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93)
>93 화>
* * *
“후우…….”
궐련에서 뿜어진 연기가 하늘로 날아가 흩어졌다.
짜증을 다 풀긴 했는데 여전히 속이 답답했다. 기왕이면 마수를 토벌하러 나갔어야 했던 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젠장.”
침착하려고 해도 쉽게 침착해지지 않았다.
감정을 전하지 못한 건 둘째 치고 움찔움찔 몸을 떨던 카리나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자꾸만 아른거렸다.
자신이 그렇게 무섭게 굴었던가?
처음을 제외하면 최대한 다정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다정하게 대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뭐가 그렇게 답답하십니까?”
“꺼져, 할아범.”
“이런, 그렇게 듣는 것도 오랜만이군요. 예쁘고 참한 아가씨였습니다. 행동거지를 보아 귀족의 자제분 같던데 아니십니까?”
슐라이 레온하르트는 밀라이언을 그다지 무서워하지 않았다.
겁을 줘도 놀란 척을 하거나 아예 못들은 척을 할 정도면 말 다 한 것 아니겠나.
“맞아. 사정이 많아서 그쪽이랑은 연을 끊은 모양이지만.”
“이런.”
“상처가 많으신 분은 원래 한 발 내딛기를 두려워하는 법이죠. 누구나 그렇습니다. 아픔이 있으니 또 그 아픔을 겪는 게 싫은 거지요.”
슐라이의 말에 밀라이언이 말없이 궐련을 깊게 빨아들였다.
그래도 궐련을 피울 때는 감각이 둔해지고 기분이 느슨해져서 좋았다. 토벌 중엔 피울 수 없겠지만.
“병에 걸렸어.”
“병이라…….”
“그래서 그걸 치료해 주려고 하론을 모으라고 한 거고. 그러면 나을 수 있을 텐데 자꾸만 떠나겠다고만 하지. 이유를 모르겠어.”
“어떤 병입니까?”
밀라이언의 입이 다물어졌다. 글쎄. 그도 어쭙잖은 지식만 들은 것이라 정확히 알지 못했다.
페리얼은 어쩐지 뭔가 숨기는 것처럼 돌려 말하곤 했고 윈스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제대로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계속 되면 어딘가 하나 잃게 되는 병.”
“어떤 식으로요?”
“…….”
그러게, 어떤 식으로 아파져 오는 걸까?
쥐어뜯듯이?
쥐어짜듯이?
아니면 누가 칼로 찔러 대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일까?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린 밀라이언의 입가가 힘없이 가라앉았다.
“아는 게 없군.”
하물며 그 셋이 아닌 전혀 접점이 없는 누군가가 예술병에 대해 조금 알고 있으면 좋을 텐데.
“어쩌다 잘렸지?”
“움직이지 않게 돼서요.”
“움직이지 않아?”
“북부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예술병이라는 조금 특수한 병이 있습니다.”
떠오르는 기억에 밀라이언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보니 그자가 있었지. 화실에 물건을 납품해 준 뒤 제대로 만나 보질 못했다. 그는 예술병을 처음부터 끝까지 겪은 자였다.
결국 팔을 잃게 되었지만 말이다.
“갈 곳이 있어. 적당히 연회를 즐기고 파하도록 해.”
밀라이언이 그대로 대답을 듣지 도 않은 채 테라스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막 달이 떠올라 밤이 된 시점이었다. 막을 새도 없이 이미 말을 탄 밀라이언이 멀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조금 제 또래답게 보이는군요.”
슐라이가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 또래처럼 조급해 보이고 제 또래처럼 안달이 나 보이는 것이 어쩐지 그를 군주가 아닌 사람처럼 보이도록 했다.
멀어져 가는 밀라이언의 뒷모습을 보던 슐라이가 이윽고 몸을 돌렸다. 북부는 이미 완연한 겨울이었다.
* * *
결정한 것을 단번에 실행하는 것도 북부인의 특성 중의 하나였다. 성격이 급하다고 해야 할지, 인내심이 없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그들은 결정한 것을 미루거나 기다리지 못했다.
밤의 거리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덕분에 밀라이언이 빠르게 말을 몰아도 방해될 것은 없었다.
그가 카리나와 갔었던 화방 근처에 말을 세워 두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똑똑.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선 반응이 없다. 하지만 건물 구조를 보아 아마도 이곳은 가게로 사용하면서도 집일 확률이 높았다.
밀라이언이 답답함에 미간을 좁혔다.
쾅쾅쾅!
예의 바르게 문을 두드리는 것은 일단 집어치운 그가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답이 없어 움직이려는데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문을 닫았소.”
“일전에 여기에 와서 화실을 꾸며 달라고 했던 페스텔리오다.”
“……영주님?”
그제야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며 나무문이 끼익 열렸다.
일전에 봤던 팔 하나가 없는 사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군. 급하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아, 괜찮습니다. 그때 값을 무척 넉넉히 치러 주셔서 지금은 좀 여유 있게 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니까요. 일단, 영주님의 저택보단 많이 누추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시죠.”
살짝 몸을 비켜선 그를 따라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전히 유화 냄새가 가득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냄새조차 제법 익숙해져서 그녀를 떠올리게 했다.
“다름이 아니라 예술병에 관한 얘기다. 그대에겐 좀 껄끄러울 수도 있겠군.”
멈칫, 카운터로 향하던 남자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잃어버린 한쪽 팔에 달린 천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예술병……. 그때 그 아가씨의 이야기군요.”
“그래.”
“……죄송하지만 담배를 한 대 피워도 괜찮겠습니까? 맨 정신으론 도저히 자신이 없어서.”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끔찍했던 순간들이다.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 느낌.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더듬더듬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싸구려 담배는 불을 붙이는 순간 독한 냄새를 풍겼다.
연거푸 두어 번 연기를 들이마신 남자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말씀드리지만 치료법 따윈 모릅니다.”
“예술병의 모든 것이 궁금하다. 그대가 팔을 잃게 되는 과정까지가 궁금해.”
“너무 날카로우시군요.”
밀라이언이 품에서 금화가 넉넉히 담긴 주머니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 뒀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남자가 픽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자네에게 괴로운 이야기를 꺼내게 하는 게 미안해서 주는 거다. 다른 의미는 없어.”
“……그렇습니까.”
남자가 다시 담배를 깊게 빨았다. 한숨처럼 내쉬는 그는 담배의 길이가 짧아졌을 때쯤에야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조금 늦은 나이에 예술병에 걸린 케이스였습니다.”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전 나름대로 이름을 알리고 있던 화가였습니다. 어릴 때 시작하는 사람들관 다르게 조금 늦게 시작해서 조금 늦게 꽃봉오리를 맺었죠.”
벽에 기대선 밀라이언은 조용히 그의 고해성사 같은 이야기를 귀에 담았다.
무언가, 그녀가 저렇게 구는 단서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을 담아서.
“굳이 따지자면 이제 막 날아오르려던 참이었죠.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내 그림을 찾기 시작했고 아주 드물게 내 이름이 어딘가에서 들려오기도 했으니까요.”
그 말을 하는 남자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순식간에 남자의 입술은 일그러 졌다.
“그맘때쯤 손에서 한 번씩 경련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고 감각이 마비 되곤 할 때도 있었죠. 가끔은 밤 잠을 못 이루기도 했죠.”
화가에겐 손이 생명이었다. 그냥 가끔 있는 발작이라고 느끼고 넘어가려고 해도 점점 심해지는 통증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더듬 회상하며 남자가 두 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치이익, 남자가 하나 남은 손으로 성냥개비를 들고 나무에 긁어 불을 붙였다. 불이 붙은 성냥개비에 남자가 입에 문 담배를 가져다 댔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의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다음은 짐작 하시겠죠. 예술병을 진단받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했어요. 이제 막 빛을 보기 시작한 그림이었는데.”
일그러진 얼굴에서 원통함이 느껴졌다.
밀라이언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한 위로는 때론 상대의 상처를 건드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예술병을 낫게 하려고 온갖 약을 찾아보고 온갖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또 그렸고 또 그걸 미신이든 영약이든 들려오는 모든 것들에 투자하느라 바빴죠.”
그냥 모든 것이 쳇바퀴였다. 돌고 도는 쳇바퀴 속 일상.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팔고 약을 찾아 헤맸다.
예술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그림의 값어치를 더 높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론 병을 낫게 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통증을 가라앉히려면 그림을 손에서 놓는 수밖에 없었죠. 난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남자가 하나 남은 손을 내려다 봤다.
미약한 통증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둔해진 손이다. 불에 데는 정도의 상처가 생겨야만 어느 정도 감각이 있었다.
“손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덧 왼팔에서만 느껴졌던 통증은 오른팔에도 느껴지기 시작했죠. 마치 통증이 번져 가는 것처럼.”
남자가 독한 담배 연기를 깊게 들이켰다.
더 흡수하고 싶었다. 더 흡수하고 흡수해서 완전히 기억이 없어졌으면 했다. 종종, 과거가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밤, 유독 통증이 없는 날이었습니다. 왼팔도 날개를 단 것처럼 움직이더군요. 밤을 새서 역작이라고 할 만한 그림을 완성했죠.”
남자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가 다 된 시간쯤에 일어났더니…… 왼팔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