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401
401화. 종남검(終南劍) 태극세(太極勢) (1)
‘교’는 한없이 혼란한 세상을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과연, 성마의 복권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교’는 강호무림을 떠나서, 만천하의 혼란을 도모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바 없는 과격한 행보였다.
개방이 파악하기로, 당장 성시 사이에 거래가 위축되고, 마을마다 인적이 드물어지면서, 흉험한 일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황성이 자리 잡고 있는 동경 근교에서도 그런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질 정도였다.
다른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건만, ‘교’의 행사로 인해 중원에서는 굶주린 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외딴 마을은 텅텅 비었다.
민생이 흔들리고, 백성들이 신음하기 시작했다.
‘교’의 진정한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더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때에 하동으로 상당한 미곡이 들어간다는 것은 ‘교’가 보기에 달가운 일이 아닐 터였다.
하동을 초토화시킨 쪽이든, 상거래를 억누르는 쪽이든.
곡가의 하동행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장사원 역시 경계하고 있었다.
곡가로 향할 때에 계속된 습격, 그 이면에 있는 치졸하고 음습한 수단은 분명 ‘교’와 무관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고진무와 반갑게 마주하면서도, 기감을 곤두세워 일대를 살피지 않았던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접근하는 기척을 바로 감지했지만, 막상 발밑에 은밀하게 고인 안개까지는 경계하지 못했다.
‘안개?’
태행산맥의 아득함을 생각하면 종종 산무가 고이는 것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잠깐이지만 눈앞이 흐려졌다는 것이었다.
“흡!”
장사원은 기이함을 느끼자마자 숨을 딱 삼켰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부랴부랴 다잡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현문정종의 순양공을 완성한 장사원이었다. 그런 자신의 이목이 잠깐이지만 흐트러질 정도라니, 상대는 대체 뭐라는 작자란 말인가.
그때, 바로 가까이에서 섬뜩한 검명이 울렸다.
지이잉!
그리고 한줄기 섬광이 곧게 솟구쳤다.
발검과 동시에 뻗어 가는 일검의 궤적이 고여 가는 옅은 산무를 그대로 갈랐다. 드러난 안개 사이에서, 고진무가 서릿발 같은 안광을 번뜩였다.
“진무, 자네 괜찮은가?”
“예, 진인. 무슨 수법인지는 모르겠지만, 깜빡하고 정신을 놓칠 뻔했습니다.”
“후우, 빈도도 다르지 않네. 이래서야 현문의 제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럽구먼.”
“그것은 단순한 사술(邪術)이 아니라는 것이겠지요.”
“과연, 그도 그렇군.”
장사원은 신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환술이라고 어디 전부 사마외도라고 할 수 있을까.
현문의 정심이 흔들릴 정도이니. 이 또한 정종의 술법일지 누가 알까.
남은 안개가 주변을 서서히 맴돌았다.
두 사람의 뒤에서는 일백에 이르는 곡씨의 일꾼들 그리고 개방도들이 눈이 풀려서 휘청거리거나, 자리에 푹푹 주저앉기까지 했다.
독한 술이나 지독한 졸음에 취하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와중에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시랑의 한 사람인 철심개, 그리고 고진무에게는 뜻밖이었지만, 곡가의 시비였다.
두 사람은 변고를 깨닫고 바로 정신을 차리고자 다급하게 운공에 들어간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더라도 바로 정신을 차리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철심개 선배께서도 바로 반응하시는군요. 헌데, 저 시비는 대체?”
“음, 살정의 동급 살수더군. 곡가 큰 아가씨를 호위하는 의뢰를 수행 중이라지.”
“살정이요?”
고진무의 눈초리가 순간 날카롭게 돌변했다. 이런 와중이지만, 살정 살수는 충분히 위험한 상대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살정은 이미 ‘교’의 일원이다.
“살정이라고 다 같은 생각은 아닌 모양일세. 저기 있는 동급 살수는 ‘교’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더군. 뭐, 내 눈마저 속인 것이라면 할 말 없는 일이네만.”
“그렇군요. 진인께서 그리 보셨다면야.”
고진무는 곧 적의를 바로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흩어졌던 안개가 다시 짙게 맴돌았다. 안개를 부르는 당사자가 바로 목전까지 이르렀다는 뜻이지 않겠는가.
장사원은 사뭇 차갑게 중얼거렸다.
“어떤 작자일지 모르겠군.”
“진인, 여기는 제가 붙들고 있겠습니다.”
“음? 그게 무슨 말인가?”
“술사 하나가 혼자 움직이지는 않았을 듯합니다. 환술로 이목을 속이는 자가 있다면, 뒤를 따로 처리하는 무리도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하기야, 저 수레와 미곡을 그냥 두지는 않겠지. 헌데, 괜찮겠나?”
“제게는 본파의 청명검이 있으니. 환술을 상대하기에 더욱 수월할 겁니다.”
“청명…….”
장사원은 새삼스레 고진무가 비스듬히 늘어뜨린 청명검의 검신을 바라보았다.
고진무는 ‘정주일여’의 경구를 소리 없이 읊조렸다. 자신을 다잡고, 청명검을 고쳐 잡았다.
지이잉, 지이잉.
청명검이 신기를 품고서 법보의 반열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단지 금단절옥의 보검이어서라든가, 파사의 검기를 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청명검이 스스로 천지와 감응하기 때문이다.
안개가 한층 짙게 모여들면서 발치에 하얗게 고였다. 그때까지도 고진무는 청명을 미간 앞에 세운 채 자신을 다잡았다.
안개는 눈속임, 진짜 그 속에 숨어 있는 술법의 흐름이리라.
“천지분획.”
고진무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힘 있게 나아가면서 청명검을 떨쳤다.
서걱!
천지를 구분하는 일검의 궤적, 허공이 덜컥 갈라졌다.
고여 가는 안개가 주춤하더니, 이내 힘없이 흩어져갔다. 안개를 불러오는 흐름을 확실하게 끊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사라진 자리에, 잿빛 일색으로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한참 여유를 드러내면서 거닐듯이 다가오다가 당황하여서 멈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안개가 흩어지는 광경을 빤히 지켜보았다.
“아주 여유로우시군.”
고진무는 고개를 치켜들고서 두리번거리는 잿빛 인영의 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잿빛의 인영, ‘교’의 경일사령은 자신의 수법이 흩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바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어떻든 고진무는 그를 맞이하듯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잿빛의 초로인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것처럼 흐릿한 눈동자가 초점을 되찾고서, 고진무를 빤히 바라보았다.
“흐으음.”
그는 미간을 모으고서, 입술을 한껏 삐죽였다. 그리고 하얗게 물들어 가기 시작한 뾰족한 수염 끝을 배배 꼬았다.
의뭉스러운 눈초리가 늘어뜨린 청명검을, 그리고 검을 든 고진무를 번갈아 훑었다.
“자네가 화룡인가?”
“아니오.”
“아, 아니야? 허, 허헛.”
고진무는 딱 잘라 말했다. 장사원을 알고 움직인 자라는 건 역시 낙양에서, 어쩌면 그 이전부터 손을 쓴 자일 수 있었다.
‘진인이 말했던 음습한 음모도 저자의 소행인 건가?’
의문이 떠올랐지만, 고진무는 바로 다잡았다.
지금은 고민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잿빛의 초로인은 더더욱 모를 얼굴로 고진무의 위아래를 살폈다. 그는 어떻게든 고진무의 정체를 떠올려 보겠다고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 한참만에야 소리 내어 물었다.
“그럼, 대체 어디 뭐라는 젊은이인가? 무명은 아닐 터인데.”
“종남 제자, 고진무라고 하오.”
“종남. 종남이라고?”
“말씀하시는 고인께서는 어느 분이시오?”
초로인이 종남의 이름을 거듭 읊조리는데,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고진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바라보는 눈초리는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찌르는 시선을 받고서 초로인은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어, 그게…… 어디냐면…….”
초로인은 얼결에 더듬거렸다. 하마터면 그대로를 토해낼 뻔했다.
“허헛, 허흠! 어린놈이 심계가 제법이로구나. 그런 몇 마디로 본 사령의 정체를 파악해 보겠다는 게냐?”
“…….”
심계는 무슨 심계인지.
어떻든 고진무는 초로인이 ‘교’의 사령이라는 것은 알아낸 셈이었다.
고진무는 호흡은 차분하게 하면서도, 예리한 눈초리로 사내의 속내를 꿰뚫어보듯이 노려보았다.
자신과 장사원도 깜빡 이목이 흩어졌을 정도였다. 아무리 환술이니, 눈속임이니 해도, 보통의 경지로 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은가.
고진무는 청명검을 손에 올린 채, 툴툴거리는 잿빛의 초로인을 빠르게 살폈다.
경일사령은 혼자 고민하다가, 불현듯 헛웃음을 흘렸다.
‘교’에 몸담은 세월이 수년이라고 하지만, 그는 뚜렷하게 활동한 바가 없었다. 천성이 태평한 탓도 있지만, 그의 재주는 본래에 사람을 속이고, 판세를 흔드는 데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낙양을 중심으로 일대를 혼잡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가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 일을 하게 된 것에 다른 불만은 없었다.
나름의 사명이건 대업이건 다 잊은 지 오래였으니까.
종남파의 이름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다는 풍문을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단지 손해 보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환몽선결이라는 환몽의 술수, 비록 제대로 위력을 드러내기 전이었다고는 하지만, 고작 일검으로 깨질 정도로 얕은 수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 게다가 화룡이 어쩌고 하는 녀석도 아니란 말이지? 허참, 그것참.”
혼잣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한없이 어이가 없었다.
경일사령은 자신의 환몽이 무너지는 것을 눈으로 보았음에도 도통 믿기지 않았다.
걸린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너무도 생경할 따름이었다.
“허으음.”
한숨을 삼키면서, 그는 나선 종남의 젊은 검객을 물끄러미 보았다.
“화룡이라는 녀석이 있을 텐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저 젊은 놈이 역시 믿을 만하다는 건가?”
경일사령은 괜히 생각이 복잡하게 꼬였다.
그의 잿빛 일색으로 주름이 짙은 얼굴에는 당황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채, 고진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고진무는 청명검을 사선으로 길게 늘어뜨리고서, 경일사령과 대치 아닌 대치를 유지했다.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고수의 반열에 이른 이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켜보면서 고진무는 호흡이 차분했다.
등 뒤에서는 안개를 가르면서 사령의 음습한 한 수를 파훼한 덕분에, 몽롱함에 취했던 일행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렇더라도 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마치 단잠에서 강제로 깨어난 기분일 터였다. 그나마 철심개가 정신을 차리고 일행을 챙기기 시작했다.
고진무는 뒤쪽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선수를 취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눈앞에 있는 잿빛 일색의 사령 또한 다른 생각에 빠진 것인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이게 그리되나? 아니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허어…….”
혼자 생각에 취하여서 주변을 잊은 모양새였다.
한눈에도 허점투성이로 다가가 푹 찌르기라도 하면 끝날 듯한 꼴이다. 그러나 고진무는 동요하지 않았다.
이제껏 ‘교’의 인물을 상대하면서 체득한 것은 단 하나, 보이는 대로 믿지 말라는 것이다.
저들은 무공의 고수이든, 술법의 종사이든, 매한가지로 속고 속이기를 즐기는 자들이었다.
어쩌면 그런 자가 ‘교’의 포섭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고진무는 고요하게 청명검을 흔들었다.
지이잉, 지이이잉.
검이 가늘게 울었다. 차분하면서도 섬뜩하였다. 그리고 파사의 기운이 담뿍 실려 있었다.
혼자 구시렁거리던 사령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흔들리던 눈동자가 딱 멈춰서 고진무를 보았고, 늘어뜨린 청명검을 번갈아 보았다.
“어허헛? 법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