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191
191화. 한중매(寒中梅) (1)
고진무는 무쌍장 객방에서 눈을 떴다.
그는 짧은 운공으로 몸을 살폈다. 짧은 숨을 토한 얼굴에는 눈에 띄게 혈색이 돌았다.
내상이 약간은 남았지만, 마냥 드러누워 있기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창틈으로 밝은 햇빛이 스며들었다.
고진무는 잠시 침상에 그대로 앉아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먼지를 물끄러미 보았다.
침상 옆에 놓아둔 화로는 불길이 다하여서, 하얀 재가 수북하게 남았다. 넓은 객방에는 약간의 한기가 맴돌았다.
한기는 꼭 화로의 불길이 잦아들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한 가닥 연기가 어둑한 구석에서 계속해서 맴돌았다. 고진무는 흘깃 연기의 요동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래.”
구석에서 맴돌고 있는 연기는 바로 귀동이었다.
귀동은 쉬이 깨어나지 못하는 고진무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한 모양이었다.
검초가 되었든, 단검이 되었든 스며들어서 영체를 쉬어야 할 터인데, 내내 방구석을 맴돌면서, 이제나, 저제나 고진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귀동의 영체는 불현듯 화로 주변을 힘껏 맴돌았다. 서슬이 일어난 음풍이 쌓인 재를 확 흩어놓았다.
“아이코, 이런.”
흩어지는 재는 한 줌 정도에 불과했지만, 고진무는 귀동의 골난 속내를 대강 짐작하여서 쓴웃음만 그렸다.
왜 그렇게 무리한 짓을 하였느냐는 타박이었다.
귀동은 그리고 토라진 것처럼 침상 한쪽에 얌전히 놓아둔 철검의 검초 속으로 스윽 스며들었다.
고진무가 구육점에 맡겨 두었던 본래의 철검이다. 그리고 옆에는 단검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이지만, 그래도 두 검을 모두 챙겼으니.
고진무는 뒤집어쓴 약간의 재를 툭툭 털어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진무는 운공과 가볍게 펼치는 현무권삼십이세로 몸을 풀고서, 한층 멀끔한 모습으로 객방을 나섰다. 그런데 방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무쌍장 제자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마치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즉각적이고, 다급한 모습이었다.
“고 소협!”
“고 소협!”
이건 이것대로 당황스러운 일이다.
고진무는 얼떨떨한 얼굴로 세 방향에서 에워싸다시피한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냥 반가워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 예. 하하, 어찌……?”
“일어나셨군요. 다행입니다.”
“장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하나가 말하고, 바로 이어서 옆에서 말했다. 그들은 꽤나 결연한 표정이고, 눈빛이었다.
고진무는 그들 모습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꿀꺽 삼켰다.
‘뭐, 뭐지. 불길한데.’
***
무쌍장 심처, 상무각은 엉망인 잔해를 치웠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할퀸 자국은 어쩌지 못했다.
찬바람이 스산하게 맴돌았다. 화로를 두고서 불을 피웠지만, 그 열기는 주변에만 맴돌 뿐이었다.
한복판에서 천진공은 뒷짐을 지고서 한곳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그 뒤로는 남은 네 제자, 무쌍사수가 고개 숙이고서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와중에 기철이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좌우 눈치를 살피고는 옆에 있는 기은령을 팔꿈치로 툭 쳤다.
기은령은 착잡한 얼굴로 있다가, 얼굴을 잔뜩 구겼다. 곧 눈을 흘겨 뜨면서 입을 뻐금거렸다.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뭐야?’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알겠냐!’
기은령은 비록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눈을 크게 뜨면서 다그치듯이 입을 뻐금거렸다. 홱 고개를 돌렸다.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기색이다.
기철은 입술을 한껏 삐죽거렸다.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다른 소리는 내지 않았다. 불만을 그냥 붙잡고서, 기철은 괜히 주변을 살폈다.
스승은 뭔가를 깊이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기철은 문득 스승의 뒷모습이 한층 작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뒷짐을 지고 있는 스승의 두 어깨가 기운 없이 늘어졌다. 항시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던 스승이었다.
유자(儒者)가 아니더라도, 바른 자세는 권사의 기본이라.
그러나 지금 마주한 일이 그냥 보통의 일일까. 스승의 상심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기철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사형들, 특히 대사형 육손을 떠올리며 욕했다.
‘망할 것들…….’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사형과 두 사형이 마도의 주구가 되어서는, 사문을 차지하려 들다니.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분명 다음이 있었을 것이고, 그건 결코 상현, 상주 일대에 좋은 일일 리가 없었다.
기철은 혼자서 분을 삭이고 있다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고진무가 상무각으로 들어섰다.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오, 고 소협. 몸은 어떠신가?”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천진공은 어두운 낯빛을 거두고서, 고진무를 돌아보았다. 몸 상태를 묻는 말에, 고진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무쌍사수, 네 사람도 고진무를 돌아보았다가, 퍼뜩 눈초리가 흔들렸다.
고진무의 허리 뒤에 솟은 검자루 때문이었다.
“하, 정말이군.”
“으음.”
넷은 고진무가 검을 휘둘러서 실혼인을 베어 버리는 광경을 잠깐씩 보기는 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경지를 이루어 낸 검객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검을 갖추고서 번듯한 모습을 들어서자, 새삼 차이를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차분한 서늘함이 그 주변에 맴도는 듯했다.
고진무는 자신을 보고서 당황하는 네 사람의 눈초리에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 하하. 다시 인사 올리지요. 종남파 제자, 고진무라고 합니다.”
“…….”
“…….”
고진무는 포권하며 말했다. 두 사형도 그렇지만, 기씨 남매의 표정이 참으로 볼만했다.
기은령은 눈초리가 한층 새초롬하여서는 눈매를 가늘게 떴다. 흘겨보는 눈초리가 우선 서늘했다.
“그래요. 종남검귀시로군요.”
“예? 아, 그게…….”
고진무는 말끝을 흐렸다. 지금 기은령은 처음 사당에서 밤 지새울 때에 일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때에도 종남검귀 운운하는 말이 나왔지만, 대충 모르는 척하면서 넘겼으니까. 그게 지금에 와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사정이야 어떻든, 고진무는 그들을 속인 셈이었다. 특히 기씨 남매, 두 사람을.
고진무는 무쌍사수에게 고개 숙였다.
“죄송합니다. 본의야 어떻든, 네 분께는 분명 거짓을 고한 셈이니. 다시금 사죄드립니다.”
“으음.”
기은령은 뭐라고 한소리를 더 하려다가, 고개 숙인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여기서 타박하면, 자신만 속 좁은 사람이 되어 버릴 듯하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렸다.
기철이 조용한 게 수상했다. 자신보다 더 난리를 치면, 난리를 쳤지, 이렇게 조용할 녀석이 아닌데.
그런데 기철의 눈빛은 기은령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적의나, 분노는커녕, 기철은 자신의 두 손을 꼭 맞잡고 두 눈을 한껏 반짝거렸다.
“종남…… 검귀…… 진짜 본인이라니!”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열기가 맴돌았다.
종남검귀라는 이름은 하동에서 처음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법천지로, 관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하동 땅이다.
하동 일대를 장악한 거대한 마적 무리를 홀로 처단한 일대검객이 바로 종남검귀이니. 이후에는 화산에서는 강호초출을 노리던 도적 무리를 단숨에 제압하였다고 한다.
자신 또한 강호에 처음 나선 자임에도 그러하였으니.
아직 어리다고 하면, 어린 기철에게는 아주 꿈같은 강호기협의 기담이었다.
그 주인공이 눈앞에 있었다.
기철은 눈을 한껏 크게 뜨고는 반짝반짝 빛냈다.
“아,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지금도 하동에서는 종남검귀 이름이면 마적, 비적들이 기겁해서 도망한다고 하는걸요.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기철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감정이 격하여서 오히려 말문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고진무는 당혹스러울 뿐이다. 어디서 그렇게까지 이름이 돌았다는 말인가.
기은령도 기철의 격한 반응에 당황했을 뿐이지, 종남검귀의 이름에는 공감하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종남검귀의 이름은 확실히 나도 들은 바가 있어.”
“아, 저도.”
고진무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무쌍장 제자들이 하도 긴장한 얼굴로 자리를 청한 터여서, 그도 한참 긴장한 채 상무각을 찾았다.
상무각은 참 여러 일이 있었던 곳이다.
거기서 무쌍귀유와 네 제자, 사수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고진무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종남검귀란 이름으로 이런 호들갑이라니.
고진무는 지금 상황이 더욱 불편했다.
애초에 종남검귀라니, 고진무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별호였다. 어느 작자가 그딴 이름을 붙인 것인지.
‘에효…….’
고진무는 남몰래 한숨을 삼켰다. 그래도 이렇게나 반겨주는 상황에서 대놓고 싫은 기색을 내비칠 수야 없는 일이다. 굳어가는 얼굴을 억지로 풀었다.
그러다가 태사웅이 성큼 나섰다.
“그럼, 고 소협.”
“예? 예, 예.”
목소리의 무게가 전혀 딴판이다.
이번에야말로 진지한 얘기가 나오려는 것인가. 그 무게를 느끼고서, 고진무는 부랴부랴 자세를 바로 했다. 낯빛을 다잡고서, 숨을 삼켰다.
한 걸음 다가선 태사웅의 눈초리가 한없이 진지했다.
그는 일단 두 손을 맞잡았다.
“사정은 대강 들었소이다. 우선 본장을 도와주신 일에 대해서, 감사를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구려. 감사하오, 종남검귀.”
“감사하오.”
“감사합니다.”
못마땅하던 기은령도, 눈 반짝이던 기철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고진무는 마주 고개를 숙였다.
“마땅히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제가 아니었더라도, 슬기롭게 이겨내셨을 일입니다.”
“아니, 그건 아닐세. 속절없이 암계에 빠져들어서, 여기는 진즉 그놈들 안방이 되었겠지. 무쌍장 이름이 마도의 주구로 전락하였을 걸세.”
“장주님.”
천진공은 겸양하는 고진무의 말을 딱 끊으면서 말했다. 그는 손목이 비어 있는 왼쪽 소매를 뒤로 돌리면서, 고진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한결 신색을 회복한 천진공이었다. 그래도 씁쓸한 기색이 남아서 맴도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나. 한숨을 삼킨 노권사는 고진무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자네는 이 사람도 그렇지만, 본장에 큰 은혜를 베풀었어.”
고진무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 그런 천진공에게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네 제자를 돌아보는데, 태사웅의 눈초리가 여전히 이글거렸다.
‘어, 어라라?’
“자아, 그럼.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고 소협.”
“예? 못다 한 일이라고 하시면?”
“사양할 것 없소!”
사양이고 말고, 무슨 소리인가 싶은 순간, 태사웅은 돌연 기합을 불어넣더니, 두 주먹을 불끈 그러쥐었다.
“흐압!”
몸이 부풀 듯이 걸친 무복이 팽팽해졌다. 단단히 자세를 갖춘 모습을 보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가 없었다. 미루었던 비무를 지금 하자는 것이니.
“아…….”
고진무는 고개를 돌려서 급히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말려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범석은 아예 다음은 자기 차례라는 듯이 돌연 무릎을 잡고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기 씨 남매는 알아서 물러섰는데, 그래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어디 천진공만 할까.
노장주는 아예 한쪽에 놓은 의자에 걸터앉아서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꽤나 기대가 어린 눈초리였다.
고진무는 아연한 얼굴로 있다가, 결국 한숨을 꾹 삼켰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