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281
281화. 사영일기(四英一奇) (1)
“끄아악!”
처절한 괴성이 터지면서, 계곡을 타고 소리가 윙윙 울렸다.
치켜든 칼날이 뚝 떨어졌다. 온몸을 내던진 일도였다. 거리고, 수비고 없었다. 그야말로 상대의 전력이었지만, 고진무는 마주하여서 검결지 맺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쩌엉!
쇳소리가 맑게 터졌다.
떨어지는 칼날의 중동이 뚝 끊어졌다. 칼 조각은 밤하늘을 향해 빙글빙글 맴돌면서 치솟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전력을 휘둘렀던 사내는 덜컥 무릎을 꿇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루만 남은 칼날을 늘어뜨렸고, 다른 한 손으로 목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줄줄 흘렀다.
“흐으, 흐으으. 흐으으. 거, 검귀라니…….”
그는 곧 빛을 잃고서, 망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당했다. 그것도 눈앞에 있는 한 사람에게.
그는 진짜 검귀였다.
하동 전역을 앞마당으로 삼아서 종횡무진하였던 비적, 귀살적을 무너뜨린 강호의 절정검객.
“왜, 왜 하필이면. 크, 크륵…….”
이번 의뢰를 마무리하면, 귀살적 이름을 다시 세울 수가 있었건만. 그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고진무는 그의 탁한 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귀살적이 다시 일어난 거냐?”
“…….”
차가운 물음에, 사내는 숨을 삼켰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지만, 숨소리조차 잦아들었고, 눈앞은 한없이 멀어졌다.
‘제, 젠장!’
목을 움켜쥔 손에서 힘이 풀려 뚝 떨어졌다. 주춤했던 피가 치솟았다. 그리고 옆으로 무너졌다.
고진무는 넘어가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일별하였을 뿐이었다.
약간의 사정도 두지 않고, 스물에 이르는 자들, 그리고 계곡 위에 있던 궁수들까지 전부 처리한 마당이었다.
귀살적이라는 이름에 손끝에 살기가 더욱 맺혔다.
고진무는 슬쩍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왕에 자신이 손을 쓴 상대였다.
“혈사도 중요하지만, 비적 무리도 외면할 수는 없겠군.”
고진무는 착잡함을 담아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엇보다 하동에 남은 인연이 따로 있지 않은가.
바로 방대원이다.
귀도, 살괴, 백적, 세 대두목의 이름을 모아서 붙인 것이 바로 귀살적이었다.
방대원은 그중 대두목, 귀도였다. 결국 비적으로 삶을 청산하고자 하였고, 귀살적을 스스로 소탕한 것이 바로 방대원, 방 선생이었다.
“흐음, 방 선생은 어찌하시려는지. 아무래도 걱정인데. 귀살적이 다시 일어난다면…….”
고진무는 방대원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하동 땅에 닿으면 그의 종적을 수소문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수소문 정도가 아니었다.
고진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한층 무거운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널브러진 시신들, 이들을 다른 용부처럼 굳이 매장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곡구에 내버려 두는 것 또한 사람의 도리는 아니지 않겠나.
고진무는 쯧, 혀를 차고서 고개를 들었다.
마침 구름이 저기에 흐르고 흐르면서 먼 달빛이라도 온전히 계곡 주변을 밝혔다.
저 멀리 모닥불이 일렁거리는데, 그 자리에서는 몇몇이 엉거주춤 일어나서 잠시 긴장한 기색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고진무는 저들을 볼 수 있었지만, 저들은 이쪽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소란이 뚝 끊어지니, 무슨 일인가 하여서 잔뜩 움츠러든 모양새였다.
고진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입을 벌리려다가 잠시 멈칫했다.
“흐음?”
그는 고개를 돌렸다. 눈초리가 계곡 위를 향했다.
“저기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으음.”
승찬은 불안한 얼굴로 어둠 너머를 연신 기웃거렸다. 그는 쉽게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깜깜한 어둠이 눈앞을 가리고 있다지만, 멀지 않은 곳에서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다.
계곡을 뒤흔들 듯한 괴성이 연이어 울리다가,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괜찮다고 말하지만, 여럿이 몰려온 상황에 검객 한 사람이 홀로 나섰을 뿐이었다. 승찬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참인데, 문득 백란이 한숨을 흘렸다.
“가가, 그만하고 앉아 있어요.”
“하, 하지만, 란매.”
“여기 계신 분들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강호의 고수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조금도 긴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게 과연 무슨 뜻이겠습니까.”
“무, 무슨 뜻일까?”
승찬은 약간은 맹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려 말하니, 바로 알아듣지를 못했다.
요광은 여전히 죽립으로 얼굴을 덮고서, 조용히 있을 뿐이고, 단청은 불을 살피고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을 빤히 보고 있던 도우빈이 피식거렸다.
헛웃음이 절로 나올 판이었다.
승찬은 그 기색에 잠깐 얼굴을 붉혔지만, 그래도 백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백란은 차분하게 말했다.
“가가, 저기 있는 도 소협도 저보다 공력이 높아요.”
“으어으응?”
승찬은 백란의 말이 쉽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한껏 치떴다. 그러자 도우빈이 퍼뜩 불쾌한 기색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승찬은 얼버무리듯이 부랴부랴 말을 꺼냈다.
“아니, 그렇지. 강호에서는 노인과 아이일수록 더욱 조심하라 하였던가.”
머뭇거리면서 한다는 말이, 강호 초출이나 할 법한 소리였다.
“흐음, 아무래도 보통 귀하신 분들은 아닌 것 같은데. 두 분은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거예요?”
도우빈은 모닥불 너머에서 어깨를 으쓱 세우며 물었다. 호기심이 역력했다. 초롱초롱한 두 눈은 불빛 받아서 반짝거렸다.
“그, 그건.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대놓고 묻는 일은 좀체 없는 일이었다.
은연중에 서로의 내력이나 과거를 캐묻지 않는 것이 강호의 관례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도우빈의 모습은 무례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성내기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이런 때에는 어리다는 게 장점인 셈이었다.
난처하여서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하고, 승찬은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단청은 아닌 척하지만, 귀를 쫑긋 세웠다. 맹구도는 백왕갑을 딱 세운 채 사방을 경계한다고 전혀 이쪽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고진무가 나섰다고 하지만, 계곡을 타고서 예상치 못한 곳으로 습격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경계하는 그의 모습은 한참이나 신중했다. 지금 어려움을 모면하겠다고, 맹구도를 찾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이, 이런…….”
난처해할 때, 백란이 덜컥 입을 열었다.
“그렇게 특별할 건 없는 사연이란다. 집안에서 반대하는 통에, 손잡고 튀었을 뿐이지.”
“헤에.”
“우와우!”
도우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단청은 묘한 탄성을 흘렸다.
그야말로 민담이나 잡가에서나 듣던 사랑의 도피라는 건가.
“란, 란매…….”
오히려 가장 놀라고 당황하는 건 승찬이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백란을 바라보았다.
“말하자면 그렇잖아요. 자세하게 미주알고주알 말할 것도 아니고.”
“그, 그렇긴 한데.”
“약간 덧붙여서 말하자면, 가문의 사이가 실로 철천지원수나 다름없어서. 그리고 원수 가문의 적장자, 다음 가주 소리를 들을 사람이라고 하니.”
“오오.”
도우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신없이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는 승찬의 모습을 새삼 다시 보았다.
“이야, 그럼. 형이 냅다 손잡고 같이 튄 거예요?”
“어, 그게. 그건. 음.”
“비슷하지요. 도 소협.”
승찬이 주저할 때에, 백란이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음, 아니구나.’
‘아니네.’
도우빈도, 단청도, 동시에 생각했다.
승찬이 거짓말 못하는 성격이라는 건 분명히 알겠다.
아무리 모닥불을 뜨겁게 태우고 있다지만, 사람의 귓불이 저렇게까지 달아오르는 건 불길 때문일 리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둘의 눈길이 백란에게로 향했다. 그는 낯빛에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싱긋 웃으면서 차분한 기색을 보였다.
처음 불가로 나섰을 때에는 워낙에 굶주리고 지쳤을 뿐만 아니라, 승찬이 나서서 그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잘 알지 못했다.
지금 다시 보는 백란은 실로 장부의 기개가 있었다.
가녀린 외모는 그저 겉모습일 뿐이었다.
백란은 자세를 고쳐 잡고서 신중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보았다.
“우리 사연은 이 정도입니다만, 두 분께서는 어떤 분이신지요?”
차분한 눈빛은 꽤 묵직했다. 단청은 누군가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유운관 대사저, 주약현이다. 벽섬유운이라고 하는 그의 경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딘지 닮았다.
단청은 잠깐 입술을 삐죽였지만, 곧 손을 털었다. 잿가루가 흩어졌다.
“종남파 속가, 단청이에요.”
“종남파!”
백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곧 도우빈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아니에요.”
“그럼 도 소협은 홍련사 제자시로군.”
“어?”
말도 안 했는데 어찌 홍련사까지 짐작하였는지. 도우빈은 눈을 끔뻑거렸다. 저도 모르게 요광을 돌아보았지만, 요광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백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기 계신 분 뒤에 솟은 붉은 칼자루를 보고서 홍련사를 알아보지 못해서야 말이 되지 않지요. 종남이 아니라고 한다면, 홍련사 제자일 수밖에.”
“그게, 그런가.”
도우빈은 잠깐 눈동자를 굴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지경이 되어서 굳이 출신 내력을 감추는 것도 바른 일은 아니겠지요.”
백란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손을 사뭇 진지하게 맞잡았다. 공수(拱手)하는 그 모습은 강호의 포권과는 약간 달랐다.
요광은 얼굴 덮은 죽립을 치우고서 턱을 세웠다.
“뭐냐, 양가 계집.”
“본가인 줄 알고 계셨습니까?”
“네 녀석 보법이 양가의 팔로보(八路步)더군.”
요광은 딱 잘라 말했다. 전혀 의심하는 바도 없었다. 불가로 경계하면서 다가설 때에 저도 모르게 드러낸 보신경을 알아본 것이다.
그러자 백란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공수한 손을 눈앞까지 들었다.
가슴을 펴고 허리를 세우자, 가녀린 기색이 싹 사라졌다.
“하하, 양가의 여식, 양백란이 인사드립니다. 홍련사의 혈도승을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흥!”
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요광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그래도 마냥 드러눕지는 않고, 일어나 앉았다. 삐딱하게 기울인 눈초리가 백란, 아니 양백란을 직시했다.
양백란은 그럼에도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 양가와 혈사는 확실히 구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청과 도우빈은 슬그머니 머리를 맞대고서 나직이 속닥거렸다.
“양가라고 하면, 그 양가장인가?”
“그렇겠죠. 충렬 양가장.”
“헤에…… 아니, 그럼. 저쪽은?”
둘은 멀뚱히 있는 승찬에게로 눈길이 향했다. 양가와 철천지원수라고 할 만한 가문이 어디에 있을까 싶었다. 눈길을 받자, 승찬도 얼결에 공수하며 말했다.
“어, 그러니까. 반가의 승찬이라고 합니다.”
단청은 헤에,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보다 강호 견문이 넓은 요광, 도우빈, 심지어는 등 돌리고 있던 맹구도도 퍼뜩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백란이 양가라는 건 그렇게까지 놀랄 일은 아니지만, 승찬이 반가라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맹구도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으억! 양가와 반가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