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83
282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해낸 건 언제나 마법사였다. 세상을 구원하려 애쓰는 사람도, 협곡에 못 박혀 있던 남자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것도, 감정을 가르쳐 준 것도, 다시 혼란에 휩싸인 세상을 구한 것도 전부 그녀가 한 일이었다.
신은 그저 알량한 권능이 담긴 검 한 자루만 내어주며 세상을 수호하라 종용할 뿐이다.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소용돌이치며 한데 뭉친 구름을 뚫고 한 줄기 빛기둥이 정확하게 마법사를 비췄다. 쿠르릉. 먹구름이 당장이라도 그녀의 머리통을 후려갈길 것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남자는 곧장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신이 그녀를 부르고 있다.
금기를 범한 인간을 신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남자가 마법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벽이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남자의 손이 허공을 짚었다. 남자는 그 순간 알았다. 다시는 마법사와 닿을 수 없다는 걸.
그 순간, 남자는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그의 형상이 흩어지며 새카만 기운이 남자와 마법사 사이를 가로막는 벽을 후려쳤다. 내려치고, 벽을 긁어내린다. 휘몰아치는 거센 기운과는 별개로, 남자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마법사는 그에게 그만두라고 말했다. 이건 옳지 않은 일이라고. 그런데 왜 그녀가……?
남자는 침착하게 이유를 물었다. 마법사가 그만두라고 이야기했더라면, 그는 그만두었을 것이다. 비록 죽은 딸을 차가운 땅 밑에 묻지는 못하더라도 그녀가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를 바라보던 마법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야속한 벽에 가로막혀 들리지 않았다.
마법사를 가로지르는 균열이 한층 깊어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죄는 내가 지었잖아.’
인간의 형상을 뚫고 나온 드래곤의 기운이 방금 전보다 더 사나운 기세로 벽을 두드렸다. 무서운 기세로 폭발한 저주가 신의 장벽에 균열을 일으켰다. 형용할 수 없이 많은 감정이 남자의 가슴속에서 요동쳤다. 어디로 흐르지 못하고 한 곳에 고인 감정이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남자는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고 싶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저 이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네가…?’
그의 의문은 타당했다.
마법사는 죄가 없었다. 죄는 그가 지었다. 딸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것도, 그 아이를 되살리려 한 것도 전부 남자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금기를 범한 사람은 마법사가 아니라 드래곤이다.
그러니 벌도 남자가 받아야 했다.
남자는 신이 너무나 어리석은 나머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벽 너머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법사가 벽을 짚고 있는 남자의 손 위로 제 손을 겹쳤다.
그리고 손끝부터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했다.
부스러진 육체는 산란하는 빛의 입자가 되어 바람과 함께 흩날렸다.
아-. 남자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그 뒤로 잠시, 의식이 끊어졌다.
쿵-. 쿵-. 쿵-. 쿵-.
멀리서부터 무언가를 두드리는 육중한 소리가 가까워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주먹으로 미친 듯이 벽을 내려치는 중이었다. 쉬지 않고 휘두른 주먹은 부스러지고 깨져 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
남자는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통제하지 못하는 것들이 자꾸만 터져 나왔다. 마법사로부터 수많은 감정들을 배워왔지만, 그건 처음 겪는 감각이었다. 눈앞이 맑아졌다 흐려지길 반복했다. 시야가 다시 깨끗해질 때마다 마법사가 한 움큼씩 사라져 갔다.
사라지는 그녀를 지켜보는 일은 괴로운 고통을 동반하는 일이었지만, 그녀로부터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게 또 하나 늘어났다.
마법사가 웃고 있었다. 부서져 사라지고 있는 건 본인이면서, 마치 영원히 그의 곁에 남아있을 것처럼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가 또 입술을 달싹였다. 여전히 알 수 없는 말. 하지만 남자는 뭐라도 대답해야겠다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는 처음 듣는 감정이 쏟아져 나왔다.
그 짧은 대화를 끝으로 빛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남자를 바라보던 따뜻한 시선도, 아름다운 미소도, 그가 반했던 찬란한 영혼도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녀였을, 그녀였던 빛의 입자들만 그 자리에 남아 흩날렸다.
그 광경이 남자의 눈에는 꼭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리게 보였다.
그때, 남자는 제 안에서 무언가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대지가 무너지고 결락되어 가고 있었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어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만이 남았다.
‘……뜨거워.’
그것에 대한 첫인상은 참을 수 없는 작열감.
‘심장이 뜨거워. 불이 붙은 것 같아. 괴로워….’
그리고 고통이었다.
이 감정의 이름이 뭐야?
괴로운 표정으로 가슴을 쥐어뜯은 남자가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제 그에게 감정을 가르쳐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마법사의 이름을 담으려던 입술이 멈칫한다. 매번 매끄럽게 흘러나오던 그 이름이 거름망에 걸린 것처럼 턱 막혀 나오지 않았다. 위화감을 느낀 남자가 다시 한번 여자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이번에는 첫 마디가 나오기도 전에 입술이 멈췄다.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 이름이, 뭐였지?
남자가 손끝으로 제 입을 더듬었다. 이상했다. 마법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여기 있었는데, 소리 내어 불렀는데. 그 이름이 쓰였던 자리만 검게 그을린 채였다.
그의 머릿속에 내려앉은 그을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남자의 안에 남아있는 마법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녀가 지어 준 남자의 이름, 그녀가 알려 준 감정들, 그녀의 미소, 그녀의 체온, 그녀가 남자에게 주었던 모든 것들이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라져 가는 건 남자의 기억뿐만이 아니었다.
사라지는 건 마법사가 지상에 남긴 모든 것이었다. 오랫동안 존경 받는 영웅으로서 쌓아 올린 그녀의 명예와 영광이 숨겨져야 하는 치부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온 세상이, 마법사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잔인한 신의 질서가 금기를 범한 죄인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있었다.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인 망각이 기어이 마법사의 얼굴조차 뒤덮었다.
이제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녀와 함께한 기억들이 이토록 선명한데, 그녀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네가 또 사라졌다.
완벽한 상실을 인지한 순간, 심장을 불태우는 작열이 그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 … … …!’
남자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사나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마법사를 안아주기 위해 존재했던 두 팔이 사라지고, 그녀에게 가기 위해 돋아났던 두 다리가 사라지고, 그녀를 안기 위해 존재했던 몸이 형체를 잃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를 지배했다. 남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 흐름에 스스로를 맡겼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감정은 폭풍을 닮아 있었다.
다시 드래곤으로 돌아간 남자가 고통스럽게 몸을 웅크렸다.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생애 처음으로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누군가가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내키는 대로 부수고 빼앗고 싶었다.
그건 그의 태생과 가장 알맞은 욕망이었다.
이리저리 일그러지던 어둠이 다시 형체를 갖추었다.
이제 그에게 부드러운 두 팔과 다리는 필요 없었다. 하나라도 더 파괴할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한 치라도 더 멀리 저주를 흩뿌릴 수 있는 두 날개면 충분했다.
울룩불룩 형체를 뒤튼 저주가 주변을 날카롭게 할퀴었다. 그것이 해치지 않은 건 나란히 잠들어 있는 두 아이뿐이었다.
정신을 깨우는 소란에 소녀의 눈꺼풀이 떨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굳게 닫혀 있던 눈을 뜬다.
아이가 깨어나 가장 먼저 본 광경은 검게 물든 하늘이었다. 혼몽한 시선이 제 부모를 찾아 옆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아이의 눈과 흉포한 짐승이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재앙이 협곡을 부수며 날아올랐다.
온 하늘을 뒤덮을 듯 날개를 펼쳐낸 남자는 멀리 떠나갔다.
그날, 지상에는 기록으로도 남길 수 없이 끔찍한 재앙이 떨어졌다.
서쪽 하늘에서 날아오른 저주가 하늘을 뒤덮자, 살아 숨 쉬는 인간의 3할이 목숨을 잃었다.
해일처럼 덮쳐온 저주는 아주 오랜 시간 하늘을 지배했다. 세상에는 다시 어둠과 절망이 내려앉았고, 전쟁과 기아, 저주와 죽음으로 얼룩졌다. 수없이 많은 것을 파괴하고 빼앗았음에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무엇을 부숴도.
무엇을 빼앗아도.
그의 공허는 채워지지 않고 커져만 갔다.
그리하여 빛이 있었다.
보다 못한 신이 세상에 은총을 내리니, 대륙 곳곳에서 어둠을 물리치겠다는 영웅들이 하나둘 검을 들었다.
수십의 영웅과 남자 하나와의 싸움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수백의 밤과 수백의 낮. 끝없이 이어지던 전쟁의 끝에, 남자의 영혼은 가증스러운 신의 검 앞에 산산이 부서졌다.
조각난 그의 영혼이 보랏빛 하늘에 궤적을 그리며 흩어질 때.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지어준 이름을 잃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압도적인 재앙에 매료된 이들은 남자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서쪽 하늘을 검게 물들이는 진정한 심판자.
위선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불길한 새벽의 별.
안타레스라고.
그리고 다시 수백 년.
산산이 흩어졌던 남자의 영혼은 마침내 한곳에 모여 깨어났다.
그가 마법사로부터 배운 감정은 신의 농간 아래 흐려지고 지워져 사라져 버렸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그 감정만큼은 그대로였다.
남자는 이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증오.
그의 증오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