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88
88화. 종남박운(終南薄雲) (3)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무림 일문이 보통 그러하듯, 대부분은 날이 채 밝아 오기도 전에 새벽 수련으로 단련을 시작하는 바이니.
고진무는 해가 뜰 때에 겨우 정신 차리고서는 부랴부랴 빈속을 채웠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푼 다음에 우문화청을 마주했다.
정검관 중정, 그 자리에는 정검의 글자가 높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 우문화청이 꼿꼿한 모습으로 의자에 앉았다.
“괜찮으냐. 어찌 더 쉬지 않고?”
“푹 쉬었습니다. 대사형.”
“흠, 푹 쉰 얼굴이 전혀 아닌데.”
우문화청이 걱정하는 말에 고진무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우문화청은 미간을 모으고서 여전히 야윈 고진무의 낯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눈빛이야 맑았지만 원행에 몸이 지친 것은 티가 안 날 수가 없다.
고진무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고 하니 알겠다. 그래도 조심하거라. 당분간은 무리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당장은 몰라도, 여독이라는 건 조용히 쌓이는 법이다.”
“주의하겠습니다.”
“석량 녀석 일은 대강 알겠다. 그리고 네 녀석도 말이다.”
이미 우문화청은 장문인께 두루 상황을 듣고 난 다음이었다. 와중에 고진무가 벌인 일, 아니 휩쓸린 강호 상황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어이없다는 반응이 먼저였다.
고진무는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면서 괜히 마른침을 삼켰다.
“참, 강호를 통틀어도 초행부터 너처럼 파란만장한 녀석은 달리 없을 게다.”
“헤, 헤헤.”
“아이구야.”
머쓱함에 그저 맥없는 웃음만 나올 뿐이다.
우문화청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녀석은 이런다고 골치이고, 저 녀석은 저런다고 골치이니.
우문화청은 곧 쓴웃음을 그리면서 손을 내렸다. 마냥 고진무를 타박할 일은 아니었다. 대강이나마 고진무는 종남파 제자로서 부끄러움 없이 나섰고, 마땅히 수행해 낸 셈이다.
“한데 석가 일은 이후로 아는 바가 없느냐? 어디로 가문을 옮긴다던가 말이다.”
“예, 대사형. 제가 석가를 나설 때에 가문을 옮긴다는 결정을 겨우 하셨던 터라, 따로 들은 바는 전혀 없습니다.”
“그렇군. 하기야 가문을 옮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느냐만…….”
우문화청은 슬쩍 미간을 모았다. 일단은 알겠다는 듯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엇인지 걱정이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어찌 그러시는지요?
“요사이 천하가 뒤숭숭하다고 하니, 솔직히 걱정이로구나.”
난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요사이에 특히 민심이 크게 흉흉했다.
하동 땅에서 이미 마적이 횡행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나.
황도가 자리한 경기로를 비롯해, 황도와 가까운 일대는 그래도 치안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동서남북으로 조금만 멀어지면 소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게 지금 천하의 상황이었다.
근자에는 국경마저 위태하다고 하니.
특히 석가가 자리하였던 하동 북방은 이제껏 큰 소란이 없었다.
그런 석가가 가문이 흔들릴 정도로 위태했고, 그 영향으로 가문의 터전을 옮긴다고 하니.
우문화청은 잠시 미간을 모았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그보다, 본산도 요새 크고 작은 말썽이 끊이지를 않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산문에서 본 소보의 얼굴이 좋지 않더군요.”
“막소보, 그래. 녀석이 특히 애를 많이 썼지.”
종남파에 크고 작은 시비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또는 무슨 속셈 때문인지, 도통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처음에는 산 아래를 내려갈 때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와서 시비를 거는 자들이 있었단다. 그러려니 하였는데, 며칠 전부터는 아예 산문으로 달려와서 무작정 시비를 거는 판이다.”
“그런…….”
고진무는 눈살을 모았다.
대범하다고 해야 할지, 치졸하다고 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와중에 산문 앞으로 달려드는 몇몇을 막소보가 정중하게 대하는 동시에, 단호하게 쳐 내어서 상황을 잘 수습하였다.
“그런 일이 한 달간 이어지고 있어서 다들 약간은 날이 선 마당이란다.”
“소보가 고생했군요. 그럼, 다음은 제가 산문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음, 안 그래도 부탁할 일이다. 그래도 아직은 몸을 살펴야 할 때이니.”
우문화청은 손을 흔들었다. 고진무는 더 고집하지는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우문화청이 퍼뜩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보다 한번 보자꾸나.”
“예?”
“너와 석량이 같이 있었으니, 또 성취가 있지 않았겠느냐.”
우문화청은 검을 자리에 놓고서 소매를 둘둘 걷어 올렸다. 몸을 살피는 건 살피는 것이고, 성취를 보는 건 또 다른 일이 아니겠나.
그는 싱긋 웃으며 펼친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진실로 궁금한 것이다. 고진무와 석량이 같이 고민하여서 기어코 사문의 어른들에게 인정까지 받은 무공이.
“얼추 십여 초 정도만 손속을 나누어 보자꾸나.”
“그럼, 대사형.”
고진무는 두 손을 꾹 맞잡아 보였다. 우문화청은 옷자락을 걷어 허리춤에 턱 꽂아 넣고는 턱을 당겼다.
신중한 눈가에 별빛이 맺히는 듯했다. 호흡과 공력을 다잡고서, 그는 짧게 말했다.
“오너라.”
“예!”
어찌 마다할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다. 고진무는 내처 발을 굴렀다.
꿍!
발 구름 소리가 벼락처럼 울려 퍼졌다.
화룡진인 장사원에게 받은 이름, 풍운삼세.
그 바탕을 다시 쌓아 올려서 형을 이루어 냈다. 지금의 풍운삼세는 하동에서 펼쳐 냈을 때와는 또 달랐다.
고진무는 거침없이 일대를 휩쓸었다. 쌍장으로 유려하게 펼쳐 내니, 손 그림자가 풍운처럼 사방을 메웠다.
우문화청은 공력을 집중하였지만, 쉽사리 파고들지 못했다.
“이런…….”
절로 낭패한 소리가 흘렀다.
검을 뽑아서 떨쳐 낸다면 어찌 파고들겠지만, 그 정도에 이르면 이제 서로 견주어 보는 수준이 아니라 생사투에 버금가지 않겠나.
맨손으로서는 아무래도 어렵다.
우문화청 또한 정검관 제자로 벽괘구권과 대소쌍환장을 부족함 없이 연마하였지만, 그것으로는 풍운처럼 몰아치는 고진무의 장영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종남파 검객의 눈으로 보기에는 풍운을 일으키는 권장은 낯설지 않았다.
저 또한 종남 무공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음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채 십여 초를 버티지 못하고, 칠성보를 밟아서는 거푸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말 꺼낸 십여 초가 무색한 일이었다.
그제야 고진무도 공력을 수습했다. 풍운을 그려 낸 장영이 흩어졌다.
고진무는 십자수를 취하면서 가만히 숨을 밀어냈다.
“하, 하하. 이것 참. 그래 멀쩡하구나. 아주 멀쩡해.”
“대사형.”
여독 운운한 것이 새삼 우스울 정도였다. 저리 펄펄 날아다니는 녀석이니.
저 정도면 절정에 버금가는 경지라는 건 분명한 일이었고, 경험 또한 못지않게 늘었다. 그 성취를 알아볼 만했다.
우문화청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권장으로 이러하다면, 과연 검을 들면 어떠할지.
‘아니지, 아직은 아니지.’
우문화청은 자신을 다잡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은 종남파의 새로운 권장공에 대해서 같이 말하는 게 먼저이지 않겠나.
“참으로 훌륭하다. 정검, 유운, 송영의 모든 무리가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전적이라는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구나.”
“부, 부끄럽습니다.”
“아니,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지. 응당 자랑스러워야 할 일이 아니냐.”
우문화청은 하하, 웃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 이름을 정하였느냐?”
내내 이름을 붙이지 못하여 무명 어쩌고 하였지 않았던가.
“예, 이번에 석가에서 화룡진인을 뵈었습니다.”
“중여화룡의 화룡진인을 말이냐?”
우문화청은 새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젊은 고수 중에서 당대에 손꼽는 검객이 아닌가.
칠신에 비할 바는 아니나, 언제인가 그에 이를 수 있다는 고수라고 천하가 인정하는 이름이었다.
“예, 대사형. 그분에게 조언을 받기도 하였지만, 명명을 부탁드렸지요.”
“하여서?”
“풍운삼세라 합니다.”
“풍운…… 풍운이라. 그 이름은 확실히 잘 지었군.”
우문화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검, 유운, 송영, 종남의 세 줄기 흐름 속에서 풍운을 일으킨다.
고진무의 성취도 그러지만, 이것이 더욱 경지에 오른다면 가히 신장이라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듯했다.
“향후에는 풍운신장(風雲神掌)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어.”
“과, 과찬이십니다. 대사형.”
고진무는 귓불이 이제는 발갛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신장씩이나. 이제야 첫발을 뗀 풍운삼세가 아닌가.
우문화청은 하하, 웃기만 웃었다. 그러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어떠냐? 너희가 생각하기에도 과찬인 듯싶으냐?”
“엇?”
고진무는 저도 모르게 흠칫하여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중정 앞에 모든 이들이 빤히 모여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누구는 당황한 눈초리, 누구는 멍한 눈초리.
여하간 고진무를 향해서 집중한 눈초리라는 점은 분명했다. 고진무는 아이코, 앓는 소리를 절로 흘리고 말았다.
정검관 제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단순한 무공이 아니다. 종남파 무공의 기본을 다시 세울 수도 있는 무공이었다.
보신경을 포함해서, 권장지각의 무공을 아울렀다. 그리고 우문화청의 말마따나 대성하면 신장에 이르는 비결이 될 수도 있다.
다들 부족함이 없는 검객들인지라 고진무가 펼쳐 낸 풍운삼세를 보자마자 번쩍 눈을 떴다.
누구는 완성도에 감탄했고, 또 누구는 자신에게 부족한 무언가를 메워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만큼 열의가 확 타올랐다. 하지만 당장 고진무가 ‘풍운삼세’를 전할 수는 없었다.
장문인과 여러 어른에게 보여야 함은 물론이고, 같이 창안한 석량이 당장 없기 때문이었다.
끓는 관심 앞에서 고진무는 그저 난처할 뿐이었다.
“자자, 정리하자. 지금 무공인 풍운삼세는 석량이 돌아오고 나면 제대로 서책으로 남길 터이니. 당장 너희가 서두를 것 없다.”
“그, 그래도 대사형.”
“눈 반짝거리지 말고. 진무도 고민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 정리하기가 어디 쉬운 일이냐.”
무공을 창안한 것도 그렇다고 하지만, 이를 정리하여서 후대에 남긴다는 건 또 다른 어려움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고진무는 흠칫하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생각하니, 비급으로 남기는 일은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석량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면서 그걸 나름대로 문서로 남기면서 정리하기는 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풍운삼세 전체를 아우르지 못하니 비급이라고 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다. 다른 누구에게 보인다고 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다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다시 다듬어야 비로소 비급이라 할 수 있다.
“아이쿠…….”
뜨악한 그 모습을 우문화청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퍼뜩 눈썹을 치켜들었다.
“네놈들 비급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더냐?”
“헤, 헤헤. 헤.”
고진무는 머쓱하게 웃기만 웃었다. 꾸짖듯이 묻는 말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