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ll the Dragon RAW novel - Chapter (200)
* 200화 *
여섯 시간에 걸친 다리 수술이 끝났다. 레베카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진통제 덕분에 수술통증은 옅었다. 액체깁스가 감싼 왼쪽 다리가 뭉툭했다.
“응?”
레베카는 다리 사이가 불편해서 바지 안을 살펴봤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했다.
“기, 기저귀?”
레베카는 그제야 통증의 정체를 깨달았다.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녀가 차고 있는 것은 기저귀가 아니라 생리대였다.
‘이게 컨디션 난조의 원인이었네.’
레베카가 쓰게 웃었다. 생리에 대해서는 이미 교육을 받았었다. 하지만 자신에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급성장한 소녀들 중에서는 생리가 있는 부류가 있고, 없는 부류가 있었다. 레베카는 자신이 후자라고 생각했었다.
“귀찮게 됐어.”
레베카는 벌러덩 누웠다. 그 때, 동양인 의사가 한 명 들어왔다. 그는 아크 소속의 중국계 의사였다. 이름은 바이판, 나이 사십의 노련한 외과의이며, 레베카의 수술을 집도했다.
“몸은 좀 어때?”
바이판이 물었다. 레베카는 잠시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통증은 없어요.”
“진통제가 떨어지면 통증이 있을 거다. 훈련복귀까지는 5주 정도 걸릴 거야. 조금만 늦었어도 다리를 잘랐어야 했어.”
레베카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다리가 잘릴 뻔했다는 말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뒷이야기였다.
‘5주나 빠져도 괜찮은 걸까.’
레베카가 생각했다. 가슴 깊이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훈련은 힘들었지만, 훈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그간 이루어진 세뇌교육의 증거였다.
바이판은 레베카의 표정을 읽었다. 저 여자애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했다. 그는 까끌까끌한 턱수염을 매만지며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넌 통과니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군. 하지만 그럴 권한은 내게 없지.’
바이판은 폐인이 된 아이들을 수십 명이나 보았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혹한 양성과정이다. 아크는 최정예병을 기른다는 기치 아래에서 아이들을 학대하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을 이겨낸 아이들만이 인류의 모든 지원을 등에 업고 싸울 자격이 있는 셈이다.
‘저 애들에게는 지금 과정이 지옥 같겠지만, 이 앞은 더 지옥이니까….’
바이판은 교관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가혹하게 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최소한의 양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레베카에게 잘해줄 생각이었다.
모든 양성과정이 끝나면 소년소녀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인간병기가 된다. 지금 과정은 그 토대를 닦을 뿐이다. 이후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도 그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한의 사회화 교육조차 아크의 훈련과정에 없었다. 철저하게 전투병기로만 가르친다는 의미였다. 어린 시절부터 아크에서 세뇌교육과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 사회화 교육 없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바깥세상에는 사이커에 대한 편견과 두려움이 팽배하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칼이라는 건가.’
의도가 명백하다. 바이판은 그런 부조리함에 분노하지 않았다. 그런 정의감에 불타기에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그는 세상풍파에 찌든 중년사내일 뿐이다. 아크에 온 것도 단순히 중국 당국의 파견명령과 돈 때문이었다.
“오늘은 푹 쉬어라. 잠을 많이 자두는 게 좋을 거야.”
바이판이 그렇게 말하며 병실을 나갔다. 레베카는 금방 다시 잠들었다. 상처입고 지친 육체에는 휴식이 필요했다.
병실생활은 지루했다. 레베카는 고되고 자극적인 생활을 했었다. 지금은 몸이 쑤셔서 미칠 지경이었다. 바깥에 나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훈련병들은 정해진 구역을 제외하면 혼자서 다니지 못한다. 답답한 병실에서 멀뚱히 시간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아야앗.”
레베카가 인상을 찌푸렸다. 침대에서 내려와서 움직이려고 했다. 발끝이 땅에 닿자마자 통증이 밀려왔다. 침대에서 몸을 웅크리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장난 아니게 아프잖아.’
액체깁스 때문에 내부가 보이지 않지만, 레베카의 부상은 심각했다.
“다른 애들은 잘하고 있으려나.”
레베카는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이대로 낙오되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낙오된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치익.
병실의 문이 열렸다. 담당의 바이판이 들어왔다. 그는 레베카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폈다.
“억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뼈가 잘못 붙으면 재수술해야 하니까.”
바이판이 말했다. 레베카가 고개를 나직이 끄덕였다.
“네.”
“지루한 건 알겠지만, 이것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해라. 얌전히 치료받는 것도 훈련만큼이나 중요해.”
바이판은 레베카의 안색을 살폈다.
‘말은 이렇게 했어도… 하루 종일 병실에 갇혀 지내는 건 힘든 일이지.’
레베카가 물끄러미 바이판을 올려다봤다. 바이판은 턱수염을 긁적였다. 그는 자신의 영상투사기를 가져와서 병실 벽을 향해 설치했다.
끼리리릭.
영상투사기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벽을 스크린 삼아 영상이 재생됐다. 바이판은 영상투사기를 건드려서 몇 가지 설정을 마쳤다.
“이게 뭐죠?”
레베카가 물었다. 바이판은 어깨를 으쓱했다.
“내 콜렉션. 이걸 누르면 재생, 이걸 누르면 정지. 여자애들이 좋아할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바이판은 영화 매니아였다. 특히 역사물과 무협을 좋아했다.
쿠-우우웅!
영화가 시작됐다. 레베카는 멍하니 스크린을 쳐다봤다. 그녀는 영화를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상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현실처럼 움직였다. 그녀는 금방 영화에 빠져들어 몰입했다.
‘재밌어하니 다행이로군.’
바이판은 조용히 일어서서 병실을 빠져나왔다. 원래 훈련병들에게 영화 따위를 보여주는 것은 금지다. 행여나 나쁜 사상이나 사고방식에 물들 위험 때문이었다. 지금 훈련병들은 백지 상태나 마찬가지다. 그들은 조그마한 자극이나 교육만으로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뭐, 어때. 고작해야 영화인 걸. 그냥 놔두기엔 불쌍하니까.’
바이판이 휴게실에 들어가서 담배를 피웠다.
“하, 나도 아직 이런 감성이 남아있었군.”
짙은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단순히 의지박약이나 부상으로 낙오가 된 아이들은 모국에 돌아간다. 국가재산에 속하게 되는 셈이다. 대부분 사이킥 능력을 활용해서 국가기관에서 일하게 된다.
문제는 폐인이 된 아이들이다. 정신적으로 망가진 아이들은 그 어디에도 쓸 곳이 없다. 오히려 불안정한 능력 때문에 위험하다. 그런 아이들은 사이킥 연구부서가 맡는다. 결국 평생 실험실 쥐의 신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해부까지 실시한다는 말이 있다.
2주가 지났다. 레베카는 간간히 들어오는 교관들의 방문을 제외하면 바이판과 시간을 보냈다.
“이건 다 봤어요.”
“흐음, 그래?”
“진부하지만 나쁘진 않았어요.”
이야기의 화제는 전날 보았던 영화였다. 바이판도 새로운 어린 친구가 마음에 들었다. 레베카는 영리하게 영화를 볼 줄 알았다. 단순히 볼거리에 집중하지 않고, 인물내면에 초점을 맞추며 영화를 즐겼다.
‘친딸보다 낫군.’
바이판에게는 다 큰 딸이 있다. 시집을 간 뒤로는 연락이 뜸했다. 어느 순간부터 명절 때나 전화 한 번 오는 게 전부였다. 마누라가 죽고 나서는 그것도 끝이었다. 바이판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으나, 가족에게는 늘 소홀했다. 자신의 취미와 일이 인생이 전부였다.
“생각보다 뼈가 빨리 붙었어. 재활치료도 잘 받고 있고.”
“덕분이에요.”
레베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바이판은 그 웃음에 짙은 죄책감을 느꼈다. 정신력은 강하지만, 아직까진 천진난만한 아이다. 앞으로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저 아이는 변할 터다.
‘말이 좋아서 인류의 방패라고 부르는 거지… 실제로는….’
레베카의 2주는 평온했다. 하지만 훈련소의 2주는 평온하지 않았다.
훈련소에서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교관이 둘이나 더 죽었다. 지난번에 불타서 죽은 교관과 친하게 지내던 이였다. 그들은 죽은 친구의 원한을 갚듯이 훈련병들을 거칠게 몰아세웠다. 그들은 크나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제 남아있는 훈련병들은 나약해 빠진 어린애가 아니었다. 벼랑 끝까지 밀려서 악에 바친 사이커들이었다.
“닥쳐!”
훈련병 셋이 교관에게 대항했다. 경보가 울리고 훈련소가 혼란에 빠졌다. 호위 병력이 몰려오기도 전에 훈련병 셋은 교관들을 제압하고 무기를 뺏었다. 그들은 분노를 담아 총구를 당겼다.
1년이 넘는 훈련을 마친 소년들은 강인하고도 잔혹했다.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그들은 자멸을 택했다. 여기서 교관들을 죽여 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하지만 어린 소년들은 발악하며 발버둥 쳤다.
‘우리는 강하다.’
리벨 아키마는 멀리서 전투를 지켜봤다. 그는 날카로운 눈동자로 교관과 군인들의 대응을 살폈다. 기초적인 군사훈련 밖에 마치지 않은 훈련병이지만, 사이킥 능력을 이용한 전투방식은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생각 없이 막무가내로 싸우고 있어. 곧 잡히겠군. 개인 전력이 우수해도 저런 식으로 싸워서는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해.’
리벨의 예상대로였다. 대항했던 훈련병 셋은 금방 잡혔다.
“이 새끼들이 믹과 하우스를 죽였어!”
“진정해!”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잡힌 훈련병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 당했다.
탕! 탕!
총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동료의 죽음에 흥분한 교관 하나가 훈련병들을 쏴 죽였다. 옆에 있던 동료교관들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입으로만 ‘안 돼!’ 라고 말할 뿐이었다. 명령으로 시작된 적대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됐다.
‘서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리벨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언제까지 이런 훈련을 받아야 하는 걸까? 상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리벨도 다른 소년들도 한계에 달했다. 이대로는 버티지 못한다.
리벨을 다른 소년소녀들을 바라봤다. 리벨은 이미 훈련병들 가운데 파벌을 형성했다. 상당 수의 아이들이 리벨을 따르고 있었다.
‘결정했다.’
리벨은 저 멀리 있는 건물을 바라봤다. 레베카가 있는 병동건물이다.
‘아직 그 녀석이 저기에 있을까….’
어쩌면 이미 아크에 없을 지도 모른다.
그날 밤부터 리벨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관용 단말기를 훔쳐서 내부지도와 인원을 파악했다. 순찰루트와 지역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기초적인 전략지침에 따라 행동하는 것뿐이지만, 또래 아이들이 보기에는 리벨이 세우는 계획이 대단해보였다.
리벨은 자신과 절친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계획을 천천히 짰다. 외부로 계획이 새어나가서 발각되면 끝장이다.
‘지금까지 반응을 보면 나를 죽일 지도 모르지.’
일주일이 더 흘렀다.
아이들의 반감은 최고조로 달했다. 피폐해진 소년들은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그날 밤, 리벨은 숙소의 아이들 앞에서 계획을 말했다.
“우리는 아크를 탈출하는 거야. 배를 빼앗아 나가는 거지. 지금 아크에는 교관들을 제외하곤 비전투인원이 대부분이야. 전투병력은 소수에 불과하지. 우리가 힘을 합쳐서 싸운다면 전투력은 이쪽이 우위야.”
“그게 가능해?”
“날 믿어. 여태까지 계획을 세웠으니까. 우리가 저 교관들보다 못하게 뭐가 있지? 우린 사이커야. 그것도 아주 강력한 사이커. 우리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뭐든 할 수 있어. 왜 더 우수한 우리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하는 거지? 이건 말도 안 돼. 밖에 나가기만 하면 우린 뭐든 할 수 있어.”
리벨은 아이들을 설득했다. 허점투성이 논리였으며 사후대책도 제대로 없었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이미 지금 생활에 질릴 대로 질렸다. 하루라도 더 이렇게 살다가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안 돼. 다 죽을 거야. 그만 둬.”
반대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뼛속깊이 교관들을 증오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교관들에게 대항한다는 건 꿈조차 꾸지 않았다.
“겁쟁이!”
리벨에 동조하는 아이가 반대파들을 매도했다. 웅성거림이 커졌다.
“웃기지 마. 너희들이 도망가면 우리까지 피해를 입을 거야. 여기서 나가면 바로 밖에 알릴 테니까, 포기해.”
반대파의 말에 동조하는 아이들이 술렁였다. 리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여기서 반대파와 찬성파를 나눠보자.”
아이들이 움찔하며 자리에서 이동했다. 찬성파들이 리벨의 뒤에 섰다. 반대파들도 자기들끼리 모여들었다.
“앞으로 우리는 몇 년을 더 이렇게 살아야 돼. 그리고 드래곤이라는 것들이 쳐들어오면 목숨을 바쳐 싸워야하지. 너희들은 그렇게 살고 싶은 거야? 정말로?”
리벨이 반대파를 향해 말했다.
“널 따라가면 탈출할 수 있다는 거야?”
“동료가 많으면 확률은 높아지겠지. 그리고 가장 먼저 병동으로 갈 거야. 아마 훈련소에서 낙오된 동료들이 아직 거기에 남아있을 거야. 그 녀석들도 구출해서 같이 간다.”
그 말에 반대파에서 몇 명이 찬성파로 이동했다. 동료를 구한다는 말이 마음을 움직였다. 반대파는 어느새 10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대파가 압도적인 소수였다.
“너흰 끝까지 반대하는군.”
리벨이 반대파들에게 말했다. 반대파들도 머뭇머뭇했다. 그들은 교관에게 대항할 용기는 없었다.
“알, 알리진 않겠어. 우릴 놔두고 가.”
리벨이 침대 매트릭스 밑을 뒤적였다. 그는 숨겨둔 쇠붙이를 잡았다. 날카롭게 갈아서 예리한 쇠붙이였다. 리벨은 쇠붙이가 보이지 않게 소매 속에 감추고는 반대파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눈동자에서 흉흉한 빛이 새어나왔다.
“이젠 너희들은 동지가 아니야.”
리벨이 손을 움직였다. 쇠붙이를 던지는 것과 동시에 염동력을 사용했다. 가속이 붙은 쇠붙이가 연달아 반대파의 목을 뚫고 지나갔다.
쉬이이익!
“…동지가 아닌 놈들의 말은 믿을 수 없지.”
무방비하게 서있던 반대파들이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졌다. 그들의 피로 바닥이 흥건하게 젖었다. 찬성파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벨의 과감한 행동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죽일 필요까진….”
누군가가 리벨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저 녀석들 중에 한 명이라도 밀고를 한다면 우리가 다 죽어. 어쩔 수 없었어.”
리벨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리벨은 조금이라도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한 판단을 했다. 하지만 그의 판단은 충분히 비정상적이었다.
‘리벨은 우리와 달라….’
리벨의 판단기준과 생각은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한솥밥을 먹던 아이들마저 망설임 없이 죽였다. 경험이나 지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리벨에게는 있었다. 유독 강렬한 아키마의 혈통 때문일까, 아니면 부모에게 학대받으며 자라온 가정환경 때문일까.
찬성파들조차 리벨의 행동에 겁을 먹었다. 그들은 리벨을 두려워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