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logy of Deficiency RAW novel - Chapter 10
외전 2
두 사람은 호텔 프론트에서 체크인을 한 뒤, 안내받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최상층 스위트룸 이용객만을 위한 프라이빗 엘리베이터여선지 위로 향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한결은 해민의 블라우스 깃을 매만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갈증이 목구멍을 바짝 조여 온 탓이었다. 그는 반쯤 내리감은 눈으로 해민의 얼굴 곳곳을 살폈다. 발갛게 물든 뺨과 연신 혀로 쓸어내리고 있는 입술까지.
“우리, 호텔에서 떡 치는 건 오랜만이네요.”
상스러운 단어 선택에 흠칫 놀란 해민이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결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음욕과 마주한 순간, 명치 아래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해민은 제 옷깃을 만지고 있는 그의 손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손톱을 바짝 깎아 단정하게 정돈된 손가락 끝. 그것이 제 밀지 사이로 파고들어 내벽을 긁어내리는 상상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짧게 숨을 집어삼키며 야릇한 상상을 몰아내려는 순간, 한결이 검지를 세워 해민의 목덜미를 스윽 그었다. 해민이 살갗에 와 닿는 감각 때문에 저도 모르게 파르르 눈꺼풀을 떨었다. 아찔한 유혹을 애써 모른 척하며 그가 건넨 화제를 이어받는 게 최선이었다.
“별로 오랜만 아닌데. 지난달에도 왔었고, 지지난달에도…….”
“가끔 억울한 거 알아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양 해민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꼬박꼬박 선배라고 불러 주고 있잖아요, 내가.”
“그야 학교도 내가 먼저 들어갔고, 회사도 내가 먼저 들어왔으니까.”
한결은 해민의 대답이 가소로운지 피식,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딴 이유 때문에 내가 선배라고 불러 주는 거 같아요?”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
한결이 혀를 내어 제 입술을 훑더니 해민에게 가까이 다가와 보라며 손짓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해민은 숨을 죽이고 그에게 바짝 다가가 몸을 기대었다.
“선배가 내 좆 물고 있을 때, 내가 선배라고 불러 주면 갑자기 구멍을 꽉 조이잖아요.”
“……!”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당황한 해민이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나 한결은 해민의 팔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가 연이어 날아들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이상한 배덕감이라도 들어요? 취향 한번 난잡하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멈춰 서고, 문이 열렸다.
졸지에 난잡한 취향을 갖게 된 해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엘리베이터 밖으로 빠져나왔다. 한결이 문 앞에 카드를 갖다 대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가 해민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턱 끝을 까닥인다.
해민은 그를 슬쩍 흘기며 룸 안으로 들어섰다. 선배라는 호칭에 흥분한 게 아니라, 흥분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몸을 동하게 만든 거라고 항변하려 했다. 그러나 대답할 새도 없이 등 뒤로 덮쳐 오는 묵직한 무게감에 말을 삼켰다.
“아니라고 잡아떼려고 했죠? 다 알아.”
“알면서 왜 물어?”
“선배 취향이 난잡하다는 건 인정하는 게 좋을걸. 저번에 심야 영화 끝나고 주차장에서 뜰 때도 아주 좋아 죽으려고 했잖아요.”
“좋아 죽으려고 한 게 아니라 누가 볼까 봐 긴장해서 그런 거지. 긴장한 거랑 흥분한 것도 구분 못 하면 어떡해.”
“아아, 그러니까…….”
한결은 해민을 뒤에서 껴안은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게에 휩쓸려 앞으로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한 면을 가득 채운 통창에 몸을 기대게 되었다. 그는 해민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읊조렸다.
“누가 볼까 봐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를 즐긴다는 거잖아요. 비품실에서 몰래 만져 줄 때도 물 질질 흘리고. 응?”
한결이 양손으로 해민의 동그란 어깨를 주무르며 귀 밑으로 입술을 내렸다. 쪼듯이 퍼붓는 입맞춤에 해민은 흐응, 비음 섞인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맴도는 질척한 타액 소리에 가슴 속 깊숙한 곳이 간지러웠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추려고 했다.
“앞에 봐.”
고압적인 명령조에 반항심이 치들었지만, 제 턱을 쥐고 시선을 고정시키는 악력에 어쩔 수 없이 통창 너머로 펼쳐진 도심의 야경을 눈에 담았다.
새카만 어둠이 내려앉은 한강, 건너편에 빼곡히 들어선 기업 사옥들, 그 사이를 잇는 대교와 붉은 등을 켠 채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손톱만큼 작게만 보였다.
한결은 군데군데 불이 들어와 있는 고층 건물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그가 해민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기서 우리 보고 있으면 어떡하죠?”
작정하고 망원경으로 훔쳐보지 않는 이상, 이곳이 보일 리 없었다. 그러나 이상야릇한 기분이 발끝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통창을 짚고 있는 손마디가 새하얘질 정도로 힘이 실렸다.
“당연히 안 보이지. 이상한 망상 좀 하지 마.”
“이상한 망상? 그런 거 한 적 없는데.”
저는 청렴결백하다는 양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얄미웠다.
“난 그냥 혹시나 해서, 누가 훔쳐볼까 봐 걱정돼서 그랬지. 그런 거 아니면 안심하고 이대로 떡 쳐도 되겠네요.”
한결이 해민의 뺨을 붙잡고는 고개를 틀게 했다. 그대로 서로의 입술이 맞물렸다. 아랫입술을 깊게 빨아 당기며 파고든 혀가 입 안을 휘저었다. 그가 고른 치아를 쓸었다가 붉고 연약한 살점을 혀끝으로 농간하듯 건드려 댄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 숨을 크게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하으읏!”
그는 우악스러운 손길로 해민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얇은 천 너머로 전해지는 악력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탄탄한 근육으로 둘러싸인 그의 허벅지가 해민의 다리 사이를 받쳐 들었다.
“똑바로 서 봐요. 얼르은.”
한결이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애원했다. 그의 허벅지가 뜨거워진 밀지를 사정없이 비벼 댔다. 해민은 유리를 더듬더듬 짚으며 발끝에 힘을 실었다. 그의 허벅지와 닿지 않으려 바닥을 딛고 똑바로 서자, 이번에는 등 뒤에서 두툼하게 팽창한 그의 아랫도리가 느껴졌다.
그는 느물거리며 해민에게 달라붙더니, 허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럴수록 존재감이 뚜렷한 그의 성기가 끝없이 부풀었다.
해민의 등에 바짝 밀착한 채 자위하던 그가 가쁜 숨을 쏟아 냈다. 그러고는 더욱 거칠게 해민의 양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으읏, 하, 난잡한, 취향은…… 내가 아니라 너 같은데.”
“내 취향이 선배 취향이고, 선배 취향이 곧 내 취향이죠. 아니야?”
해민은 점점 흥분에 취해 가슴을 앞으로 내밀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블라우스 앞섶이 벌어지고 벌어지다가, 간신히 매달려 있던 단추가 후드득 떨어져 나가기에 이르렀다.
블라우스가 흘러내리면서 동그란 어깨가 공기 중으로 드러났다. 흐트러진 해민의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니, 한결은 꽉 찬 정복욕에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한결은 깊이 파인 가슴골 사이로 검지와 중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가락 표면에 쫀쫀하게 달라붙었다.
“선배, 이것 좀 봐요.”
해민의 시선도 한결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제 가슴골 사이를 오르내리며 비벼지는 그의 손가락이 보였다.
“이거 꼭 씹질 하는 거 같지 않아요?”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는 듯도 했다. 한결은 때때로 해민을 세면대 위에 앉혀 놓고, 거울을 통해 제 성기가 해민의 질구에 삽입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했다. 그 장면이 연상되는 바람에 해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되게 부끄러워하네. 귀여워 죽겠다.”
한결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또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그가 혀끝으로 여린 살을 집중 공략하더니 해민의 혀를 얽어 핥아 올렸다.
해민이 농밀한 입맞춤에 정신을 놓은 사이, 브래지어의 앞 후크가 툭 풀렸다.
“아, 좋다.”
“후으…….”
입술이 떨어진 사이 해민은 참았던 숨을 흘렸다. 몸을 지탱할 힘이 풀리는 바람에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었다.
한결은 겉으로 드러난 해민의 맨 살결 곳곳을 더듬거렸다. 한 손으로는 목덜미와 빗장뼈, 어깨를 순차적으로 쓸어내리고, 반대편 손으로는 흐트러진 블라우스 천을 걷어 내며 옆구리와 복부, 가슴을 연신 어루만졌다.
“하앗, 으, 으응…….”
한껏 예민해진 피부는 익숙한 그의 손길을 반갑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민은 한 손을 뒤로 뻗어 한결의 바지춤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질감 좋은 정장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성기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그러자 한결의 몸이 눈에 띄게 굳었다.
“……윽.”
“한결아, 너 엄청 커졌는데.”
“원래 컸어. 더 만져 줘요.”
그는 제 손으로 재빨리 바지 버클을 풀어내고는 흉흉하게 꺼덕거리는 좆을 꺼냈다. 한결이 자그맣고 새하얀 해민의 손에 장난감을 쥐여 주듯 제 성기를 맡겼다.
“너 정말 징그럽게 커…….”
“맛있다고 빨아먹을 땐 언제고.”
한결이 해민의 뺨과 이마에 지그시 입술을 눌렀다. 해민은 제 등 뒤로 잡히는 그의 성기를 손바닥으로 느끼며 감각을 새겼다. 눈에 보이지 않아 그 감각이 더 선명했다. 기둥 표면에 툭툭 불거진 힘줄과 귀두 끝에서 미끄덩거리며 쏟아져 나오는 프리컴까지.
“후우……. 손도 잘 쓰네. 못하는 게 뭐예요?”
낮은 웃음소리가 해민의 귓가를 잔잔하게 두드렸다.
“나만 서서 좀 억울할 뻔했는데, 선배도 바짝 섰네요.”
한결의 손끝이 꼿꼿하게 일어선 유두를 스쳤다. 해민은 아릿한 감각에 어깨를 잘게 떨었다. 더 만져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유륜 주변만 문지르며 애간장을 태웠다. 그러다 또 한 번 그의 손이 정점의 끝을 스치자 간드러지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나는 너 거 만져 주는데 왜 넌 안 만져 줘? 응?”
“뭐. 어딜 만져 달라고.”
“…….”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뻔뻔한 연기가 일품이었다. 해민은 가로로 길게 뻗은 그의 눈매를 올려다보면서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한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해민의 풍만한 가슴을 밑에서부터 튕겨 올리며 여러 차례 채근했다.
“어디 만져 달라고. 응? 말을 해 봐요.”
“가, 가슴…….”
“가슴 만져 주고 있잖아.”
“아니, 거기 말고…….”
“말 안 하면 모르지.”
해민은 입술을 앙다물며 각오를 다지고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고작 그게 뭐라고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여상한 표정으로 숨 쉬듯 상스러운 말을 해 대는 한결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는 눈썹을 비뚜름하게 치켜세우며 눈짓으로 물었다. 그제야 해민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젖꼭지…….”
크흡, 한결의 잇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해민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고고한 자존심에 생채기를 낸 그를 원망하는 기색이 다분해 보였다. 한결은 해민을 다독이며 통통하게 부푼 유두를 검지로 긁어내렸다.
“으응, 여기?”
“흐응…….”
그러자 얼마 가지 못해 해민은 날 선 눈빛을 거두었다. 그는 단단해진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손끝으로 둥글게 굴렸다.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을 이기지 못한 해민은 허리를 비틀었다.
한결은 제 가슴팍에 기대어 연신 신음을 흘려 대는 해민을 가만 바라보았다. 뒤늦게 올라오는 취기와 더불어 가슴이 터질 듯이 뛰어 댔다.
그는 제 손가락에 끼워진 유두를 한껏 문지르고 비틀며 해민의 얼굴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차분히 감상했다. 다리 사이가 뻐근하게 아파 오고, 안쪽 근육이 팽팽하게 당겼다.
그러면서 해민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스커트를 살금살금 위로 말아 올렸다. 이미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살짝 드러날 때쯤, 그는 한 손으로 속옷을 옆으로 밀어젖혔다.
차가운 공기와 맞닿은 비부를 이제야 느꼈는지, 해민은 놀란 눈을 하며 그의 손목을 재빨리 움켜쥐었다.
“왜요, 만져 달라며.”
“바, 밖에서 보이잖아.”
“안 보인다면서요.”
“그래도 혹시 누가 보면 어떡해.”
한결이 낮게 웃으며 해민의 엉덩이 골 사이로 제 좆 기둥을 문질렀다.
“그러게. 누가 보면 어떡하지? 우리 둘 다 좆 되는 건가?”
“야아…… 하으응!”
그가 해민의 상체를 통창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그러자 가슴이 짓눌리며 넓게 퍼졌다. 잔뜩 민감해진 유두가 차디찬 유리창에 문질러지는 감각이 자극적이었는지 해민은 가느다란 교성을 내질렀다.
“어? 저기 누가 우리 본다.”
“뭐? ……아흐윽!”
한결은 화들짝 놀란 해민을 황급히 돌려세웠다. 그대로 제 두 팔 안에 가두고는 귀두 끝을 질구에 맞추었다. 해민은 커다래진 눈을 하고는 한결의 어깨를 짚었다.
“거짓말인데. 많이 놀랐어요?”
해민이 분에 차서 씨근덕거리는 찰나, 한결은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성기를 퍽 밀어 넣었다. 안쪽으로 빠듯하게 들어찬 자극으로 인해 해민의 숨이 멈췄다.
“미안하니까 사과의 의미로다가 빨아 줄게요. 그럼 되지?”
그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한결이 좆을 꽂아 넣은 채로 허리를 굽혀 해민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축축하게 젖은 혀가 유두 위를 배회했다. 그는 이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눈에 담으라고 종용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해민은 저를 올려다보며 젖꼭지를 핥아 대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유두를 깊게 빨아들이는 흡입력에 아래가 바짝 조여 들었다. 아래쪽으로는 맞물린 그의 성기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래위로 정신없는 자극이 이어졌다. 찌릿하는 전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해민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유두가 치아에 긁히는 느낌이 전해질 때마다 기분 좋은 쾌감이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한결이 슬슬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젖꼭지 애무를 마치고 입술을 위로 올렸다. 선명하게 도드라진 해민의 쇄골에 이를 박아 넣고 깊이 빨아들이자 새빨간 울혈이 맺혔다.
“하읏……!”
한결은 그 자국이 마치 제 소유라는 인장이라도 되는 것만 같아 뿌듯했다.
그는 두 팔로 해민의 엉덩이 아래를 받치고 번쩍 안아 들었다. 허공을 헤매던 새하얀 다리가 한결의 허리에 감겼다. 그 탓에 접합부가 더욱 깊이 맞물렸다. 반쯤 꽂혀 있던 좆을 뿌리까지 박아 넣자, 해민은 자지러지는 신음을 쏟아 내며 한결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
“배 속이 꽉 차. 너무 커…….”
해민은 그의 어깨를 짚으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한결이 피식 웃으며 성기를 빼내는 듯하더니 다시 푹 찔러 넣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거칠어진 숨을 뱉었다.
“누가 이렇게 조이래요. 콱콱 물면서 놔주질 않으니까 내가 빼질 못하잖아.”
해민이 그의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한결의 귀 끝에 쪼듯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의 말마따나 아랫배가 바짝 조여 와 견딜 수가 없었다.
제 안쪽을 빠듯하게 채운 그의 좆으로 인해 숨이 가빠 왔다. 온몸에 휘몰아치는 쾌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한결이 허리를 얕게 쳐올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해민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다시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살결이 찰싹 맞닿았다 떨어지는 마찰음이 공간을 울렸다. 접합부에서 흘러내리는 애액과 프리컴이 뒤섞여 질척이는 물소리를 만들어 냈다.
“소리가, 하윽, 소리가 너무 야해…….”
해민은 제가 하는 말이 한결의 흥분을 더욱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듯했다. 한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몸을 살짝 떨어뜨려 해민의 얼굴을 지그시 마주했다. 나른하게 풀려 반쯤 내리감긴 눈꺼풀이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지금 네 얼굴이 더 야해.”
한계였다. 꾹 억누르고 있던 욕구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해민이 아플까 봐, 힘들어할까 봐, 싫어할까 봐 온 힘을 다하지 못하고 적당히 배려해 온 그였다. 그러나 그런 그를 자극해 대고 있는 게 바로 서해민이었다.
한결은 해민의 등을 통창에 기대게 하고, 허리를 세게 쳐올렸다. 그러다 귀두 끝까지 빼내고서는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끝까지 밀어 넣었다.
“하윽! 으응! 하, 하아…… 하앙! 그, 그만, 그마안……!”
그의 허리 짓에 따라 해민의 몸이 숨 가쁘게 들썩였다. 이제 시작인데 그만이라니. 한결은 미간을 한데 모으며 퍽, 퍼억, 더 깊숙한 곳으로 성기를 박아 넣었다.
왕복 운동을 하는 그의 기둥을 따라 붉고 여린 내벽이 달라붙었다. 그를 꽉 물고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는 양. 해민이 유독 자지러지는 부분을 쓸어내릴 때마다 달뜬 교성이 귓가로 내리꽂혔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그만? 그만하라고?”
“으읏! 하아! 응! 으응, 한결, 한결아……!”
한결이 해민의 엉덩이를 손아귀에 가득 쥐고 양옆으로 벌렸다. 그러고는 붉게 달아오른 해민의 뺨, 턱 끝,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내벽을 사정없이 휘저어 댔다.
“너무 깊, 깊어! 흐읏, 후우……!”
매일같이 그의 성기를 받아 내는 해민이었지만, 버거운 건 버거운 거였다. 해민은 빠르게 치닫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그의 목에 매달려 물기 어린 목소리로 신음을 내질렀다.
“후우, 씨발, 아주 끊어 먹겠네. 하루 종일 선배랑 떡만 치고 싶어요, 알아?”
성기가 내벽을 찌르며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해민은 필사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퍽, 퍽, 성기가 가차 없이 박혀 들어오자 눈앞이 핑그르르 돌았다. 다리 사이에서부터 시작된 소용돌이가 온몸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기어이 눈꼬리에 눈물이 맺히고, 물방울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결은 해민의 눈가에 입술을 꾹 눌렀다. 혀를 내어 떨어지려는 눈물을 핥아 올렸다. 그러면서도 허리를 쳐올리는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울어도, 안, 후으, 봐줘요.”
찌걱거리는 소리, 성기가 박혀 드는 소리, 맨 살갗이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연방 귓가를 울렸다.
해민은 정신이 가물가물해짐을 느꼈다. 평소보다 거친 추삽질이 이어졌다. 열기에 휩싸인 그의 눈동자가 낯설었다. 저를 살살 달래며 삽입하던 전과 달리 그는 지금 이성을 잃고 무작정 달려들고 있었다.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이 현실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한결이 해민의 늘어진 몸을 추켜올리며 제게 기대게 했다.
“누구 맘대로 기절하래. 정신 똑바로 차리고 버텨야지.”
안쪽으로 거침없이 파고드는 성기가 가장 예민한 지점을 집요하게 쑤셔 댔다. 그 탓에 해민의 허리가 퍼뜩 튀어 올랐다. 자극이 수차례 계속되자, 새하얗게 번진 시야에 푸른 불꽃이 타닥타닥 터지는 것만 같았다.
“아흑! 흐응! 흐으으, 이상해, 기분이 이상해……!”
해민이 울먹이며 한결에게 매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허리를 둘러 감았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투명한 액이 엉덩이 골 사이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결은 축 힘이 풀린 해민의 몸을 힘껏 끌어안으며 허리를 쳐올렸다. 해민이 그의 품 안에서 숨이 막혀 와 질식할 것만 같을 때였다. 이윽고 한결의 성기 끝에서 점성 높은 정액이 왈칵, 터져 나왔다.
“후우.”
가늘게 떨리는 해민의 등을 쓸어내리는 한결의 호흡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가 기력이 다한 해민의 몸을 추스르며 제 다리 위에 앉혔다. 여전히 파르르 떨리고 있는 해민의 뺨에 입술을 비비며 속삭였다.
“고개 들고 나 봐요.”
그러자 해민이 그의 어깨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붉게 물든 눈가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씨근덕거리며 숨을 몰아쉬는데, 눈초리에 뾰족한 날이 서 있었다. 욕이라도 쏘아붙일 기세였다.
“……섹스에 미친 놈.”
한결은 칭찬이라도 들은 것처럼 수줍게 웃으며 뺨을 붉혔다. 굶주린 짐승과 같은 모양새로 몰아붙일 때와는 엄청난 간극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걸 왜 이제야 알아줘요?”
* * *
해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그를 밀어내고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가끔 한결이 정신을 놓고 해민의 페이스를 맞춰 주지 못해 과격한 섹스를 할 때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그러나 씻고 나온 해민을 부드럽게 애무하며 달래 주면 금세 기분이 풀리곤 했으니까, 그다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한결은 가운을 걸쳐 입고 미니바로 향했다. 그리고 빼곡히 늘어선 양주들 중 제 취향에 맞는 것을 골라 들었다. 입구를 열어 유리잔에 적당히 따라 붓고는 입가로 가져갔다. 마른 입 안을 축이며 방금 전 섹스의 여운을 만끽했다.
한마디로 끝내줬다. 해민과의 섹스는 늘 그에게 충만한 행복을 안겨다 주었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 그러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저만 아는 공간에 해민을 가둬 놓고 저만 보고 싶었다. 남 대리 같은 새끼가 해민의 시야에 알짱거린다는 것조차 분에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치졸하고 유치한 질투라고 손가락질한대도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태어난 걸 어쩐담?
그때였다. 수북이 쌓인 옷더미 사이에서 휴대폰 진동이 한 차례 짧게 울렸다.
“으음.”
한결은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는 척하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옷가지 속을 휘저어 해민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금 설정이 되어 있었지만 그는 제 지문을 갖다 대어 손쉽게 해제했다. 물론 해민은 그의 지문으로 제 잠금이 풀린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남 대리〉
이제 막 도착한 메시지의 발신인이었다. 한결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새로운 메시지를 터치하자 그가 보내온 메시지 내용이 화면에 가득 찼다.
“……이게 뭐야.”
어이없게도 그 내용은 게르마늄 옥 장판의 효능에 관한 것이었다. 상세 설명 페이지까지 친절하게 첨부되어 있었다. 남 대리는 맨 뒤에 짤막하게 한두 줄 남짓의 짧은 글도 덧붙였다.
[요새 해민 씨 안색이 안 좋아 보여서 도움을 주고 싶어^^ 원래 아무한테나 안 권하는 거야. 아참, 고한결 씨한테는 비~밀~* 알지^^?]한결은 뒷목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걸 느꼈다. 이제야 해민이 왜 난처하다는 듯 웃고 있었는지, 남 대리는 왜 제가 오자마자 식당 안으로 들어갔는지 깨달았다. 단순히 사랑 고백 따위를 하고 있는 상황인 줄 알았더니…….
“어이가 없네.”
더 황당한 건, 제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해민은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는 거다. 귀엽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해서 한결은 유리잔에 따라 놓은 양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다시 침실로 가 침대 옆 콘솔 위에 해민의 휴대폰을 내려놓은 한결은 침대에 정자세로 누웠다. 황당한 웃음이 연신 삐져나왔다.
내가 질투하는 꼴이 보기 좋아서 말하지 않은 걸 수도 있고, 남 대리가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걱정되어서 숨긴 걸 수도 있겠지. 사실, 한결은 뭐가 되었든 상관없었다.
한결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끌어 올렸다. 그러나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욕실에서 쏟아지던 물줄기 소리가 뚝 멎었다. 안쪽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샤워 가운으로 몸을 감싼 해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결은 그런 해민을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민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그렇게 봐?”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무슨 할 말?”
그는 그 자리에 멀뚱히 서서 눈을 깜빡이는 해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올라와요.”
해민은 여전히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침대로 다가왔다. 얼른. 한결이 채근하자 눈가를 찌푸리며 두 다리를 벌려 그의 복부 위로 올라앉았다.
“응, 올라왔어.”
원래 이렇게 해민이 화난 척을 하고 욕실로 들어가 씻고 나오면 한결은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주며 가슴을 애무해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 한결의 행동은 해민이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해민이 눈을 깜빡이며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결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해민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거기 말고.”
“응?”
“내 얼굴 위에 앉아요.”
또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걸까. 해민이 슬쩍 인상을 구기자, 그는 답답하다는 듯 해민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로 약속해 놓고 어겼잖아요. 깜빡 속을 뻔했네.”
“나 너한테 숨기는 거 없는데?”
“옥 장판.”
해민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어떻게 안 거지? 시선을 들어 올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콘솔 위에 놓인 제 휴대폰이 보였다.
“내 휴대폰 함부로 보지 말랬지!”
“통화 목록에도 나밖에 없으면서 뭘 맨날 보지 말래.”
정곡을 찔린 해민은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워낙 협소한 인간관계 탓에 연락을 주고받는 이가 같이 사는 한결뿐이었으니까. 한결은 노골적으로 해민을 비웃으며 그녀의 골반을 잡아 올렸다.
“빨리 올라와.”
해민은 그의 힘에 이끌려 무릎걸음을 치며 위로 올라갔다. 해민이 움직이는 동안 한결은 기껏 걸쳐 입은 해민의 샤워 가운을 풀어 헤쳐 바닥으로 내던졌다.
“대체 뭘 하려고…….”
다리 사이 밀지가 그의 얼굴 위에 다다랐을 때, 그는 해민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그 사이에 제 얼굴을 파묻었다.
“아흑! 뭐, 뭐야…… 흐읏, 으응!”
그러고는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못한 음핵을 혀끝으로 농락하며 깊게 빨아들였다. 예상치 못한 자극에 사지가 달달 떨렸다.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온 그의 손이 질구를 벌렸다.
“미, 미쳤, 하읏, 흐응…….”
한결은 고개를 더 내려 비좁은 구멍으로 혀를 밀어 넣고는 뜨겁고 끈적한 내벽을 음미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매끈하게 뻗은 그의 코끝이 통통하게 부푼 클리토리스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해민은 정신을 혼몽하게 만드는 혀 놀림에 연신 허리를 뒤틀었다. 헤드보드를 짚으며 무릎을 세우려 했지만, 그는 해민의 골반을 꽉 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이, 이상해……. 이런 거 싫어.”
“지금 벌받는 중이잖아요. 나를 애타게 만들었으면 이 정도는 견뎌야지, 응?”
“아니, 아니야……. 그래도 너무 이상해, 이거. 흐응…….”
한결의 손을 잡아끌어 제 가슴으로 가져가려 했으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한결이 우악스럽게 제 손을 빼내어 엉덩이만 주물러 대는 탓이었다. 절대 해민이 원하는 애무를 해 주지 않겠다는 그 나름의 복수였다.
그는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애액이 성수라도 되는 양 연거푸 삼켰다. 그럴수록 해민은 수치심에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볼 거 다 본 사이라지만, 이토록 야만스러운 행위를 받아들이기엔 아직 무리였다.
한결이 해민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그의 입가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해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안 그래도 제정신 아닌 새끼한테 그딴 걸 숨기면 되겠어요?”
해민은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꾹 삼키며 히끅거렸다. 그러고는 팔을 들어 제 눈가를 가리고 어깨를 들썩였다.
“하루 종일 집에 가둬 놓고 내 생각만 하라고 하고 싶은데, 다 선배 생각해서, 응? 선배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려고 참는 거라고.”
“그래도…… 이건 너무해…….”
“한 번만 더 괘씸한 짓 하면, 손가락에 끼우는 족쇄가 아니라 진짜 족쇄를 발목에 채울 거예요.”
한결은 흐느끼는 해민을 침대에 눕히고는 우위를 점했다. 그리고 눈가를 가린 그녀의 팔을 치워 내고 제 입술을 내렸다.
“그러니까 나 불안하게 만들지 마.”
가물가물한 시야에 애가 타는 듯한 한결의 얼굴이 꽉 들어찼다. 해민은 그의 눈동자에 일렁이는 광기를 잠자코 응시하다가 가느다란 한숨을 흘렸다.
“너도 마찬가지야.”
“…….”
“다른 사람한테 여지 흘리고 다니지 마. 눈 뒤집힐 것 같으니까.”
눈매가 사르르 휘어지는 그의 눈웃음이 오롯이 저만을 향했으면 했다. 고한결이 다른 사람들한테 웃어 줄 때마다 가슴 속이 뜨겁게 들끓었다. 윤 대리가 주는 술을 받아 마실 때도, 그녀와 능숙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해민은 침묵을 지켰지만 제 속에서 휘몰아치는 질투를 몰아낼 순 없었다.
한결은 짐짓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눈꼬리를 접으며 웃었다.
“……그랬구나.”
그러더니 해민을 품에 안으며 사근사근 달래 주었다.
“나 혼자 염병 떠는 거 아니라 다행이다.”
안심한 듯 웃으며 해민의 입술에 입술을 포개었다.
* * *
이튿날 아침.
주말이라 늦잠을 잘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해민은 포근한 침구에 폭 파묻혀 게으름을 피우다가 밥 먹으러 가자는 한결의 말에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밤새 온몸으로 대화를 나눴더니, 어제 저녁에 먹은 고기가 전부 소화된 듯했다.
한결은 해민에게 새 옷이 담긴 쇼핑백을 건넸다. 마침 블라우스 단추가 전부 떨어져 나간 탓에 입을 옷이 없어 난감하던 차였다.
“웬 새 옷?”
“아까 직원한테 부탁해서 편한 옷 좀 사다 달라고 했어요.”
“호텔 직원이 그런 심부름도 해 줘?”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싱겁게 웃었다.
“아…….”
해민은 뒤늦게 자신들이 어떤 호텔에 와 있는 건지 깨달았다. 얼마 전 신양 그룹 계열사로 흡수된 호텔 중 하나였다. 총수 손자이니 당연히 직원들도 그의 얼굴을 익혀 두고 있을 터였다.
오너가의 권력을 이런 식으로 남용해도 되는 건지 아주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어쨌든 제 옷을 챙겨 입는 게 더 중요하니까. 해민은 그가 건네준 옷을 껴입고선 한결과 함께 룸을 나섰다.
한결은 머뭇거림 없이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두 사람이 머무는 호텔은 라운지 음식이 맛있다고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그러나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바람에 조식 시간을 놓쳐서 이용할 수 없을 텐데. 해민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한결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지금 여기서 밥 못 먹을 텐데? 그냥 다른 식당 가자. 호텔 밖으로 나가서 먹어도 되고.”
“달라 그러면 주지, 왜 안 주겠어요.”
라운지에 입성하자마자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달려 나왔다. 그의 가슴팍에는 매니저라고 적힌 금속 명찰이 달려 있었다. 한결은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식사 되죠?”
“예, 물론이죠. 저 근데…….”
매니저는 해민을 흘긋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더니, 한결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의 말을 전해 들은 한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그의 낯에 당황한 기색이 어렴풋하게 스쳤다.
역시 안 되는 거겠지? 해민이 속으로 생각하며 텅 빈 라운지를 둘러볼 때였다.
“나 잠시 이모님한테 인사만 드리고 올게요. 금방 올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아, 이모님……. 그래.”
“그럼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매니저를 따라 라운지 안쪽으로 들어가면서도 해민은 몇 차례 고개를 돌려 멀어지는 한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갈수록 평범한 소시민의 삶과 점점 거리감이 생기는 것만 같아서 어쩐지 서글퍼졌다.
한결이 신양 전자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그가 어느 집안 자제인지, 저와의 재력 차이가 어느 정도 나는지 썩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저 학교 선후배 사이에서 연인으로 발전한 평범한 관계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직접 눈으로 보고 겪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문득 한결과의 격차가 실감 나는 것이었다.
해민은 밀려드는 씁쓸함을 애써 떨쳐 내며 매니저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도시 전경이 내려다보이던 스위트룸과는 반대로 푸르른 숲이 창 너머를 장식하고 있었다. 정신이 개운해지는 것만 같은 풍경을 눈에 담다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매니저를 깨닫고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련님께서 한정식으로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셨는데, 괜찮으십니까?”
“여기서 한정식이…… 가능해요?”
“네. 저희 호텔 1층에 한식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조리한 음식을 바로 올려 보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머릿속이 혼잡했다. 고한결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호칭도 어색하고, 이렇게 큰 규모의 호텔에서 VIP 손님 대접을 받는 것도 영 낯설기만 했다.
‘고한결 빨리 왔으면 좋겠다.’
이리도 낯선 환경 속에서 익숙한 건 고한결뿐인데, 그가 곁에 없으니 분리 불안이라도 생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연신 물만 들이켜며 눈동자를 굴릴 때였다. 어디선가 성인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와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왜 이제 와……!”
“…….”
당연히 한결일 거라 확신하고 내뱉은 말이었으나, 시야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해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스쳐 지나가려던 남자도 대뜸 날아온 면박에 당황했는지, 우뚝 멈춰 서서 해민과 시선을 맞추었다.
남자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다. 키도 크고 몸집도 아주 커서 존재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주말임에도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고 있어 어딘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상하다. 낯이 익은데…….’
해민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저런 남자가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도통 떠오르는 게 없었다.
쉬이 잊힐 인상이 아니었다. 한결만큼이나 수려하고 단정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날카롭고 예리한 느낌을 주는 한결과는 다르게 투박하고 험악한 인상이었다. 손에 칼을 쥐여 주면 조폭이라고 오해를 사고도 남을 만한. 자신이 이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해민의 떨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마주하고 있던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나 알죠?”
“……아뇨.”
해민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한 박자 늦게 대답하자, 그가 작게 웃었다.
“나는 서해민 씨 아는데.”
허락도 없이 날아든 반말에 해민은 슬쩍 미간을 구겼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해민의 맞은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쯤 되니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 따윈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라운지로 돌아온 한결이 낯선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저를 보고 이상한 오해를 할까 봐 걱정이 앞설 뿐이었다.
“저 일행 있는데요.”
“그것도 알아요.”
“근데 왜…… 거기 앉으세요?”
“여기서 약속이 있는데 시간이 조금 남아서요. 마침 서해민 씨한테 할 말도 있고.”
방금 전 해민을 안내한 매니저가 달려와 남자의 앞에 식기와 물잔을 세팅했다.
“저는 식사 안 합니다.”
남자의 말에 매니저가 가볍게 묵례하고선 다시 돌아갔다.
어디서 봤지, 어디서 봤더라, 분명 낯이 익긴 익은데……. 해민은 머리를 부지런히 굴려 보았지만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전부 허사였다. 해민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자, 그가 어딘가로 시선을 옮기며 눈썹을 비뚜름하게 치켜세웠다.
남자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이제 막 돌아온 한결이 있었다. 그는 한껏 비딱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기가 차다는 듯 헛숨을 내뱉었다. 치열하게 시선을 주고받던 한결이 해민의 옆으로 다가왔다.
해민은 잘못한 게 없는데도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어제처럼 별스러운 오해를 사서 한결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물론 그가 자신을 향한 소유욕을 내비칠 때마다 알 수 없는 희열이 휘몰아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해민이 입술을 앙다물며 한결의 셔츠 소매를 움켜쥐었다.
“난 모르는 아저씨야.”
남자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한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실룩거렸다. 그가 애써 손등으로 입가를 슬쩍 가렸지만, 눈가에 젖어 든 웃음기까지 숨기진 못했다. 한결은 해민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제 손을 얽어 깍지를 껴잡으며 옆자리에 앉았다.
“들었어? 모르는 아저씨라잖아. 방해하지 말고 이만 꺼져 줘.”
서슴없이 오가는 말에 해민은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한결과 친구라고 보기엔 남자의 나이가 월등히 많아 보이는데…….
“이런. 자기소개부터 할 걸 그랬네. 낯간지러워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더니.”
남자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해민에게 건넸다. 명함을 들여다 본 해민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시네마박스 대표 고윤결〉
“한결이 형입니다.”
“아…….”
그제야 그가 왜 낯이 익었는지 떠올랐다. 한결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볼 때 간간이 얼굴을 비추던 남자였다. 나이 차가 꽤 나는 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와는 다르게 검색을 해 봐도 형의 얼굴을 찾아보는 건 어려워 몰라봤다.
“못 알아봐서 죄송해요.”
“선배가 죄송할 게 뭐 있어요. 멋대로 끼어든 아저씨가 잘못이지. 바쁜 척하더니 시간 많은가 봐?”
“아무리 바빠도 동생 여자 친구랑 인사 나눌 시간은 내야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연은 무슨.”
윤결은 한결의 타박에도 개의치 않고 해민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해민도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런데 아까 저한테 할 말이 있으시다고…….”
“아, 있죠, 있어. 맞아. 깜빡할 뻔했네.”
“허튼소리 할 거면 가던 길 가.”
한결이 시퍼런 날을 세운 눈초리를 보내며 낮게 읊조렸다. 윤결은 짐짓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혀를 쯧 찼다.
“꼴을 보아하니 아직 말 안 했나 본데.”
해민은 저만 소외되고 있는 대화에 어리둥절한 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하는 한결과 그를 향해 한심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윤결을 번갈아 바라보며 상황을 파악해 보려 애썼다.
“너도 이제 다녀와야지, 미국.”
이내 윤결의 말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해민의 눈동자에 불안함과 당혹감이 깃들었다. 갑자기 미국이라니, 이게 무슨…….
“아, 제발 입 좀 다물어.”
“언제까지 기다려 줄 순 없잖아. 네가 석사 따 오기 전까진 경영권 안 물려주신다는데 그때까지 내가 네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야겠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어떻게 신경을……!”
언성이 높아지려는 순간이었다.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라운지 안으로 들어오다가 윤결을 발견하곤 몸을 움찔하며 멈추어 섰다. 마찬가지로 여자와 마주친 윤결이 한결을 향해 한 번 더 혀를 내두르곤,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얘기해 봐. 서해민 씨랑 같이 가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계시니까.”
윤결은 재킷 단추를 채우더니 해민을 향해 형식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해민이 대답할 새도 없이 그는 멀뚱히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은 무어라 작게 얘기를 주고받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슨 소리야, 미국이라니?”
한결이 거칠게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해민의 감정을 읽어 내려는 듯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그대로예요. 평사원으로 어느 정도 연차 쌓으면 미국 가서 석사 과정 밟고 오라고 성화셔서…….”
이렇게 그와의 간격이 더 멀어지는구나 싶어서 입 안이 떫었다. 한결은 맞잡은 해민의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고개를 떨군 해민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죠?”
“무슨 이상한 생각.”
“뭐…… 우리가 헤어지게 될 거라거나, 헤어진다거나, 아니면……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해민은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생각은 안 해 봤는데.”
“그럼 됐어요.”
한결은 마치 식사 메뉴를 정하듯 흔쾌히 대꾸하더니 사르르 눈을 접었다.
때마침 직원들이 풍성한 음식을 담은 카트를 끌며 다가왔다. 그들의 테이블 위로 임금님 수랏상 버금가는 음식이 차려졌다.
식사를 하는 동안 해민은 머릿속으로 한결에게 물을 질문을 침착하게 정리했다. 유학은 언제쯤으로 예정되어 있는지, 얼마나 있다가 돌아올 건지.
그러다가 그를 향한 원망이 불쑥 치밀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계획을 왜 진작 말 안 했는지, 저에게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는지. 넌 뭐든 그렇게 쉽고 단순하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 * *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호텔 앞에 발레 파킹 요원이 대기시켜 놓은 한결의 차가 보였다. 두 사람은 차에 올라타 호텔을 벗어났다.
“한강 갈래요?”
한강 대교를 내달리던 한결이 충동적으로 던진 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차창 너머 한강을 응시하고 있는 해민을 의식해서였다.
“……그래.”
해민의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다단했다. 한결과 떨어질 일이 생길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지금이 마냥 좋았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한결이 있고, 자고 일어나면 옆에 한결이 있고, 보고 싶을 때 언제는 그를 볼 수 있으며 만지고 싶을 때 언제든 그를 만질 수 있는 지금이.
윤결이 떨어뜨리고 간 폭탄의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한결의 미래를 위해선 그를 보내 주는 게 맞는 거였다. 평범한 인물이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그는 신양 그룹 총수의 외손자로 경영권을 물려받아야 마땅한 후계자였다. 이제껏 그러한 미래를 바라보며 살아왔을 터였다. 더 큰물로 나아가야 할 그의 발목을 잡을 순 없었다.
한결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멍하게 넋을 놓고 있는 해민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안 되겠네.”
“……응?”
“나가서 좀 걸어요. 지금 온갖 잡생각은 혼자 다 하고 있는 거 같은데.”
해민의 복잡한 심경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한결이 땅굴이나 파고 있는 해민을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은 주말을 맞아 나들이 나온 수많은 사람들 틈으로 섞여 들어갔다. 한결은 맞잡은 손을 가볍게 흔들며 해민이 입을 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한참을 걷다가 한강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았다. 발아래로는 강물이 찰박이며 부딪치고 또 부서지고 있었다. 처음 입맞춤을 나눈 그날이 떠올라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그러나 지금은 한갓지게 추억 팔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지나온 과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었다.
“신파 찍을 일 없다더니.”
침착하고 차분하게, 말을 고르고 골라 입 밖으로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서운함이 말투에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결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연히 없죠.”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그의 가슴이 훅 부풀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감쳐물다가 말을 내뱉었다.
“헤어질 생각 안 한다더니.”
“영영 헤어지는 건 아니니까 괜찮아. 그래도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까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진작 말 좀 해 주지.”
“난 선배랑 잠시도 헤어질 생각 없는데.”
“…….”
“나랑 같이 가요.”
한결이 저보다 어리긴 해도 그에게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다. 남들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게 멋있어 보였고, 그를 보며 용기를 얻어 해민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다.
또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입력과 출력의 과정이 일자로 이어진 양 긴 고민 없이 곧바로 깔끔한 답이 튀어나오는 것 말이다. 작은 일 하나도 복잡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저와는 아주 많이 달랐다.
“왜 하필 재경 팀으로 왔냐고 물었었죠?”
느닷없는 한결의 물음에 해민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평소보다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난 선배가 가는 곳으로만 가요.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선배가 한국에 남겠다면 나도 그럴 거고, 미국 가서 같이 공부하자고 하면 그렇게 할 거니까.”
어쩌면 그의 단순한 사고 회로는 맹목적인 감정에서부터 비롯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내키는 대로 해요. 그래도 돼.”
“…….”
“선배가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가 헤어질 일은 없으니까.”
언제나 한결이 말해 온 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해민은 눈시울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입술 끝까지 치밀어 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삼켜 내고선 말문을 열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렇다니까.”
“정말?”
“……속고만 사셨나.”
가늘게 뜬 눈초리로 해민을 슬쩍 흘겨본 한결이 해민의 어깨를 당겨 안았다.
“그래서 선배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순간에 개운해졌다. 이토록 명료한 답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걸 찾지 못해 혼자 속을 끓인 시간이 아쉬워졌다.
고한결을 사랑하는 마음이 쌓이고 또 쌓이다 못해 흘러넘쳤다. 해민은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벅차올라서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에게 해 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는 네가 날 따라다녔으니까 이제는 내가 너를 따라갈까 해.”
“그럼 이제 나도 선배라고 불러 주나?”
싱거운 농담에 피식 웃음이 샜다. 해민은 늘 속으로만 품고 있던 마음을 조심스레 꺼내어 입에 올렸다.
“나도 너랑 잠시도 헤어져 있기 싫어.”
이윽고 현실과 이성을 부수고 드러난, 솔직한 마음이었다.
한결은 낮게 웃으며 제 품에 안긴 해민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러고는 동그란 이마 위로 지그시 입술을 내리눌렀다.
“예전에 내가 오 년 뒤에 결혼하자고 한 말 기억나요?”
해민은 이마에 닿아 오는 폭신한 감각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당기자.”
“더 일찍 하자고?”
“미국 가기 전에 결혼 먼저 하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서로의 마음이 서로에게 향해 있긴 하지만, 그보다 더 강력한 구속력이 필요했다. 다른 생각 못하게, 헤어질 생각일랑 꿈도 꾸지 못하게.
해민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눈망울에 그득 찬 물기를 증발시키려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혹시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야?”
“아, 아니…… 정식으로 하는 건 아니고…….”
“아아, 정식으로 한 건 아니야?”
“좀…… 허접했죠?”
한결이 살짝 당황해 낯을 붉혔다. 해민이 그의 품 안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국 가서도 아침밥 챙겨 줄 거야?”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빵 쪼가리 말고 한식으로 오첩반상 차려 줘야 해.”
“칠첩반상도 가능해.”
확신에 찬 어조에 해민은 그의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안정감이 가득 차올랐다.
고한결이 곁에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든 미국에서 공부를 이어서 하든. 어느 곳에 있든 그가 옆에 있다고 생각하자, 불안정한 미래마저 제 손아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난 너만 있으면 돼.”
한결의 눈동자가 감동으로 일렁였다. 이윽고 그는 해민의 온 얼굴에 쪼듯이 입맞춤을 퍼부었다.
“진짜?”
해민이 수차례 고개를 끄덕이자, 한결의 눈매가 둥글게 휘어졌다.
“그럼 나 키스해 줘, 자기야.”
미소를 머금은 해민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따뜻한 온기가 온몸의 긴장을 말끔히 지워 냈다. 겹쳐진 입술 사이로 열기가 피어올랐다. 해민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행복했다. 한결은 입술을 맞댄 채로 속삭였다.
“이렇게 사랑스러워서 어떡하지? 누가 쌔벼 갈까 봐 무서워.”
가슴 깊숙한 곳이 간지러웠다. 해민은 눈을 찡그리며 얼굴로 내리꽂히는 키스를 묵묵히 받아 주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일상이었다.
결핍의 심리학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