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family's escort warrior RAW novel - Chapter 4
4. 그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었나.2014.11.14.
한정당(限貞堂)은 황 노인이 모시는 장련 아가씨의 거처 뒤편의 후원이다.
울창한 숲과 곳곳에 널린 꽃들이 아름드리 펼쳐진 곳으로 장씨세가에서도 가장 절경이 빼어난 곳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오늘따라 인공 연못을 따라 심어진 붉은색 꽃들이 화원에 좀 더 화려하게 피어 있었다.
접시꽃이라 불리는 이 꽃은 장련 아가씨가 매일 한 번씩 화원에 들를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었다.
광휘는 접시꽃들 사이의 어느 목화 나무 앞에 서 있었다.
몇 번이나 주변을 살피던 청년이 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다.
아마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다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그가 가고 일다경이 흘렀을까.
인기척과 함께 노쇠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자 앞 인공 연못을 바라보던 광휘는 그 목소리에 천천히 뒤돌아섰다.
“왔는가!”
황 노인이었다. 그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입을 귀에 건 채 광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맙네. 설마 했는데 정말 이렇게 와 줄 줄은 몰랐어. 정말이지 누가 왔다는 소리에 가슴이…….”
“어르신.”
광휘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순간 황 노인은 자신이 흥분했음을 느꼈다.
그는 민망한지 헛웃음을 흘렸다.
“미안하네. 내가 너무 목소리를 높였구먼.”
그 말에 광휘는 굳은 얼굴로 다시 말을 꺼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누굴 지켜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저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괜찮네. 괜찮아. 여기 와 준 것만으로도 내겐 큰 힘이 되네. 정말 잘 왔어.”
황 노인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그가 단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얻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 여기까지 왔으니 우선 방을 하나를 구해봐야겠지. 아, 그 이전에…….”
황 노인은 광휘의 복장을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자네 어디 가서 긴 장포라도 하나 걸치게. 그런 복장으론 사람들의 이목만 끌 것이야.”
황 노인의 지적대로 광휘의 복장은 특이했다.
초가을에 접어드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죽 상의와 하의를 입고 있었다. 거기다 사람들이 잘 끼지 않는 발목 보호대인 각반(脚絆)도 그의 발치에 보였다.
게다가 그 또한 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신발과 손목 보호대 역시 가죽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키와 흡사한 등 뒤의 장도(長刀)는 황 노인의 눈에 확연하게 들어왔다. 허리춤에 있는 얄팍한 검자루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광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내 객방이 비어 있는 곳을 물어볼 테니.”
황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는 곧장 뒷문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몇 걸음 걷던 때였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그는 다시금 광휘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헌데 말이야. 뭐 하나 물어봐도 되겠는가?”
황 노인은 덤덤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광휘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자네도 눈을 가리고 사물을 벨 수 있는가?”
광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질문의 의미를 물은 것이다.
“그러니까 말이지. 눈을 가리고 떨어지는 뭔가를 벨 수 있는가 말일세. 예를 들어 옆에 있는 목화솜이 떨어진다고 치세. 자네는 눈을 가린 채 그것을 벨 수 있겠나?”
광휘의 시선이 옆에 있는 목화나무로 이동했다.
이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노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해보지 않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황 노인은 아쉽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눈을 가리지 않은 채 떨어지는 목화솜을 어느 정도 벨 수 있는가? 아니지. 목화솜을 하나의 꽃으로 만들 수는 있는가? 예컨대 그것이 매화 모양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 말일세.”
광휘의 말없이 침묵했다.
무슨 생각인지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내 말이 좀 그런가? 하긴…… 그런 걸 누가 해보았겠나.”
황 노인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
허나, 처음처럼 밝게 웃지는 못했다. 숨기려고 했지만, 눈가엔 작은 실망이 드리워진 것이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말일세. 장씨세가에서 자네 말고도 세 명의 손님을 더 초빙해 왔네. 마침 아침에 시연회가 열렸는데 엄청난 솜씨를 뽐냈었네.”
황 노인은 아직 버리지 못한 검은 천을 광휘에게 들어 보였다.
“한 명은 이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열 개 이상을 목화솜을 날려 베었네. 또 한 명은 목화솜을 열 개 이상을 띄운 후 머리카락 정도로 세세하게 잘라냈고. 마지막 한 명은 세 개의 목화솜으로 매화꽃을 만들어냈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대체 어느 경지에 올라야 그것이 가능한 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도 없네.”
황 노인은 마치 그때의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선 들고 있던 검은 천을 광휘에게 건넸다.
“자네도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한번 해 보게나. 혹시 결과가 좋으면 몇 개나 벴는지 나에게도 좀 알려주고. 나도 사람인지라 괜스레 자네 자랑 좀 해보고 싶어져서…….”
광휘는 건네준 천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아참 내 정신 좀 보게. 방을 물어본다는 게…….”
“…….”
“기다리고 있게나. 내 빨리 가서 물어볼 테니.”
황 노인은 다시 뒷문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광휘는 느꼈다. 앞에 자신을 안내했던 청년도 그렇고, 노인이 재촉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이 후원에도 자신이 오래 머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노인이 자리를 떠났음에도 광휘는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다시 걸어오는 모습을 보기 위함은 아니었다.
대화 도중 들었던 답답한 느낌이 계속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허나, 순간적으로 잊어버려 광휘는 그것이 뭔지 생각나지 않았다.
펄럭.
그는 문득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천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황 노인이 건네고 간 검은 천이었다.
‘……!’
그 순간 광휘는 눈을 번뜩였다.
그제야, 신경을 쓰이게 했던 그 무언가가 생각이 난 것이다.
바로 노인의 얘기 중 그가 강조했었던 엄청난 솜씨라는 대목이었다.
“그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었나.”
광휘는 노인이 했던 말을 곱씹다 문득 자신의 허리춤에서 삐져나온 검자루를 바라보았다.
괴이한 자루 모양의 괴구검이 거무튀튀한 검집과 함께 흔들거리고 있었다.
임무가 종료된 지 만 오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광휘는 이를 한 번도 만져보거나 열어본 적이 없었다.
녹이 슬 만한 시간이 흐른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발로 만들어도 강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던 허풍쟁이 광 노사(光老士)가 만든 것이니까.
하지만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이곳에 온 이상 분명 쓸 일이 있을 것이다.
휘이이잉.
광휘는 살랑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목화나무로 다가가 솜을 떼어냈다. 그 뒤, 솜을 적당히 동그랗게 만들고는 제자리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느린 동작으로 노인이 준 검은 천으로 눈을 가렸다.
잠시 뒤, 광휘는 두세 걸음을 물러나며 목화나무와의 거리를 벌렸다.
처억.
이윽고 그의 오른손이 올라갔다.
그의 손은 허리춤으로 향했으나 검자루를 잡지는 않았다.
단지 그가 한 건 자루 위 받침을 살짝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그 안의 의미는 깊었다.
엄지손톱 끝에 걸린 느낌으로 검의 중량(重量)이 어느 정도이며 검집과 칼날 사이에 교착된 마찰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또한, 마찰음은 칼날의 상태를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된다.
그렇다.
시야란 것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보는 것. 들리는 것. 손에 닿는 것.
이 모두가 하나의 시야로 통용되는 것이다.
휘이이잉.
이름 모를 꽃씨가 광휘의 얼굴을 스치는 때였다.
그는 눈앞의 목화나무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동시에 나뭇가지에 걸린 목화솜 하나와 근처에 있던 목화솜 십여 개가 그를 따라 솟아올랐다.
패액.
공중으로 솟아오른 광휘는 검을 빼내 원형으로 휘둘렀다. 일순간 강한 기류가 생성되며 목화솜 십여 개가 그의 품속으로 움직였다.
휘릭.
그에 맞춰 광휘의 움직임도 변했다.
검을 반대로 잡은 것이다. 날의 방향이 하늘이 아닌 지면으로 향했다.
등에 멘 기형도와 함께 그의 검 또한 기형이었다.
패애액.
그의 손놀림이 주먹을 뻗은 것처럼 도드라져 보일 때쯤.
검을 거둔 광휘는 목화나무를 다시 밟으며 지면으로 내려왔다.
척.
“…….”
목화솜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날아갔는지 아님 증발했는지 사라져 있었다.
침묵을 지키던 그가 눈을 가렸던 검은 천을 풀었다.
그러고는 한숨과 함께 미간을 찡그렸다.
“무뎌졌구나.”
복잡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러던 그때.
“빨, 빨리 나가세.”
“…….”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주겠네. 아, 아가씨가 오네. 급하네!”
황 노인은 광휘에게 급히 손짓하고는 그의 손을 잡았다.
광휘는 영문을 모른 채 그를 따라 움직였다.
황 노인의 손길에 광휘는 후원 밖으로 뛰다시피 하며 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잠시 뒤.
멀리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한 청년과 함께 후원 안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공자 장웅(張雄)과 장련이었다.
그들은 간단한 담화를 끝내고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정말 대단하지 않았느냐? 그 많은 목화솜을 눈을 가리고 모두 베다니. 정말이지 보고도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더구나.”
장웅은 아직도 그들의 칭찬에 여념이 없었다. 아침에 보인 무위에 너무나 감명을 받은 그였다.
“눈을 가리고도 목화솜을 벨 수 있다니. 정말 훌륭한 사내였다. 종잇장처럼 목화솜을 자른 자도 매우 훌륭했지. 아무리 손으로 뭉쳤다 한들 칼로 목화솜을 그렇게 베기란 힘든 일이 아니겠느냐. 뭐 그렇다 하더라도 세 번째 사내가 제일 대단했었다.”
“…….”
“얼마나 빨리 검을 움직였으면 목화솜을 매화꽃처럼 보이게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냐. 아참, 그자가 너에게 그 매화꽃을 보내지 않았더냐? 가까이 보니까 어땠느냐? 정말로 매화처럼 잘려 나왔더냐?”
장웅은 미소가 걸린 얼굴로 장련을 보았다. 헌데 자신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련아. 왜 그러느냐.”
진중한 표정으로 변한 장웅은 그녀를 조심히 응시했다.
“걱정돼서요.”
장련이 애써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뭐가 말이냐?”
“정말 그들만으로 충분할지가요. 듣기로 석가장엔 신출귀몰한 고수들이 많다고 들어서…….”
“그건 걱정하지 말거라. 아침에 너도 보지 않았느냐. 그 정도 실력자들이라면 더는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야.”
“그렇겠죠?”
“그럼. 그렇고말고. 얼마나 뛰어난 솜씨더냐.”
장웅의 확신하는 말 때문인가. 굳었던 장련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 모습을 보며 장웅은 동생의 웃는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 것임을 느꼈다. 그동안 너무나 힘겨워 이런 시간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걱정 마라. 장씨세가는 내가 반드시 지킬 테니까.’
대화를 나누던 때에 장련은 눈앞에 뭔가가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눈앞에 다가온 뭔가를 본능적으로 잡았다. 그리고는 그것이 뭔지 보기 위해 손바닥을 펼쳐보았다.
“아…….”
“왜 그러느냐?”
장웅은 놀라는 장련의 반응에 다가와 물었다.
“매화가…….”
그녀의 손안엔 매화가 들어 있었다.
아침에 본 매화보다는 작고 독특하게 생긴 매화였다.
휘이이잉.
일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있던 매화가 종잇장처럼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너무나 순식간이라 이를 보고 있던 장련과 장웅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있어요. 위에…….”
장련의 말에 장웅이 고개를 들었다.
“눈?”
흰 눈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아니에요.”
머리 위를 메우던 눈은 느리게 떨어졌다. 그러다 이내 빗줄기처럼 점차 가늘게 변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머리 위를 메우던 눈이 하나하나씩 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날실처럼 변하며 흩어졌다.
목화가 비가 되어 후원을 뒤덮은 것이다.
“아…….”
장련과 장웅은 걸음을 잠시 멈춘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들은 비처럼 변한 목화솜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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