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52)
>52 화>
“제 눈은 다 보셨나요?”
페리얼이 천천히 플루트를 아래로 내리며 말했다.
그녀가 서서히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황금색을 바라보며 느리게 입술을 열었다.
“페리얼의 눈…… 무척 아름다웠어요.”
카리나의 한마디에 페리얼이 숨을 삼켰다.
“마치 태양 빛을 받은 꽃이 피었다 진 것 같았어요.”
적나라한 그녀의 말은 보통 상대의 눈앞에서는 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사람과 거리를 두고 살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흑 치고 들어온 그녀의 말에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페리얼은 기묘한 기분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껏 받은 칭찬 중에 가장 호화롭게 느껴지는 칭찬이네요.”
페리얼이 빙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카리나가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갑자기 플루트는 왜 부신 거예요?”
“돌아다니기 좀 편하게 할까 싶었죠.”
페리얼이 당당하게 방문을 활짝 열었다.
의아한 눈을 한 카리나가 망설이자 페리얼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그녀를 방 밖으로 끌어당겼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거예요.”
당당한 그의 말에 카리나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는 페리얼을 따라 복도를 걷다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사용인인 듯 보이는 시녀 한 명이 바닥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설마 죽인 거예요?!”
카리나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아뇨, 아뇨! 당연히 그냥 잠이 든 겁니다. 아무리 저라도 사람을 죽이진 않습니다.”
“아…….”
페리얼의 곤란한 표정에 카리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가 이윽고 새빨갛게 물들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얼굴색을 보던 페리얼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카리나가 절 살인마로 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 걸요.”
“아니에요……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설마 잠이 들게 할 줄이야.
확실히 저택에 사람이 그렇게 많을 텐데 주변은 적막했다. 복도를 걷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아벨리아의 방문을 바라봤다.
반사적으로 문을 열려던 그녀의 손을 페리얼이 붙잡았다.
“조건이 있다면서요.”
“아…….”
그제야 그녀가 놀란 눈으로 냉큼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맞다. 제 손으로 열면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통로가 생길 뿐이다.
카리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페리얼이 대신 손잡이를 붙잡아 문을 열어젖혔다.
“……정말 자네.”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아벨리아는 뭘 하고 있었는지 책상에 앉아 엎드려 있었다.
카리나가 가만히 잠이 든 아벨리아를 바라보다가 레이스와 각종 인형, 장신구로 가득한 방을 훑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벨리아의 방 밖으로 나온 그녀가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보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보고 싶은 사람이요?”
“네, 모두 잠에 들었으니 가서 보고 와도 돼요.”
“없어요.”
카리나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보고 싶은 사람은커녕 지난 몇달간 생각난 사람도 없다.
집무실로 걸어가는 내내 카리나의 심장은 버거울 정도로 빠르게 뛰었다.
그것이 공포감에서 비롯된 감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를 마주보고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호흡이 가빠지고 숨이 버거웠다.
페리얼은 새파랗다 못해 아주 새하얗게 질려 가는 카리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가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페리얼이 미소 지으며 그녀 대신 집무실 손잡이를 돌려 느리게 문을 열었다.
점점 벌어지는 문틈을 바라보며 카리나는 숨을 멈췄다.
“아…….”
활짝 열린 집무실을 본 카리나가 낮게 탄식했다. 집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집무실 안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딱 한 번, 집무실에 왔다가 일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크게 혼이 난 카리나는 그 뒤론 이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 근처에 올 때마다 우레처럼 쏟아지던 그 커다란 목소리가 다시 머리 위부터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이었으니까.
“괜찮아요, 카리나?”
“네, 고마워요.”
카리나는 집무실에 놓인 책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바닥에 깔린 러그는 부드러웠고 집무실 책상은 펜과 몇몇 액자 등을 제외하면 깔끔했다.
그녀가 품에서 새하얀 편지 봉투에 담긴 편지를 꺼내 책상 중앙에 내려놨다. 밀랍으로 밀봉도 하지 않은, 어떻게보면 성의없는 편지였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책상 위를 살폈다. 책상 위에는 작은 초상화들이 놓여 있었다.
아벨리아의 것, 인프릭의 것, 페르던의 것, 어머니의 것.
다양하게 놓여 있는 액자 가운데 제 것은 없었다. 카리나의 얼굴이 천천히 굳어졌다.
“가끔 이런 걸 제 눈으로 확인할 땐 무척 서글폈어요.”
페리얼이 뜬금없이 입을 여는 카리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근데 지금은 그냥 내가 이것밖에 안 됐구나 싶어요.”
세상 밖에 나가 보니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
생판 모르는 남이 걱정되어 남쪽에서 북쪽까지 먼 길을 달려와 주는 이도 있고 몇 년을 왕래가 없었는데도 제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럼 그냥 저도 이 사람들을 이 정도로만 대해 주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굳이 더 아플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보면 간단했다. 이 관계에서 자신이 아픈 이유는 자신에게 가시를 두른 사람들을 자꾸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 가시를 붙잡으려 하지 않으면 아프지 않을 텐데.
“페리얼.”
“네.”
“밀라이언에겐 제 예술병에 대해 말하지 말아 주세요.”
“……어째섭니까?”
페리얼이 미간을 좁혔다.
도움을 청한 것은 밀라이언이었고 어쨌든 그는 페리얼의 친우였다.
아무래도 속이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내가 밀라이언을 이용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절 싫어하게 될걸요. 그리고 죄책감도 느끼겠죠.”
“…….”
“저는 이번 겨울이 지나고 봄쯤 되면, 제 상태를 보고 저택을 떠나려고 해요. 밀라이언과는 계약을 마친 깔끔한 상태로 헤어지는거죠.”
약속을 지키는 것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아마도 밀라이언은 그녀를 더 이상 막지 않을 것이다.
함께 지내면서 생각보다 그의 성격이 우직하다는 걸 알게 된 카리나는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굳이 안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지 않아요.”
“……왜 자꾸 죽는 걸 전제로 두는 겁니까?”
“사람에겐 감이라는 게 있잖아요.”
카리나는 두려움도 없는 표정으로 그저 포스스 웃음을 흘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물어뜨리는 입가를 바라보며 페리얼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 몸상태는 내가 잘 알아요. 이건…… 고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고칠 수 있을 거였다면 애초에 많은 사람들이 고쳤을 것이다.
그림을 놓기에도 사실 이미 늦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반 년 남짓이다.
이제 와서 그림을 놓아도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었다.
페리얼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끝을 준비한 사람답지 않게 그녀의 심지는 굳건했다. 카리나는 그 심각한 눈빛을 보며 쓰게 웃음을 삼켰다.
“……할 일을 다 했다면 돌아갈까요?”
“네.”
페리얼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에게 제안했다.
카리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열어 둔 집무실을 닫고 살짝 몸을 비틀어 비켜섰다.
카리나가 집무실 손잡이를 붙잡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돌려 밀었다.
복도가 나와야 하는 방문 밖에는 유화 냄새가 풍기는 화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정말 못하는 게 없을 정도군.’
창조자들에겐 각자 어느 정도 제한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녀에겐 그런 한계가 없는 듯한 느낌이 었다.
정말 신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음, 같이 가줘서 고마웠어요, 페리얼. 덕분에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천만에요.”
페리얼이 웃음기 가신 표정으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뚝 자리에 선 그는 어쩐지 말이 없었다.
심각한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 보던 카리나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뭔가 기분이 나빴던 건가?’
비스듬히 모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페리얼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카리나를 바라봤다.
“궁금한 게 있는 데 물어도 되겠습니까?”
“궁금한 거요?”
“네, 예술병의 진행 속도에 관해서입니다.”
속도? 무슨 진행 속도를 말하는 걸까?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페리얼이 숨을 들이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기적이라는 것은 그렇게 무한하지만은 않다.
반드시 제약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존재하고 한계점이 있다.
기적을 쓰는 이들 중에서 예술병에 걸리는 이들이 드물게 나타나고 그들은 무언가를 대가로 내 주며 ‘한계점’을 넘어서곤 했다.
페리얼은 예술병에 걸리지 않은 기적의 사용자였기에 그도 한계는 존재했다.
“혹시 기적을 사용할 시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그러니까 금기시되는 사항을 알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