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205
204화. 그날의 동경
에피소드 26.
정말 지나치게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싱숭생숭해지는 건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요 며칠간 우중충-이틀 전에는 눈이 왔고 어제는 비가 내렸다-하던 하늘이 거짓말인 것처럼 맑아진 건 행사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아주 좋은 일이지만, 여러 변수를 눈앞에 두고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몹시 슬픈 일이다.
차라리 거무죽죽했던 하늘이 기상청을 무시하고 오늘 함박눈이라도 내려줬다면, 행사를 뒤로 미뤄서 약간의 유예 시간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물론 풍월주는 날씨가 나빠서 날짜가 바뀌거나 행사 장소가 바뀌는 것도 전부 예상해서 계획을 세울 위인이긴 하지만….’
마음의 안정이란 게 중요한 거다. 겨울을 맞아 새로 마련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잔 탓에 부스스해진 머리칼을 손빗으로 대충 정리하면서 달력을 노려봤다.
12월 10일 금요일. 오늘은 협회가 주관하는 대형 행사 중 하나인 창립기념 행사가 있는 날이며, 동시에 풍월주 측의 공격이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날이다.
‘문제가 생길 걸 아는데,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니. 이틀 내내 바짝 긴장하는 수밖에.’
하루만 열리는 행사였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졸이진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협회의 창립기념 행사는 이틀간 이어지는 행사다.
첫날에는 활기찬 축제 형태로 진행되며 많은 일반인을 협회 앞마당과 행사장으로 쓰이는 공터까지 들인다. 이튿날에는 다소 엄숙한 분위기로 협회원들만 모여서 기자회견의 형태로 진행되어 각종 방송 장비와 약간의 방송국 직원들만이 협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보안 총책임자로서 양일을 똑같이 신경 써야겠지만, 아무래도 일반인이 들어오는 첫날에 더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방송 관계자들은 저마다 호신용품 정도는 협회 올 때 들고 오는데, 일반인들은 그게 아니라서 일이 터지면 정말 걷잡을 수가 없으니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지만….’
이뤄지지 않을 소망을 기도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지. 창문을 활짝 열고 찬바람으로 환기를 시키며 기지개를 쭉 켰다. 행사 내내 사상자가 없도록 힘을 낼 시간이다.
* * *
이른 새벽부터 출근해서 각종 내부 보안 설비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고송찬 씨가 맡은 야외 보안팀과도 숨 가쁜 대화를 하며 확인 절차를 거쳤다.
어제까지 비가 와서 방수 문제로 고심이 많았던 기술부는 추가 일감이 없다는 사실에 환호했으며, 야외 보안팀은 날이 맑은 덕분에 예상 인원보다 많은 수가 행사장에 방문한다는 소식에 절망했다.
그 사이에서 팀장인 고송찬 씨는 이틀 전에 심란한 말을 들어서 반쯤 정신을 빼놓고 있을 줄 알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빠릿빠릿하게 보고도 잘했고 팀원을 부리는 일도 잘했다.
‘정작 내가 뒤숭숭해서 문제지.’
이제 입장을 시작한다는 고송찬의 현장 상황 보고를 들으면서 마우스를 딸깍였다. 순식간에 수많은 화면들이 각도를 바꿔가며 협회 내부와 앞마당 곳곳을 비췄다.
“우와….”
이어폰을 끼지 않은 반대편 귀로 자그마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어깨를 움칫했다가 긴장을 풀었다.
여긴 나와 신여월 협회장, 그리고 유사시에 출입을 허가받는 진예신 부협회장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없는 협회 최고 보안실이라 다른 이가 있는 게 어색했던 탓이다.
내가 직접 오늘을 위해 데려온 인재인데 놀랐다는 점이 사소한 문제지만, 나도 모르게 공격을 했다거나 긴급 버튼을 누른 게 아니니까 아무래도 괜찮지 않나.
감탄하다 말고 움찔한 날 약하게 흘겨보는 이진아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러자 이진아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비죽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지금 저 엄청 상처받았어요! 오빠가 도와달라고 해서 온 건데, 방금 나 있는 줄 몰라서 깜짝 놀란 거죠? 그죠?”
“그런 거 아냐. 내가 모셔 왔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닌데…. 분명 어깨 움찔하는 거 다 봤는데….”
이실직고? 난 놀란 적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린가. 남을 속이려면 나도 같이 속아야 하는 법.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어깨를 으쓱거리자 이진아의 눈매가 더 가늘어졌다.
의심을 지우지 못한 얼굴을 한 채로 투덜거리듯 중얼거리는 이진아의 눈초리를 받아내며 내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어제도 말했지만, 거창한 부탁을 하는 건 아냐. 여기, 지금 보이는 이 부근하고 정문 부근, 그리고 행사장 입구 쪽을 같이 봐주면 돼.”
“으음…. 도움이 될 수 있다곤 했지만, 저 사실 화면 너머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잘 못 볼지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이상한 소리를 하네. 진아, 네가 못 볼 리가 없잖아.”
이진아에게 한결같이 헌신적인 물방울의 여름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아낌없이 이진아에게 베푸는 성향이다. 즉, 이진아가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마석의 힘이 그걸 방해할 정도로 뛰어난 눈을 이미 줬다는 얘기다.
마석과의 동화는 주의해야 하는 부분이라 살짝 걱정되기는 한데, 온·오프가 될 수만 있다면야 나쁘지 않은 능력이니 이 길로 끌어들인 게 나인만큼 확실하게 가르쳐줘야지.
여하간 이진아의 능력이 정보 수집에 특화된 것처럼 그의 마석과 동화된 눈도 연관된 능력이 생겼는데, 그게 바로 ‘진실을 꿰뚫는 눈’이다.
좀 더 동화가 이루어지면 어떻게 변할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재까지는 기계 너머의 환각까지도 가볍게 꿰뚫어 본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고 한다.
정작 이진아는 아직 활용해보지 못해서 이렇게 자신감이 없는데, 여름밤의 물방울과 봄이 확신했으니 잘 해낼 거다.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막 잘 될 거 같고 그러네요!”
이진아의 몫으로 가져온 의자지만 보안실의 화면을 수월하게 볼 수 있도록 약간 높은 것으로 챙겨와서 그런지 이진아는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동당동당 흔들면서 웃었다.
긴장으로 굳어서 제 실력을 못 내는 것보다는 웃는 게 훨씬 나았기에 나도 같이 작게 웃어주자 이진아가 자신감을 회복했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신발을 벗고, 의자 위로 올라섰다.
“그럼 해볼게요! 여름밤, 도와줄 수 있지?”
주인의 말에 화답한 마석이 밝게 빛나며 이진아의 왼손을 푸르게 물들였다. 본래 옅은 하늘빛이던 색상이 저만큼 진해졌다는 건, 그만큼 순간적으로 모으는 아이온의 양이 늘었다는 뜻이고, 그건 이진아가 꾸준하게 실력을 갈고닦았다는 것과도 동의어다.
일전에 능력을 쓰는 것을 봤을 때 많이 늘었다고 칭찬을 해주지 못했으니, 오늘 일이 끝나면 맛있는 거라도 사서 먹이고 칭찬을 잔뜩 해야겠다.
“음, 으음…. 여기는 똑같은 거 같고… 입구는, 저건 협회의 보안 시설이죠? 커다란 돌멩이 같은 게 있는데.”
“정문에서 보이는 돌은 결계로 감싸여 있는 걸 말하는 거지? 그건 괜찮아. 새벽에 점검을 마친 상태거든. 그거 말고는 정문에 이상한 건 없고?”
“네, 없어요. 그냥 깨끗해요. 아, 낙서? 그런 거 하나 있어요.”
낙서라니? 결계 확인하러 갔을 때 난 아무것도 못 봤는데. 고작 두어 시간 지났는데 그사이에 생겼을 리가….
내가 인상을 찌푸리기가 무섭게 이진아가 자신이 본 낙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되게 알록달록해요. 물감으로 아무렇게나 발라놓은 거 같은데, 으응? 아이온 물감이라고? 그런 것도 있어? 아, 아아, 그래? 그런 건 처음 들어, 으응, 그대로 전달할게.”
아이온 물감이라는 건 나도 처음 들어보는데. 아이온을 향수로도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니까 못 만들 것도 없겠지만, 아이온을 볼 수 있는 건 감응자 밖에 없는데 그게 얼마나 쓸모가 있을까 싶다.
이진아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내게 설명하는 도중에 마석이 말을 걸어서 대화를 나누고 있나 본데, 물방울의 여름밤이 내게 뭔가를 전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이다.
전달하겠다는 말 이후로도 재잘재잘 자신의 마석과 꽤 열심히 대화를 나눈 이진아가 맑게 갠 하늘과 같은 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여름밤이 그러는데요, 아이온 물감이라는 건 애들끼리 부르는 건데 여러 사람의 아이온을 조금씩 뽑아낸 걸 말하는 거래요. 그걸 물감처럼 섞어서, 제일 아래에 칠한 다음에 아이온이 안 느껴지게 하는 가루? 같은 걸 뿌린대요. 그렇게 하면 낙서 같이 만들어지는데, 감응자는 못 보고, 일반 사람들은 특별한 조건이 갖춰지면 볼 수 있대요.”
그 말에 떠오른 것은 풍월주가 대피소에 그려뒀던 파랑새 그림이다. 분명 감응자들은 볼 수 없었고, 동행했던 일반인들만이 그걸 봤었다.
그것과 똑같은 게 현재 정문에 그려져 있다면, 그리고 이진아가 그것을 알아봤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뭔지 알겠어. 본 적 있는 거야. 일단 진아야, 내가 말한 구역 말고 나머지 부분도 봐줬으면 좋겠다. 여기 이걸 누르면 화면이 변하니까 전부 확인해줘. 난 잠시 연락을 좀 할게.”
“네! 맡겨주세요!”
“그래, 부탁할게. 할 일 별로 없다고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돼서 미안해.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
“오빠한테 도움이 된다면 좋은걸요! 그리고 맛있는 거라면…, 음, 오늘은 야채가 잔뜩 들어간 바게트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요.”
“오케이, 접수. 제일 맛있는 데에서 사줄게.”
야무지게 자신이 원하는 걸 밝히는 이진아에게 간단하게 손가락으로 오케이 표시를 하며 대답해주자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에게 어울리는 해맑은 미소에 아주 약간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그 상태로 빠르게 사적으로 쓰는 휴대폰을 켜서 윤혜아의 번호를 찾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밖으론 공개하지 않는 핫라인이다. 송신음이 한 번 울리자마자 윤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로 뭘 들고 가면 될까?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알고 던지는 질문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을 잘 봤단 소리지, 내가.
“전에 개인적으로 만드신다고 했던 고글, 완성되셨습니까?”
함께 용궁에 갔던 강나비에게서 자초지종을 듣더니 의욕에 불타서 풍월주의 파랑새 그림을 알아보는 수단을 마련하겠다고 했던 윤혜아다.
바쁜 와중에도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넌지시 말해줬고, 윤혜아의 속도라면 충분히 완성됐을 거란 계산이 섰기에 물어봤다.
-시제품은 뽑았지. 벌써 사용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디야?
과연 윤혜아. 세계가 탐내는 학자이자 기술자다운 당당한 답이다.
“정문입니다. 중앙보다 조금 위쪽에 낙서처럼 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울 수 있는지 확인해보시고, 만약 안 될 것 같으시면,”
-이걸로 다시 연락할게. 바로 가면 되지?
“바쁘실 텐데 죄송하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해주십시오.”
-물론이지. 그럼 이따 연락할게.
뚝 끊긴 전화를 붙잡고 이번엔 다른 이의 연락처를 찾아 스크롤을 내렸다. 풍월주에게 내가 모르는 부하들이 있다면, 나 역시 풍월주가 모르는 패들을 쥐고 있다.
하나씩 천천히 차분하게, 오늘 서로 패를 한번 뒤집어 보자고. 풍월주가 얼마나 오늘을 고대했는지는 몰라도 난 이 행사를 망칠 생각이 전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