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302
301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나.”
그녀를 내려다본 신이 물었다. 기묘한 기시감이 세라를 감싸 안았다. 근엄하고 쌀쌀맞은 그 말은 지난 300년간 세라가 재판장에 설 때마다 들었던 질문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는 그 말에, 지상에서의 1년이 전부 한바탕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건, 세라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첫마디도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저를 처음 지상에 올려 보내실 때-.”
세라는 망설이지 않고 말문을 열었다.
“왜 제게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지 않으셨어요?”
그건,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던 의문이었다. 신이 애초에 남자의 존재를 일러 주고 그를 죽이라고 말해 주었다면, 세라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가시를 통해 원하는 힘을 모조리 모으기 전에 더 쉽게 일을 끝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은 그러지 않았고, 세라는 다가올 재앙은 새카맣게 모른 채 비틀린 운명을 되돌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했다.
엄청난 비효율이었다.
혹시 그마저도 세라의 운명이었던 걸까?
“운명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그저-.”
그녀의 생각을 읽은 듯이, 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누군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지.”
그가 세라에게 남자의 존재를 알려 주지 않은 이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유였다. 약속. 신도 그런 걸 하나. 세라의 의문이 채 끝까지 이어지기도 전에 신이 말을 이었다.
“오래전, 자신의 목숨을 바쳐 기도를 올린 자가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내려 달라는 소원이었지.”
“…….”
“나는 약속에 따라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를 내려 주었을 뿐이다.”
말을 마친 신이 세라에게 의도적으로 오래 시선을 두었다.
그 약속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다는 듯이.
세라는 신에게 그런 기도를 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외에 달리 하고 싶은 말은?”
한 번 질문했으니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은 의외로 너그럽게 다음을 물었다. 세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냉큼 마음에 걸리던 문제를 털어놓았다.
“진의 눈 좀 고쳐 주세요.”
그녀를 구하기 위해 검은 책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잃어버린 노을빛 눈동자. 세라는 제 친구에게 그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 정도는 봐주도록 하지.”
신은 싱거울 정도로 쉽게 세라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흔쾌한 태도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너그러운 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또?’ 하고 되물었다.
“…….”
꼭 기다리는 질문이 따로 있는 것 같은 태도다. 전능한 신은 네가 진짜로 물어보고 싶은 건 이런 게 아니지 않느냐는 눈으로 그녀를 꿰뚫어 보았다. 더 이상 회피할 곳이 없어진 세라는 결국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말을 밖으로 내뱉었다.
“……에녹은, 어떻게 됐나요?”
세라는 영웅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죄인들에게 지옥이 있는 것처럼, 그들도 자신들처럼 환생을 하는지. 아니면 선한 자들만 갈 수 있는 천국에 머무르며 평화롭게 영원을 사는지. 혹은 그런 거 없이 영영 잠들어 버리는 것인지.
한낱 인간에게 알려 주기엔 깊은 비밀이라 알려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내심 단념하고 있었는데, 신은 의외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술술 답해 주었다.
“에녹 소서는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해 주었다. 그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환생의 길에 올랐다.”
그리고 에녹은 살아생전 죄를 지은 적이 없으니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나 평생 평안한 삶을 살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에 세라가 할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래요.”
잘됐네요.
안도의 숨을 내쉰 세라가 비로소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괴롭지 않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더 할 말이 있나?”
“아니요. 없습니다.”
세라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정말로 없느냐?’ 신이 재차 용건을 물었으나 그녀는 더 이상 제 삶에 남은 미련이 없었다.
없습니다. 진짜로요. 세라가 몇 번이고 힘주어 강조하자 신이 비로소 물러났다.
“그럼 판결을 내리겠다.”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직감한 신이 재판을 재개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어디선가 날아온 판결문이 신의 앞에 다소곳이 내려앉았다. 너그러움을 버리고, 다시 냉엄한 심판자의 가면을 쓴 신이 판결문을 읽어 내렸다.
“세라 로젠바움. 너는 살아생전 흑마법을 이용해 전쟁을 일삼고, 사람들의 운명을 비트는 큰 죄를 지었다.”
“…….”
“그러나, 300년간 불지옥을 견디며 충분히 반성하였고, 남은 형량을 스스로 청산하여 지상의 평화를 수호했다.”
판결문을 낭독하던 신이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황금으로 만들어진 판결봉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300년간 이어진 재판이 드디어 결론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중요한 대목을 앞둔 세라가 숨죽여 신의 판결을 기다렸다. 한동안 뜸을 들인 신이 적당한 시기에 낭독을 재개했다.
“하여, 이 순간부터 모든 죄를 사하고, 세라 로젠바움에게 환생을 허락한다.”
판결을 내린 신이 판결봉을 직접 쥐어 심판대를 세 번 두드렸다.
탕. 탕. 탕….
그가 판결봉을 내려칠 때마다 세라가 딛고 선 바닥이 뒤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세라의 눈앞으로 어디로 통하는지 알 수 없는 새카만 문이 하나 쑤욱, 솟아났다.
“그 문을 건너면, 이전의 기억은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다.”
그토록 바라던 환생의 문이었다. 고생했던 세월만큼, 환생을 하게 된다면 감격의 눈물이라도 줄줄 흘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음은 고요했다. 세라는 무엇도 예측할 수 없는 새카만 어둠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신을 향해 깍듯이 허리 굽혀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작게 중얼거린 그녀가 지체없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거리를 좁힌 그녀가 환생의 문으로 들어가기 직전.
“원한다면.”
신이 돌연 말로 그녀를 붙잡았다. 아직도 그녀에게 용건이 남은 눈치였다. 멈춰 선 세라가 그를 올려다보자, 신이 마저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다음 생에 에녹 소서와 만나게 해 줄 수도 있다.”
그건 감히 기대조차 하지 못했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래서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갑자기 왜 잘해 주세요?”
저거 하나 줘 놓고 또 뭐 하나 뺏어 가는 거 아니야?
그녀가 경계하는 태도로 신의 눈치를 살피자, 그가 감히 자신을 의심하는 세라가 괘씸한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일종의 포상이다. 지상의 질서를 되찾아 준 것에 대한.”
다행히 무언가의 함정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설마 마지막 순간에 와서 새로운 음모에 휩싸이는 건 아닌지 긴장했던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마음 놓고 대답할 수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린 세라가 기쁜 마음으로 그의 제안에 대한 답을 전했다.
“죄송하지만-.”
그런 선물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그 어조가 너무나 상큼해서, 신은 순간 그녀가 고맙다고 인사라도 한 줄 알았다.
“이왕 주실 거면 그런 거 말고 좀 더 실용적이고 좋은 걸로 주세요.”
그게 아니라는 건, 맹랑한 세라 로젠바움이 포상의 내용을 바꿔 달라고 말한 뒤였다. 신은 감히 자신과 흥정을 하려는 인간을 혼내 줄까 하다가, 말이라도 들어 보자는 심정으로 턱을 까딱였다.
“다른 거라니…? 어떤 걸 원하는 것이냐.”
“진짜요?! 그럼…….”
분명 그가 말하기 전까지 포상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텐데, 세라 로젠바움은 마치 생각해 둔 게 있던 것처럼 막힘없이 자신이 원하는 포상을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
세라의 말이 이어질수록 신의 표정이 구겨졌다. 어느새 싸늘해진 눈빛엔 그녀를 향한 실망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철저하게 제 잇속만 챙기는 세라 로젠바움을 두고, 신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체면이 있지, 이미 한번 주기로 한 포상을 물리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저 하찮은 것과 포상을 사이에 두고 협상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이마를 짚은 신은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종국에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알겠으니 이만 가거라!”
전능한 존재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죄인을 쫓아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불쾌해 보이는 그와는 달리, 세라는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얄미울 정도로 정중하게 인사를 남긴 그녀가 이번에야말로 문을 넘었다.
눈 부신 빛에 둘러싸인 것을 끝으로, 세라 로젠바움의 기나긴 인생이 비로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