어하던 것들도 없었다.
그곳에는 전쟁도 없었고,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없었으며, 더러운 탐욕이나 음모도 없었고, 영웅의 명예를 시기 질투하는 사람도 없었다.
존재하는 거라곤 협곡을 가로지르는 칼바람과 그가 사랑하는 가족뿐.
누구도 그들을 방해할 수도, 그들도 누군가를 신경 쓸 필요 없는 완벽한 보금자리였다.
다행히 아이들도 협곡의 생활을 좋아했다. 모두가 행복했다. 남자도, 딸도, 아들도.
‘세상이 너무 어지러워졌어.’
오로지 단 한 사람.
그녀를 제외하고.
협곡에 완벽하게 적응한 가족들과는 달리,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들이 없어도 세상은 평소와 똑같이 굴러갔다. 강한 자는 더 강해지고 싶어 했고, 약한지는 나날이 가난해져 갔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 이상 전쟁과 구원을 반복하는 어리석은 소모전을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오로지 전쟁.
구원하는 자를 잃은 세상은 나날이 파멸에 가까워져 갔다. 세상이 병들고 부서질 때마다 옷장 깊숙이 숨겨둔 성검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나 때문이야.’
그녀는 성물의 절규를 외면하지 못했다.
‘더 늦기 전에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리하여, 구원의 운명을 하사받은 영웅은 마침내 찾은 보금자리를 두고 떠나기로 했다. 남자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으로, 화를 냈다. 떠나지 말라고. 우리를 두고 가지 말아 달라고. 우리보다 저깟 세상이 더 소중하냐고.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됐다.
도대체 왜 세상을 구원하는 게 그녀여야 하는지.
대체 왜 그녀여야 하는지…….
마법사는 그렇게 절규하는 협곡의 드래곤을 꼭 안아주었다. 이마를 맞대었다. 이제는 언제나 같은 체온인 두 살갗이 부드럽게 맞붙었다. 눈을 감은 그녀가 속삭인다.
‘지금 막지 않으면, 언젠가 저 재앙이 이곳까지 닥칠 거야.’
자신이 떠나는 건, 당신보다 저 밖의 인간들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그 목소리에 서린 결연한 각오에, 남자는 탄식했다. 아, 너의 결심을 되돌리기에는 힘들겠구나. 마지못해 현실을 받아들인 드래곤이 떠나는 마법사의 두 손을 꼭 맞잡으며 당부했다.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약속할게. 반드시 집으로 돌아올게.’
마법사는 그 약속을 받아들였다.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든 우리 가족이 있는 이 협곡으로 돌아오겠다고.
‘걱정 마. ■■■■’
그러면서 확신했다.
‘신께서 우릴 굽어 살펴 주실 거야.’
하지만 네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그 신은 우리를 살펴 주지 않았다.
‘아빠.’
그녀가 떠난 뒤 다시 돌아온 겨울.
언제나 두세 번은 깨워야 일어나던 에델이 웬일로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찍 일어나 있었다. 부모의 인기척을 찾아 토닥토닥 달려오는 발소리가 사랑스러워 미소를 짓던 아침이었다.
‘에델…? 왜 혼자 오니? 누나는 아직-.’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빠. 누나가…….’
그녀가 집을 비운 겨울.
여느 때와 같은 아침.
……네가 영영 눈을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