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in the Smoke Gods RAW novel - Chapter 111
111화
과거, 한성태는 양복을 산 적이 있었다.
아는 동료의 결혼식을 가기 위해서 큰맘 먹고 마련했던 양복 하나.
3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을 들인 만큼 양복을 애지중지했던 그 과거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
그 이유는 바로 앞에 있는 맞춤 정장, 매장이겠지.
‘오데트’라는 이름의 맞춤 정장, 매장.
겉은 허름할지 몰라도 유리 너머로 보이는 양복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웠다.
“여기 맞아요?”
“어, 왜?”
“아니, 너무 비쌀 것 같아서.”
한성태는 맞춤 정장 자체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럴 돈으로 한두 달 일하지 않고 연기하면서 버텼겠지.
“너 이제 돈 잘 벌지 않냐?”
“저요?”
“어. CF도 찍었고, 이번에 넷플렉스에서 받은 계약금도 많잖아.”
“그렇긴 한데, 이게 안 쓰다 버릇하니까, 돈 쓰는 걸 못하겠더라고요.”
한성태의 말에 정두식이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한성태가 벌고 있는 수입만 보면, 이 정도 매장은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네 매력이지.”
“네?”
“그런 게 있어. 안으로 들어가자.”
“네, 형.”
한성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정두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딸랑.
문을 열자 들려오는 종소리.
“어서 오세요.”
그 소리에 노부부가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한성태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를 뒤로한 채 정두식이 앞으로 나섰다.
“한성태라는 이름으로 예약했습니다.”
“아, 그때 연락하신. 반갑습니다. 데이비드예요.”
“한성태입니다.”
할아버지가 내민 손을 잡아들며 한성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노부인의 말에 한성태가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단다다단.
걸음을 옮기는 그의 귓가로 클래식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잔잔하면서도 부드러운 게, 음악에 까막눈인 그가 듣기에도 좋았다.
“노래가 좋네요.”
“그렇죠?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이에요.”
“아.”
그녀의 말에 한성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성태가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정두식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거 우리 회사 소속 아티스트가 만든 거야.”
“그래요?”
“응.”
PAN 엔터테인먼트는 배우와 가수를 전부 키우는 회사였다.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로 오시겠어요.”
노부인의 말에 한성태가 바로 걸음을 옮겼다.
양복들로 가득한 공간.
[‘절권도의 창시자’가 속이 답답한 곳이라며 한숨을 내쉽니다.] [‘천의 얼굴’이 예전에 정장 많이 있었다며 그리운 얼굴로 주위를 둘러봅니다.]신들의 반응을 보며 한성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쪽입니다.”
그녀의 옆에는 언제 왔는지 데이비드가 원단 여러 개를 들고 있었다.
“혹시, 오실 때 알아보신 원단이 있나요?”
“아니요. 맞춤 정장 자체가 처음이에요.”
그의 물음에 한성태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한성태의 대답에 데이비드가 이해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몇 가지 추천 드려도 될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데이비드가 원단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어두운색을 품고 있는 원단이었다.
“이게 영국 원단이에요.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네.”
“영국이 많이 습해서, 원단을 만들 때 늘어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촘촘하게 짰거든요. 그래서 튼튼하면서 무게감이 좀 있어요.”
데이비드의 말에 한성태는 원단을 만지작거렸다.
원단 자체를 만진 게 처음이라 얼마나 촘촘한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게 이탈리아 원단. 영국 원단과 다르게 환하죠? 이탈리아는 해가 강해서 발색력을 중요하게 여기거든요. 그렇다 보니 색도 다양해요. 무엇보다 이탈리아 원단의 장점은 부드럽다는 거.”
두 개의 원단을 만져본 한성태가 조금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미세한 차이지만, 영국 원단과 이탈리아 원단은 무게부터가 달랐다.
“개성 있는 정장을 원하면 이탈리아를 쓰는 게 좋고, 무게감 있는 걸 원하면 영국 원단을 쓰시는 게 좋을 거예요.”
솔직히 이렇게 설명을 들어도 잘 알 수가 없었다.
맞춤 정장을 맞춰봤어야 알지.
여기서 그나마 말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단 하나.
“저는 무난하면서 튼튼한 게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 오래 입으려면 튼튼한 게 좋으니까.
[‘절권도의 창시자’가 좋은 선택이라며, 저 원단으로 체육복을 만들자고 제시합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가 헛소리하지 말라며 ‘절권도의 창시자’를 밀어냅니다.] [‘비극 속에서 웃음을 만든 이’가 자신이 즐겨 입던 옷의 원단이 없는지 살펴봅니다.]“그럼 이게 좋겠네요.”
시야를 가리는 신들의 메시지를 치워내며 한성태를 향해 데이비드가 원단 하나를 보여주었다.
“이건 뭐예요?”
“이게 히데스 필드라고 영국 원단 중 하나예요. 변형도 적고 내구성도 높거든요.”
“아.”
“딱 손님이 원하시는 조건에 부합하는 거 같은데.”
검은색 계열의 원단.
한성태는 원단을 살펴보다 슬쩍 눈을 돌렸다.
[‘천의 얼굴’이 괜찮은 원단이라고 말합니다.] [‘속도에 살고 속도에 죽는 자’가 첫 맞춤 정장 원단으로 나쁘지 않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는 무게감 있는 수트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신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그가 백날 살펴봐야 신들이 알려주는 거 하나만 못하다.
“이걸로 할게요.”
한성태의 말에 데이비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단은 히데스 필드로 하고. 기장을 재고 팔 좀 들어주실 수 있나요?”
그 말에 한성태는 양팔을 벌렸다.
“편하게 있으셔도 돼요. 제가 팔 들어달라고 할 때 들어주시면 되고요.”
“아.”
한성태는 어색하게 웃으며 팔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린 데이비드가 종이로 된 긴 자를 들었다.
‘이것도 상당히 오래 걸리는구나.’
기장을 잰다고 하기에 동네 수선집처럼 다리나 팔 길이만 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기장을 재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팔 길이부터 시작해서 몸 둘레, 가슴 등등…….
데이비드의 팔이 아프지는 않을 걱정이 들 정도였다.
“가봉까지 이 주일은 걸릴 거에요. 가봉할 때 다시 한번 몸에 맞춰야 하니까. 그때 시간 내서 와주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은 손님이 많이 하셨죠. 결제는 이쪽에서 도와줄게요.”
정두식이 한성태의 어깨를 두드리며 계산대로 향했다.
한성태는 그의 뒤를 따라가 슬쩍 결제되는 금액을 살펴보았다.
―1,520,000원.
그 숫자를 본 한성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형, 너무 비싼 거 아니에요?”
건물 밖으로 나온 한성태는 바로 정두식에게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정두식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대표님이 허락하셨는데, 뭘. 너는 연기만 열심히 하면 돼.”
“네, 진짜 열심히 할게요. 고마워요, 형. 대표님께도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래.”
한성태의 말에 정두식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집으로 가서 연습해야지.
한성태는 연습할 생각에 신나 있었다.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는 양복을 맞췄으니, 이제 그에 맞는 향수를 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신나는 감정이 사라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영원한 젊음의 배우’가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의 말에 크게 동의합니다.]아직,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 * *
“어떤 걸 사는 게 좋으려나.”
박예은은 여유롭게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중얼거렸다.
백화점을 활보하는 그녀의 짐을 들고는 따라다녔다.
‘베스트 커플상이니까. 조금 로맨틱한 게 좋겠지?’
그녀는 불과 며칠 전, 회사에서 시상식의 베스트 커플상 후보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작년에는 아무런 상을 받지 못했던 만큼, 그녀는 이번 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는 중이었다.
시상식에서 입을 옷과 장신구, 향수 등.
그녀는 시상식을 준비하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다.
그런 그녀를 백화점은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백화점의 VVIP인 그녀에게 직원들이 따라다니는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게 조금 있어야 할 텐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하나의 명품관 앞에서 멈칫거렸다.
명품관 앞으로 줄을 서고 있는 사람들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살펴보는 그의 모습을 보며 박예은은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 * *
정장 매장과 마찬가지로 백화점도 한성태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다.
돈이 없던 그에게 백화점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 보니, 백화점에 들어온 그는 걸음을 옮기는 내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향수가…….’
한성태는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음을 계속 움직였다.
그러다 보인 명품관.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가 저곳에 있는 게 분명하다 말합니다.] [‘영원한 젊음의 배우’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는 이유가 있을 거라며 같이 서보자 제안합니다.] [‘천의 얼굴’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들 같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한성태는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섰다.
몇 번 본 적이 있는 브랜드.
향수도 파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제 들어갈 수 있으려나.’
한성태는 자신이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은 씨?”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녀는 분명 박예은이 맞았다.
수수했던 촬영장의 모습과는 많이 달리 화려한 모습이지만.
박예은과 함께 촬영했던 한성태는 그녀의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저는 향수 사려면 줄 서야 한다고 해서 줄 서고 있는데. 예은 씨는요?”
“쇼핑하려고 왔죠.”
한성태는 시선을 돌려 그녀의 뒤를 살펴보았다.
직원들이 그녀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예은 씨 부자였지.’
박예은은 돈이 많았다.
상상 이상으로 많이.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가 조금 달라 보였다.
연기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처럼 연기를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했었는데.
“향수 사려고 줄 선 거라고요?”
“네.”
“하…….”
한성태의 말에 박예은이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내가 이런 사람을 가지고’라는 듯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향수……. 잠시만요.”
“……뭐 하세요?”
한성태는 자신에게 고개를 들이미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영원한 젊음의 배우’가 당신들을 바라보며 꺄악, 소리를 지릅니다.]박예은은 코를 킁킁거리며 한성태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행동일까.
의문이 절로 들었다.
“성태 씨, 지금 쓰는 거 좋은 거 같은데. 무슨 향수 써요?”
“저 향수 안 쓰는데요.”
“안 쓴다고요?”
“네.”
한성태는 그다지 자기를 꾸미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연기의 신들이 아니었다면, 향수를 사러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그럼 향수 사지 마요.”
“사지 말라고요?”
“네. 성태 씨, 향수 안 뿌려도 좋은 냄새 나거든요.”
[‘자신의 시대를 정의한 존재’가 최고의 향수는 치명적인 살 냄새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박예은의 말과 신들의 반응을 보며 한성태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여기 뭐 하러 온 거지?’
향수를 사러 왔다가, 방금 그 목적이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고 있던 그의 귀로 박예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향수 말고 다른 거 필요한 거 없어요?”
“네, 향수를 사러 온 거라서요.”
“뭐 때문에 향수를 사려고 하는 건데요?”
“시상식 때 쓰려고요. KBN.”
“아…….”
그의 말에 박예은이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정장은 샀어요?”
“네, 회사에서 맞춰줬어요.”
“그럼…… 구두는요?”
“구두요?”
“네, 설마 구두 안 사려고 한 거 아니죠? 정장 맞췄으면 그에 맞는 구두를 사야 하는데.”
“음…….”
그녀의 말에 한성태는 볼을 긁적였다.
구두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장을 맞춘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으니까.
“에휴. 성태 씨, 그렇게 천진난만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녀가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문득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야야, 저기 봐봐.”
“와, 엄청 잘생겼다. 연예인 아니야?”
“그러니까. 앞에 있는 여자도 엄청 예뻐.”
“인터넷 찾아봐봐. 나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사람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마트폰까지 꺼내 드는 그들의 모습에 박예은은 한성태에게 입을 열었다.
“저 따라와요. 계속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그녀의 말에 한성태는 눈을 깜빡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