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50
050 예나는 여우 같아요
“저한테 예나는 여우 같아요.”
“여우요?”
“네.”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예시에 잠시 멍을 때렸다. 그러자 내 표정을 읽은 강바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혹시 보셨어요?”
“아, 거기서 나오는 여우 말씀하시는 거예요?”
“응. 맞아요.”
생텍쥐페리의 .
전 세계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더 적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강바다는 여기서 등장하는 여우를 예나에 빗대어 표현한 듯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소설 속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장미가 얼마나 특별한지’ 알려주는 존재잖아요? 동시에 사랑과 책임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인연이고요.”
“그렇죠.”
“저에게는 예나가 바로 그런 존재예요.”
이야기를 듣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바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이해했기 때문이다.
“분명 여우의 대사가 ‘넌 네가 길들인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거야’였죠?”
“맞아요. 예나의 그림을 보는 순간 전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가 서로를 길들인 만큼, 그것에 대한 책임져야겠다고.”
“그래서 여우라고 하신 거군요.”
“응.”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강바다는 창밖 너머의 하늘을 바라봤다. 그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담겨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예나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자기가 하늘 씨랑 결혼할 거라면서, 나를 한 명의 경쟁자처럼 대하는 거 있죠?”
“그건 그냥 ‘정말 좋다’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을까요? 아직 유치원생인데.”
“유치원생도 알 건 다 알아요.”
순간 강바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건 농담으로라도 태클을 걸면 안 되는 듯해서, 나는 묵묵히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근데 몇 번인가 계속 만나다 보니까. 예나가 절 대하는 게 달라졌어요. 저 멀리서부터 제가 보이면 쪼르르 달려오고.”
“아, 그거 정말 기분 좋죠.”
“그쵸? 쪼그마한 게 언니, 언니, 이러면서 껌딱지처럼 달라붙는데. 그게 얼마나 귀엽게 느껴지던지. 솔직히 좀 신기했어요. 전 아이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거든요.”
“그랬어요?”
이건 좀 의외였다.
그녀는 항상 웃는 얼굴로 보육원 아이들과 놀아줬으니까. 내가 볼 때 그건 절대로 가짜 웃음이 아니었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아이들은 솔직하잖아요. 그런 점이 부럽기도 하고, 저렇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 싶어서 불안해져요.”
“그랬군요.”
아마도 후계자 수업의 영향이 아닐까. 일반적인 가정집에 비하면 해도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테니.
“그런 생각이 지금은 많이 바뀌었어요.”
“어떻게요?”
“뭐랄까 제가 조금 더 솔직해진 느낌? 예전에는 싫은 일이 있어도 어지간하면 참고 넘어갔는데, 이제는 거절할 수 있게 됐어요. 하늘 씨라면 이렇게 했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요.”
“큼···. 그건 좀 부끄럽네요.”
“후후후.”
얕게 웃음을 삼킨 강바다가 턱을 괬다.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밴 것이, 어제 이후로 뭔가 여유가 생긴 듯한 느낌이다.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미묘하게 낮았던 강바다의 자존감이 올라간 듯했으니까. 지금이 훨씬 예뻐 보인다.
“예나한테 많이 배웠죠. 세상에는 여러 가지 표현법이 있고, 때로는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이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된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번 주말에 처형이랑 식사하기로 하셨다면서요?”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죠.”
예전에는 강별이 마냥 어려웠었는데, 함께 예나의 그림을 본 이후로 사이가 급격히 좋아졌다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강별이 예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가 있다 보니, 함께 생활하기 전에 조성해야 할 환경이나 교육법 등. 배우는 것들이 많다고.
“예나를 만난 이후로 삶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어요. 하늘 씨에게 다가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예나 덕분이고요.”
“왠지 서로 역할이 바뀐 것 같은데요?”
“가끔은 그런 것 같기도 해요. 후후.”
여유롭게 농담을 받아넘기는 강바다. 그 모습에 나 역시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사실 제가 예나의 엄마 역할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되긴 해요. 물론 한동안은 유모가 같이 봐주시겠지만···.”
“그러고 보니 유모랑 같이 지낸다고 하셨죠?”
“응응. 제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봐주셔서 사실상 제 엄마나 다름없어요.”
듣자 하니 강바다의 친모는 그녀를 낳고 얼마 못 가 지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부인을 무척 사랑했던 회장님께서는 그 후로 새로운 부인을 들이지 않으셨고, 대신 그녀의 빈자리를 채워줄 유모를 고용하셨다고.
“저희 아빠가 워낙 바쁘셔서, 제가 어릴 때는 얼굴도 몇 번 못 봤거든요.”
“다른 분들은요?”
“언니랑 오빠들은 대부분 유학을 갔어요. 유모랑 단둘이 지낸 시간이 훨씬 많았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특수한 환경 때문에 입양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 자식 키우는 것도 힘든 요즘 같은 시기에 입양을 한다는 것은, 경제적인 여유를 떠나서도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다.
그런 면에서 입양한다는 결정은 강바다가 얼마만큼 예나를 아끼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래서인가 저랑 예나는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 주변 눈치를 보는 점이나,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거나.”
“저를 좋아하는 것도?”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부끄러워요?”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닌데요?”
“···나참.”
짐짓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자 강바다가 코웃음을 쳤다. 잠깐이지만 그녀의 얼굴에 자리잡았던 그늘이 사라졌다.
어이없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녀는, 한결 가벼워진 어투로 말을 이었다.
“유모가 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신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듯이. 저도 예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어요.”
“분명 그렇게 될 거예요.”
“고마워요. 어쩌다 보니 제 이야기만 또 잔뜩 늘어놨는데, 도움이 좀 됐을까요?”
“그럼요.”
새롭게 알게 된 강바다의 과거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녀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선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동시에 예나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어린 왕자의 여우 같은 존재라.
“···뭔가 감이 잡힐 듯한데.”
슥슥-
나는 곧바로 패드를 꺼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려나갔다. 지난번에 찍은 예나의 사진 위로 여우의 귀와 꼬리를 붙인다.
“···귀여워!”
흡-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는지, 강바다가 얼른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이에 나는 조용히 웃음을 삼키며 스케치를 이어나갔다.
‘베이스는 어린 왕자의 여우.’
물론 예나가 주인공이니만큼. 그녀만을 위한 서사를 준비해야겠지. 여기서는 를 참고하자.
책장에서 낡은 동화책을 발견한 예나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세월에 무뎌져 흐릿해져 가는 사람들을 다시 덧칠해주는 이야기는 어떨까.
“이거 재밌겠는데요?”
“그래요?”
“응응! 예나가 그림을 좋아하니까, 그 재능을 살린다는 컨셉도 좋고. 사람들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준다는 설정도 멋져요!”
“그럼 문제는 캐릭터인데···.”
중심 소재를 잡았으니 이제는 등장인물들을 만들어야 한다. 어떤 캐릭터를 넣어야 할까 고민하는데, 강바다가 불쑥 의견을 제시했다.
“를 조금 바꿔보는 건 어떨까요?”
“견우와 직녀요?”
“네! 저희 생일이 모두 7월 7일이잖아요. 저희 두 사람을 더 가깝게 이어준 것도 예나이니까. 이걸 활용해보면 어떨까 싶어서요.”
“오, 그거 좋다! 그럼 오작교를 무지개다리로 바꾸고, 캐릭터는 저희의 성격을 반영해서···.”
“여기는 이렇게···.”
둘이서 의논을 하니까 훨씬 진행이 빨라졌다. 순식간에 배경과 캐릭터가 채워지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은 대사까지 완성됐다.
그날 우리는 온종일 카페에 앉아 소설의 뼈대를 만들었고, 하루 만에 모든 줄거리를 완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걸 정말 하루 만에 끝내다니.”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그 외 자잘한 것은 집필하면서 직접 수정하면 되겠지.
“근데 삽화도 직접 그리실 거예요?”
“아니요. 따로 생각해둔 사람은 있는데, 워낙 바쁜 사람이라 의뢰를 들어줄지는 모르겠네요.”
“그게 누군데요?”
“제 표지를 그려준 사람이요.”
닉네임 ‘순애짱’.
삽화를 고민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사람이다. 한껏 높아진 예나의 눈을 만족시키려면 최소한 그 정도 수준은 돼야겠지.
‘문제는 이게 한 장짜리 의뢰가 아니라는 거지.’
어린이용 동화책이라도 최소 24~40p 정도는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 순애짱의 손이 아무리 빨라도 족히 한두 달은 걸릴 터.
제작 비용을 떠나서 지금도 예약이 쫙 밀려있을 텐데. 순애짱에게 삽화를 맡기는 게 가능할까 싶었다.
– 혹시 나중에 또 황녀님과 관련된 삽화 필요하시면 저한테 연락 주세요. 꼭 입니다. 꼭!
일단 이번 동화에도 강바다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가 등장하긴 하니까. 연락 한 번 넣어보는 정도는 나쁘지 않겠지.
“혹시 안 된다고 하시면 저한테 맡기세요.”
“설마 납치하시려고요?”
“···그거 진심으로 꺼낸 말이죠!?”
“아, 답장 왔다.”
“말 돌리지 마세요!”
으으-
내 옆으로 와서 양쪽 볼을 잡아당기는 강바다. 그 상태로 메시지부터 확인한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 가능해요! ٩(•̤̀ᵕ•̤́๑)ᵒᵏᵎᵎᵎᵎ
: 시간이야 만들면 되니까요.
: 자세한 건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요. 대신 황녀님도 꼭 모시고 나오세요! 꼭!!!!!!!
광기가 엿보이는 메시지.
이런 사람과 만나는 자리에 강바다를 데리고 나가도 되는 걸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강바다가 휴대폰 앞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특이한 사람이네요.”
“일단 제가 먼저 만나보고 올게요.”
“아니에요. 저랑 같이 가요.”
“예?”
주욱-
강바다가 내 볼을 잡아당기며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당황해서 뒤로 물러서려 하자, 그녀가 내 얼굴을 붙잡았다.
“하늘 씨가 딴 여자랑 단둘이 있는 건 상상하기도 싫거든요.”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는데요?”
“여자일 수도 있잖아요.”
“···그거야 그렇죠.”
“그럼 결정됐네요.”
싱긋-
강바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등 뒤에서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 * *
며칠 후 나와 강바다는 한적한 카페에서 순애짱을 만나기로 했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여유롭게 카페로 들어서는데, 누군가 대뜸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중학생인가?’
위에는 가죽점퍼.
아래는 붉은 체크무늬 치마.
붉은색 양말에 강렬한 첼시부츠까지.
굉장히 개성적인 펑키 스타일에 비해 키가 매우 작았다. 신발 굽이 꽤 높아 보이는 데도, 내 턱 끝조차 미치지 못했으니까.
“안녕하세요! 황녀님.”
“······!?”
상대는 대뜸 강바다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더니, 연신 위아래로 그녀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흔치 않게 당황한 강바다가 내 뒤로 물러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확실히 실물이 낫네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정말 존재하나 싶었는데 말이죠.”
“누구시죠?”
“그럼 이쪽이 ‘활자중독자’님이시겠죠?”
느닷없이 튀어나온 필명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내 필명을 알만한 사람은 한 명뿐이다.
“당신 설마···.”
“맞아요. 제가 순애짱이에요. 본명은 ‘이태리’라고 합니다.”
이태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직후 강바다에게 그랬던 것처럼, 분석하듯 내 몸을 위아래로 뜯어보기 시작한다.
괴상한 행보였지만, 눈앞에 사람이 정말 황녀 일러스트를 그린 ‘순애짱’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아니, 전에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차분한 편이라고 해야겠지.
“으음, 과연.”
“······?”
“사실 처음 일러스트를 요청받았을 때는 스토커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보내주신 그림들은 애정을 가지고 오랫동안 한 사람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었죠.”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본인이 허락했다고 해서 일단 그려드리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납득이 안 됐단 말이죠? 근데 직접 보니 알겠네요. 정말 교과서적인 인체 비율이에요!”
덥석-
이태리가 내 팔뚝을 붙잡았다.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당연하다는 듯 만지작거리니, 뭐라고 따질 타이밍을 놓쳤다.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근육이 탄탄하네요. 현대판 터미네이터를 보는 기분이랄까?”
이태리는 여러 의미로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개성적인 복장이나 메시지에서부터 성격이 특이할 거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한 가지 제안을 할게요.”
“무슨 제안이요.”
“제가 어지간해서는 커플을 잘 안 그리는데, 이번에는 좀 흥미가 생겨서요. 두 분이 같이 제 작품의 모델을 해주시면 좋겠어요.”
“······.”
“어때요? 말씀하셨던 삽화도 제가 전부 맡아드릴게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다고요. 네? 네? 받아들이실 거죠?”
이태리의 눈에는 기묘한 열망이 담겨있었다. 사람의 악의를 상대하는 건 익숙하지만, 의외로 이런 순수한 사람에는 면역이 없어서 난감했다.
그때 강바다가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여전히 내 팔뚝을 붙잡고 있던 이태리의 손을 떼어내면서 말을 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앉아서 할까요?”
강바다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걸려있었는데, 그녀와 꽤 많은 시간을 함께한 나는 그것이 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나셨구만.’
그것도 모르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는 이태리. 괜히 그녀가 안쓰러워진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