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56
056 설명은 범인한테 들어야지
“내가 언니한테 부탁하고 싶은 건 총 3가지야.”
“그건 너무 많지 않니?”
“전혀.”
강바다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강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을 받았다.
“말해 봐.”
“먼저 유능한 번역가를 한 명 소개해주면 좋겠어. 우리는 이 동화책을 되도록 많은 나라에 수출하고 싶거든.”
“국내 시장도 안 보고 번역부터 생각하다니.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니?”
“아니라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지.”
“나참.”
강별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순간 강바다의 얼굴에서 김하늘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일말의 자신감도 엿보였다. 그만큼 예나의 작품이 뛰어나거나, 강바다의 내면에도 무언가 큰 변화가 생겼다는 뜻이겠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이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지만. 막내에 대한 애정을 싹 빼고, 오로지 거래 상대로만 평가하자면 조금 부족하긴 했다.
만약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예나의 그림을 판매하는 사람이었다면, 적절한 미끼를 던져서 상대를 꾀어냈을 테니까.
강별이 아쉬움을 삼키던 그때, 강바다가 가방에서 웬 태블릿을 하나를 꺼냈다.
“이건?”
“견본이야. 아무리 언니라도 상품이 뭔지도 모른 채 거래하는 건 너무 도박성이 크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렇지?”
“···내 동생 맞네.”
보통이라면 여기서 한 번쯤 튕겨줬겠지만, 강별의 뇌는 이미 예나의 그림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때문에 강별은 망설임 없이 태블릿을 받아 그림을 확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이게 정말 예나의 그림이라고?”
“정확히는 합작품이지만. 예나의 비중이 훨씬 높아. 언니라면 알아보겠지?”
“······.”
강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이미지를 넘기며 예나의 그림 속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예나의 재능은 충분히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착각에 빠져 있었는지 새삼 깨닫게 해주는 그림들이었다.
합작품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이전에 비해 대중적인 면모가 크게 올라갔다. 예나의 그림을 도와준 사람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겠지.
‘이건 무조건 성공할 수밖에 없어.’
반평생을 예술계에 종사한 사람으로서의 직감이었다. 굳이 해석을 덧붙이지 않아도, 누구나 손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친절한 그림이니까.
태블릿으로 전해지는 수준이 이 정도라면, 원본은 대체 어느 정도 수준일지 감도 안 잡혔다.
“아···.”
중간에 뚝 끊겨버린 그림을 보며 강별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다음 그림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두 번째 조건은?”
“언니 인맥들의 추천사를 받고 싶어.”
강바다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이 동화책이 성공하리라는 것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강별의 인맥은 해외까지 넓게 퍼져있다. 그 영향력 또한 대단했기에, 단순 언급만으로도 큰 홍보 효과를 얻을 수 있겠지.
“좋아. 그 정도는 들어줄게.”
강별은 흔쾌히 그 제안을 수락했다. 이건 굳이 강바다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먼저 진행했을 일이니까.
권태로움에 빠진 노인네들에게 예나는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다.
정보만 살짝 흘려주면 오히려 자신들이 먼저 하고 싶다고 앞다퉈 나서겠지.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커다란 이득이야.’
강바다도 이를 모르진 않을 터. 즉 이건 자신에게 던져주는 일종의 뇌물이다. 아마도 진짜 부탁은 마지막에 있겠지.
“마지막은?”
“언니가 해외 유통망을 맡아주길 바라.”
“그게 본론이구나.”
강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한 일은 강바다 혼자서도 해결할 수 있겠지만, 이것만큼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메이저들이 수백 년 전부터 자리 잡은 해외 시장에 섣불리 발을 들이미는 건, 누가 봐도 어리석은 행위니까.
‘매력적인 제안이긴 하네.’
강별 자신은 기존에 예술품을 거래하며 키워둔 인맥이 있으니, 그들을 통해 비교적 쉽게 해외 시장에 접근할 수도 있다.
예나의 동화책이 견본 이상이라면 그쪽에서도 거절할 이유는 없을 테고.
“내가 얻는 건?”
“해외판권의 독점. 그리고 첫 번째 견본.”
“원본이 아니라?”
“미안, 이건 예나 선물이라서.”
“원본 대여 5년.”
“3년. 대신 전시회 정도는 허락할게.”
“···너 장사 좀 하는구나?”
강바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자꾸만 김하늘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면, 그건 단순한 자신의 착각일까. 실로 묘한 기분에 강별은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하며 계산을 시작했다. 예나의 그림을 내걸고 전시회를 연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해외 판매를 최대한 앞당긴다면 6개월, 빠르면 3개월 내로도 충분히 판권을 딸 수 있어.’
그동안 견본을 확인한 유명인사들의 감탄이 쏟아질 테고. 원본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
그중 일부만을 뽑아 전시회에 초청한다면. 그들은 또다시 새로운 소문을 양산하고, 전시회의 가치는 가파르게 상승할 터.
‘2번이면 충분해.’
1년에 한 번씩.
총 2회만 열리는 아주 특별한 전시회.
이를 이용해서 아틀리에 소속 화가들의 이름까지 끼워팔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다. 초청장을 원하는 호사가들의 선물도 꽤나 짭짤하겠지.
“50프로.”
“20프로.”
“네가 무슨 강태양인 줄 아니? 동네 양아치도 그렇게는 장사 안 해.”
“30프로.”
강별이 질색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허나 강바다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35프로. 이게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야.”
“고마워, 언니.”
“이럴 때만 언니지.”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김서방이랑 어울리더니 엄청 능글맞아졌네. 그림이나 보여줘. 애 좀 그만 태우고.”
“자, 여기.”
강바다는 순순히 그림을 내밀었고, 내용물을 확인한 강별의 눈이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어때, 우리 예나 짱이지?”
“···역시 내가 입양해야겠어.”
“언니-!!”
들뜬 자매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 * *
“우리 예나, 오랜만이네?”
“안녕하세요. 이모!”
“그래, 김서방도 잘 지냈지?”
“덕분에요. 오늘 이렇게 특별한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감사 인사를 전하자, 눈치를 보던 예나가 넙죽 배꼽 인사를 했다. 그를 보며 다들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우리는 강별의 초청을 받아, 이번에 새롭게 열리는 전시회를 미리 볼 수 있게 되었다.
강별 휘하 아틀리에 작가들의 개인전인데, 오픈하기 전에 예나에게만 보여주는 거란다.
“예나야 저번 그림 잘 봤어. 20년 만에 눈물을 흘릴 뻔했지 뭐니, 나중에는 이모한테도 그림 그려줘야 한다?”
“···예나 그림을 보면 슬퍼?”
“아니, 너무 기뻐서 그런 거야. 이모는 예나의 그림을 너무너무 가지고 싶거든.”
“그럼 예나가 그려줄게요!”
“약속한 거다?”
호호-
예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 웃음소리를 내는 강별. 그를 보며 강바다가 눈을 부라렸다.
“언니.”
“나도 그 정도는 받아도 되잖니. 이 욕심쟁이 동생아.”
“에휴···.”
강바다가 못 당하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강별이 많은 배려를 해주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기에,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그나저나 김서방.”
“네, 처형.”
“막내랑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어?”
“언니-!!”
“발끈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나 보네.”
강바다가 얼른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충 무슨 맥락인지는 알겠는데, 설마 처형도 강태양과 같은 ‘동정파’는 아니겠지?
잠깐 고민하는 사이 누군가 우리 쪽으로 걸어와서 인사를 건넸다.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소개할게. 여기는 내 아틀리에 소속 화가인 ‘장마엘’이야.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사람이지.”
“장마엘입니다.”
사람 좋게 인사를 건네는 장마엘. 강별이 직접 소개한 만큼 강바다와 예나도 별 의심 없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뭐지?’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한 기분이 드는 걸까. 수많은 진상을 상대하며 쌓여온 내 경험이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단순히 장마엘이 기생오라비처럼 생겼기 때문만은 아닐 텐데. 대체 뭐가 문제일까.
“김하늘 씨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장마엘입니다.”
장마엘이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나는 찝찝한 마음을 감추며 손을 마주 잡았다. 그 순간 전해지는 이유 모를 불쾌함.
맞잡은 손에서 꽤나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장마엘이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명색이 화가라는 양반이···.’
이렇게 손을 함부로 쓰면 되나.
딱히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이유 없는 악의를 보인다면, 그럴 만한 이유를 만들어주면 되는 거니까.
“······!!”
마주 잡은 손에 힘을 불어넣자, 장마엘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으나. 손에는 핏줄이 도드라지다 못해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기세였다.
“자, 잠깐···.”
내가 슬쩍 손에서 힘을 풀자, 황급히 손을 빼내는 장마엘. 잠시 나를 노려보던 그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하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안내해드릴 테니 같이 안쪽으로 이동하실까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에 나 역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며 뒤를 따랐다. 시선은 여전히 장마엘의 뒤통수에 고정한 채였다.
.
.
.
“이곳이 메인 전시장입니다.”
“우와아아-!”
본격적인 전시회 관람이 시작되자, 장마엘은 제법 프로답게 행동했다. 그가 들려주는 설명은 깔끔하고 듣기 편했다.
덕분에 예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그림을 관람할 수 있었고, 나 역시 별다른 태클을 걸지 않았다.
“이곳에는 기존에 이사님께서 보관하고 계시던 그림들은 물론, 저희 아틀리에 소속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만을 선별했습니다.”
“후후. 예나도 마음에 드니?”
“네!”
예나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여기저기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그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번 모임 자체가 예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소소한 잡담을 나눴다.
“하늘 씨, 저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네, 그러세요.”
강바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예나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어떤 그림을 올려다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렸다.
“예나야, 왜 그래?”
“이 그림 이상해.”
“뭐가?”
예나가 가리킨 그림을 봐도 나는 딱히 뭐가 이상하다는 건지 잘 모르겠다. 얼핏 지난번에 봤던 강별의 컬렉션 중 하나인 것 같기는 한데.
혹시나 싶어 강별을 슬쩍 쳐다봤으나, 그녀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오빠, 안아줘!”
더 높은 시야에서 그림을 보고 싶을 때 종종 예나가 부탁하던 행동이었기에, 나는 곧바로 그녀를 안아 올렸다.
“이 정도면 됐어?”
“응.”
“뭐가 이상한데?”
“우음. 저번에 본 거랑 달라.”
“···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닌 강별이었다. 그녀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예나에게 말을 걸었다.
“예나야, 어디가 달라 보이니?”
“여기 색깔이 달라졌어요.”
“······.”
예나는 거침없이 그림의 이상한 점을 짚어냈다. 막상 그녀가 지목한 부분을 봐도 나는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다만.
그림의 소유주인 강별은 달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사뭇 심각한 얼굴로 그림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구나.”
“예?”
“누가 내 그림을 바꿔치기했어. 아주 정교하게 만든 레플리카라서, 의심하고 보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 힘들 정도야.”
“그 말씀은···.”
“설명은 범인한테 들어야지. 안 그래, 장마엘?”
강별의 싸늘한 눈동자가 장마엘에게로 향했다.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그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