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
제12화 왜 그렇게 유난을 떨었던 거요?
장원은 멀지 않았다.
오솔길을 따라 일다경가량 걷자 불빛이 보였다. 불빛에 접근하니 고즈넉한 와옥이 나왔다. 문도 담장도 없는 장원이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마당에 그림자 하나가 서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 인영을 살폈다. 육척의 신장에 골격도 우람했으나, 여인이었다. 풍만한 젖가슴이 무복 밖으로 터질 듯 불거져있었다.
여인은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매부리코에 곰보였다. 떠버리 아저씨에게 속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성급한 판단이었음을 깨달았다. 얼굴이 심하게 얽어 정확한 나이를 판별하기는 어려웠으나 여인은 도저히 스물한 살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서른은 넘었을 터였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닌지라 직설적으로 물었다.
“소저가 부용 아씨의 딸이오?”
“아니에요. 소주(少主)는 안에 있어요. 나는 소주의 호위인 강태수예요.”
사내처럼 걸걸한 목소리에 이름도 남자 같았다.
나는 괜히 안도했다. 기대를 접지 않아도 되어서가 아니라 떠버리 아저씨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님을 확인해서였다.
나도 내 소개를 했다.
“나는 전충이오.”
여인이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바로 시작할까요?”
“뭘 말이오?”
“루주께 말씀을 듣지 못했나요? 무인이라면 누구든 본 장원에 들기 전에 나와 손을 섞어야 해요.”
나는 실소했다. 간단한 통과의례가 있을 거라더니 이거였나.
기꺼이 여인과의 비무에 응하기로 했다. 그녀가 의도적으로 발산한 내기에 구미가 당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적어도 조우성보다는 월등히 강해보였다. 강자와의 대결이라면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여인이 허리춤에 걸려있던 채찍을 꺼내들었다.
차라락.
기음을 일으키며 둥글게 말려있던 채찍이 길게 요동을 쳤다.
나는 왼손에 철봉을 쥐었다. 여인을 경시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였다. 부리부리한 여인의 눈에 기광이 어렸다. 내 의도와 반대로 자기를 무시한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흑도 나부랭이들도 들고 다니지 않을 투박한 철봉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십상이었다.
나는 우수를 내밀어 선공을 양보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땅바닥 위에서 춤을 추고 있던 채찍이 곧장 나를 향해 날아왔다.
쉬이익.
뱀이 수풀을 헤치고 나가는 기음을 달고 날아온 채찍이 내 동체를 감쌌다. 회(回)로써 채찍을 빗겨낸 나는 공중으로 도약했다. 채찍이 나를 쫓았다. 절(折)로 허공에서 방향을 바꾼 나는 사선으로 떨어져 내리며 철봉을 여인의 어깨에 내리찍었다. 여인은 채찍을 겹겹이 접어 내 일격을 막아냈다.
캉!
쇠와 쇠가 충돌하는 기성이 야밤의 적막을 찢어발겼다. 내 철봉에 실린 기력을 이기지 못한 여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팔뚝이 얼얼했지만 나는 지체 없이 그녀를 추격했다.
“핫!”
기합성을 터뜨린 여인이 반격에 나섰다. 날이 선 채찍이 다리를 감아왔다. 나는 폴짝 뛰어올랐다. 그 순간 여인의 좌수에서 은빛 섬광이 쏟아졌다. 일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암수였다.
나는 이(移)를 발했다. 오절신공 최고의 절기였다. 빠져나갈 공간이 없었음에도 내가 열두 개의 은침을 모조리 흘려내고 면전에 나타나자 여인이 소스라쳤다.
내 철봉에서 발출된 뇌전이 여인이 펼친 채찍의 방어벽을 강타했다. 여인은 오륙 장이나 튕겨나갔다. 나는 그녀를 쫓지 않고 제자리에 섰다.
땅을 뒹굴다 간신히 신형을 추스른 여인의 동공에 낭패감과 투기가 동시에 어렸다.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재차 나에게 달려들 기세인 그녀를 어딘가에서 날아온 음성이 제지했다.
“그만 해요, 언니. 그걸로 충분해요.”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충견처럼 여인이 고분고분 채찍을 내렸다.
와옥을 나온 이는 묘령의 여인이었다.
그녀를 본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달빛을 받은 피부는 투명하리만치 창백했고 하나하나가 완벽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이목구비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강호에 나온 이래 보았던 어떤 미인도 그녀에 비할 수 없었다. 실로 경국지색이었고 가히 우물이었다.
그러나 내게 충격을 준 건 숨을 멎게 만드는 그녀의 미모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이 누군가와 너무나 닮아서 놀란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누군가는 떠버리 아저씨가 아니었다.
“당신은 하성 아저씨의 딸이 아니군.”
절세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부용 아씨’의 딸은 맞아요.”
“제길.”
소월루의 주인인 진청운에게 뱉은 욕이었다. 내 속에서 그에 대한 호감이 증발하고 대신 배신감이 들어찼다.
절세미녀가 내 짐작이 옳았음을 확인해주었다.
“아버지에게 전서구를 받고서 전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직접 전 공자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면 좋았을 테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을 거예요. 태극검문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하니까요.”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들어가요, 전 공자. 어찌 된 일인지 모두 들려줄 게요.”
나는 순순히 절세미녀의 뒤를 따랐다. 웬일인지 강태수는 우리를 쫓지 않고 마당에 남았다.
절세미녀가 안내한 곳은 두 평 남짓한 좁은 방이었다.
내부는 썰렁했다. 소담한 원형 탁자 하나에 등받이 없는 의자 두 개가 달랑 놓여있을 뿐이었다.
“차를 대접하고 싶지만 바로 이야기를 듣고 싶겠죠?”
“그렇소.”
“이야기에 앞서 내 소개부터 할 게요. 나는 진소월(秦素月)이에요.”
“나는 전충이오.”
“알고 있어요. 반가워요, 전 공자. 해원장(解冤莊)에 오신 걸 환영해요.”
나는 입술을 씰룩였다.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이름이었다.
“우리, 앉을까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진소월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고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탁자를 돌아간 그녀가 내 맞은편에 착석했다.
원탁은 자그마했고 나는 범인의 두 배 가까운 길이의 팔을 갖고 있었기에 손을 뻗으면 그녀의 볼에 닿을 듯했다. 문득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음을 자각한 나는 무상심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평정심이 돌아왔다.
유심히 나를 지켜보던 진소월이 옥음을 흘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답을 요하는 질문이 아니었기에 잠자코 있었다. 과연 진소월이 바로 말을 이었다.
“모든 것은 신부용(申芙蓉)과 그녀의 부친인 신필주(申弼宙)의 욕심으로부터 비롯되었어요.”
자신의 모친과 외조부일 터임에도 진소월은 그들이 마치 남인 양 언급했다.
“앞으로도 경칭은 생략할 게요. 신필주는 전원의 명물이었던 오연객잔의 주인이었어요. 흑문의 수첩(首諜)이기도 했고요. 흑문과 수첩이 뭔지는 아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문은 강호 최고의 정보조직이었다. 그리고 수첩은 독립된 분타들의 연합체인 흑문 내에서 정점에 오른 자들이었다. 흑문엔 따로 문주가 없었다.
“삼처사첩을 거느렸지만 신필주는 늙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었어요. 그러다 환갑이 다 되어 기적적으로 자식을 얻었어요. 이를 두고 그의 씨가 아니라는 등의 수군거림이 그치지 않았으나 진위를 판별할 근거가 없으니 그냥 넘어갈 게요. 신필주는 늘그막에 생긴 딸을 애지중지했어요. 시쳇말 그대로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을 정도로 어여삐 여겼죠. 호연객잔의 ‘부용 아씨’는 곧 전원의 유명인사가 됐어요. 왜 그런지 아나요?”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진소월이 설핏 웃었다.
“겸손하군요. 방금 공자가 짐작했을 것처럼 그녀의 미모 때문이었어요. 그녀는 철이 들기도 전에 남다른 미색을 드러냈어요. 아직 초경을 치르지 않은 나이임에도 그녀를 본 사내들은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요.”
나는 진소월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청운과 판박이였지만 그녀는 모친인 ‘부용 아씨’의 미모도 물려받았을 터였다.
문득 자신을 기만한 여인과 피가 섞이지 않은 딸을 위해 그에겐 지옥과도 같았을 전장에 뛰어들어야 했던 비운의 사내가 떠올랐다. 가슴이 아팠다.
“그이를 생각하고 있군요.”
“아저씨를 본 적이 있소?”
무심코 물었지만 당연히 진소월이 부인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기억이 나요. 순박하게 생긴 분이셨죠. 무척 자상한 분이었고. 목소리도 다정다감했어요.”
대번에 목전의 여인에 대한 신뢰감이 산산조각 났다.
떠버리 아저씨는 자신의 딸이 갓난아이였을 때 그녀를 떠나왔다고 했다. 태어난 지 백일도 지나지 않은 아기가 그의 모습과 음성을 기억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진소월의 분홍빛 입술에 쓴웃음이 걸렸다.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여기는군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나에게 천형(天刑)을 내린 게 미안했던지 하늘은 기괴한 재능도 동시에 주었더군요. 뭔지 아나요?”
“어찌 알겠소?”
내 퉁명스러운 반문에 진소월의 고소가 짙어졌다.
“나는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있어요.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요.”
실로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진소월은 내 마음을 읽었다.
“의심하는 게 당연해요. 증명할 수 있어요. 뭐든 말해 봐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반복해 볼 게요.”
암기력과 기억력은 별개의 영역이었지만 나는 진소월을 시험하기로 했다.
“진상무영, 호중연연, 고현무극, 곡직일여, 주망신지…….”
나는 빠르게 무상심공의 구결을 읊어나갔다. 진소월이 알아도 상관없었다. 천지간에 오로지 나만이 운용할 수 있는 심공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들이 익히려 들다간 백중백(百中百) 주화입마에 들 터였다.
그렇더라도 만약을 위해 중후반부터 시작했고 간간이 글자를 바꾸었다. 중간에 구환도법의 도결 일부를 역순으로 비틀어 삽입하기도 했다.
“……타정소통, 오류집일, 원합청홍.”
내가 말을 그치고 가만히 바라보자 진소월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이백 자가 넘는 난해한 구결들을 정확히 되풀이했다. 나는 찬탄사를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하아, 대단하구려.”
“이제 나를 믿을 수 있나요?”
“그렇다고 해둡시다. 근데 천형이란 건 뭐요?”
진소월의 옥용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는 햇빛을 볼 수 없어요. 일광을 받으면 살갗이 짓물러져서요. 그리고…….”
말끝을 흐리는 진소월에게 뒷말을 재촉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그 얘긴 아껴두는 게 좋겠어요. 좀 민망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진소월이 얼버무린 뒷내용이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기로 했다. 누구에게나 말 못할 비밀이 한두 개쯤은 있는 법이었다. 나도 그랬다.
“이야기가 옆길로 샜군요. 다시 본래의 줄기로 돌아갈까요. 딸의 미색이 나날이 무르익자 신필주는 더럭 겁이 났어요. 소문난 미인은 늑대들의 사냥감이 되기 일쑤니까요. 그래서 그녀가 열 살이 된 무렵부터는 면사를 씌웠어요.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됐는지 특단의 조치를 취했어요. 그게 뭔지 아나요?”
‘알 턱이 없지 않소?’라고 반문하려다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를 숨겨두었겠군.”
진소월이 미소를 지었다. 아찔했다.
“맞아요. 신필주는 딸이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 그녀를 이곳 별장에 집어넣었어요. 그녀는 열한 살 때부터 만 칠 년 동안 이 장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어요. 신필주가 그녀에게 붙여놓은 이들이 철저하게 그녀를 감시하고 통제했으니까요.”
떠버리 아저씨를 기만한 ‘부용 아씨’에 대해 품었던 반감이 옅어졌다. 알고 보니 그녀도 불쌍한 처지였다. 한창 행복했어야 할 시절에 뇌옥에 갇힌 것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강요받지 않았던가.
“대체 신필주란 자는 왜 그렇게 유난을 떨었던 거요? 늑대들의 사냥이 아무리 두려웠대도 너무 지나친 처사였을 듯싶은데.”
“야심 때문이었어요. 신필주는 여식을 십전무객(十全武客)의 짝으로 만들 작정이었어요. 그가 누군지 아나요?”
어찌 모르겠는가. 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인물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