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8
제77화 그는 그냥 가지 않았소
누운 채로 운공에 들었던 나는 기적을 경험했다.
형체를 유지한 게 신기할 정도로 망가졌던 팔다리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었다. 깨지고 터지고 찢겼던 팔다리의 뼈와 근육과 힘줄들이 원상 복구되는 과정을 체험하며 나는 희망에 부풀었다. 마왕을 따라잡는 건, 그래서 복수를 실현하는 건 꿈만은 아니었다.
이모가 남겨 준 치유력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선물이지만 망외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에 더더욱 의미가 컸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구상을 시도해보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잠시 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시간을 재 보지는 않았지만 일각을 넘지 않았을 터였다. 이모가 보여줬던 것에 비하면 느렸지만 내 본래 회복력과 비교하면 수십 배, 아니 수백 배쯤 빠른 속도였다.
내가 일어서는 걸 본 이광이 모옥에서 환성을 질렀다. 그에 이어 점박이 노인이 소리쳤다.
“괜찮으신지요, 소주?”
“네, 은인. 하지만 이모는…….”
내 발 밑에 널브러진 이모의 하반신을 보자니 목이 메었다.
“자루를 주십시오. 정자에 두시면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감정을 추스른 나는 점박이 노인에게 말했다. 점박이 노인이 이모를 담을 녹피 자루를 가지러 모옥으로 들어갔다. 나는 나에게 달려올 기세인 이광에게 주의를 주었다.
“내가 이를 때까진 이 근처에 오면 안 된다.”
벌써 몇 발짝 튀어나왔던 이광이 움찔했다. 그러고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큰 형님!”
나는 진청운에게 부탁했다.
“마차가 필요합니다, 루주님.”
진청운이 입술을 비틀었다.
“은신처를 옮겨야 하는가?”
“그렇습니다. 제가 이곳을 수습하는 동안 마차를 구할 방도를 생각해 주십시오. 일다경 쯤 걸릴 것 같습니다.”
“알겠네.”
진청운과의 대화를 마치자마자 점박이 노인이 사슴가죽으로 만든 자루를 들고 모옥에서 나왔다. 그는 그것을 내가 지시한 정자에 갖다 두고는 물러갔다. 나는 정자로 천천히 걸어갔다. 양 무릎이 다 후들거렸지만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 문득 아직도 철봉과 옥소를 쥐고 있음을 깨달은 나는 무기들을 품에 집어넣었다.
정자에서 녹피 자루를 취한 나는 이모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원래는 내가 죽었을 경우 내 시체를 운반할 용도로 점박이 노인이 가져왔던 자루에 이모의 육편들을 담았다.
두부가 박살이 난 탓에 이모는 어루만질 곳이 없었다. 나는 으깨진 육신 조각들을 쓰다듬으며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소녀처럼 방실거리는 웃음이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다. 더 많이 웃음으로 화답해주지 않았던 처사가 못내 후회스러웠다.
이모가 든 자루를 내려놓은 나는 한우경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를 악 무는 바람에 덜 아문 턱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고통을 무시하고 한우경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 든 철검이 내 심장을 찔렀다.
한우경의 동체를 안아든 나는 그의 머리를 찾았다. 짐작과는 달리 꽃밭이 아니라 그보다 오륙 장이나 뒤편의 초지에 뒹굴고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기에 마치 살아있는 듯했다. 그의 동공은 그가 생의 마지막에 느꼈을 감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불안.
그것은 목전에 이른 사신의 손길을 감지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안위에 대한 염려의 표출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에 짓눌린 나는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인자한 목소리가 내 고막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허허, 일어나려무나. 이만 일에 엎어진대서야 어찌 사상 최강의 절대패왕이 될 수 있겠느냐?’
나는 내 심혼을 울리는 스승의 명에 따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한우경의 두부를 얹은 동체를 조심스럽게 받쳐 든 나는 폭포로 갔다. 한우경이 평소 자주 찾던 장소였다.
나는 그곳에 그의 유해와 철검을 묻었다.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그가 만약 자신이 생을 마감하면 거기를 묫자리로 삼고 싶다고 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농담조로 말했고 나도 가볍게 흘려들었으나 지금에 와선 유언처럼 되어버렸다.
적들이 파헤칠 것을 우려해 나는 봉분을 세우지 않고 한우경이 든 곳을 평평하게 다졌다. 그러고는 아홉 번 절을 했다. 나는 그가 구배지례를 받아들이리라 믿었다.
마음 속 사부에게 복수를 맹세하지는 않았다. 그가 원하지도 않을 터이거니와 이미 이모의 주검 앞에서 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나는 약속했다. 기필코 십왕을 능가하는 절대무존(絶對武尊)이 되겠다고. 그리고 만천하에 내 스승의 함자를 밝히겠노라고. 그로써 한우경이라는 이름 석 자를 무림의 역사에 영원히 아로새기겠다고.
이모와 한우경을 수습한 나는 폭포수에 몸을 씻고 점박이 노인이 갖다 준 흑의무복으로 갈아입은 후 정자에서 진청운과 만났다. 내 허락을 받은 이광도 그를 따라 내려왔다. 점박이 노인은 이모의 시신이 든 자루를 회수하러 갔다.
내 앞에 이른 진청운이 물었다.
“마왕이 다시 올 것 같은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럴 거라 가정하고 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실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적어도 마왕이 다시 올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그러나 마뇌라면 얘기가 달랐다. 나는 내 명줄을 자르지 않은 마왕의 조치가 마뇌와 사전에 의논한 것이 아니리라 판단했다. 마왕이 나를 망가뜨리되 살려둘 것을 알았다면 마뇌는 반드시 추가적인 안배를 해두었을 터였다. 아무리 사소해보일지라도 후환을 남기는 건 그와 같은 책사들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련으로 귀환한 마왕은 마뇌에게 내가 생존해있음을 알려줄 것이었다. 그러면 마뇌는 깔끔한 마무리를 위해 팔마를 파견하거나 사벌에 내 소재를 알려 사왕이나 칠사에게 처리를 떠넘길 터였다. 어느 경우건 발생하는 순간 대책이 없었다. 그러니 적들이 오기 전에 대피하는 게 최선이었다.
진청운과 의견이 갈렸다.
내가 그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고 난색을 표하자 진청운이 재차 강조했다.
“그는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일세.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거나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결코 우리에 관해 누설하지 않을 걸세. 내 목숨을 걸고 보증할 수 있네.”
“그이를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이 주변의 이목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진청운은 안평의 해원사를 담당하는 그의 친인에게 점박이 노인을 보내 마차를 구해줄 것을 부탁하자고 했다. 나는 그를 신뢰하는 진청운의 안목을 신뢰했다. 그러나 그가 안전한 인물인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흑문과 상운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벌의 정보력이라면 진청운과 관련된 인사들을 파악하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들이 진청운과 막역한 사이인 안평 해원사의 수좌를 방관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그에겐 틀림없이 감시의 눈길이 붙어있을 터였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네. 하지만 소 어른을 보고서 자네를 떠올리는 건 어려울 걸세. 단순히 마차 하나를 빌리는 일에 눈들이 따라붙지는 않을 거라는 말일세.”
진청운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자기가 떠난 후 바로 은신처를 옮기라던 진소월의 당부를 기우로 치부한 탓에 뼈아픈 대가를 치르지 않았던가.
꼬투리를 잡힐 요소는 철저하게 배제해야 했다.
내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간파한 진청운이 역습했다.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는가? 자네가 나가기는 어렵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직접 처리하자니 자네가 허락하지 않을 게 빤한데.”
아픈 곳을 찔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직접 나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내 덩치가 너무 커서 남들 눈에 쉬이 띌 까봐 그런 게 아니라 부상의 후유증 때문이었다.
운신이 가능해졌으나 나는 아직 정상이 아니었다. 기실 무릎이 불편해 걸음걸이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이런 몸으로 안평에 나가는 건 무리였다.
내가 즉답을 못하자 얌전히 듣고 있던 이광이 끼어들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제게 맡겨주세요.”
나와 진청운은 동시에 이광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불허의 뜻을 밝혔다.
“안 된다.”
미소녀처럼 예쁘장한 얼굴을 흉한처럼 찡그리며 이광이 열변을 토해냈다.
“할 수 있다니까요. 작년에 전원으로 가던 중에 상인들이 마방에서 거래하는 광경을 여러 번 보았어요. 저만 보내기 뭐 하시면 막내 할아버지를 붙여주세요. 막내 할아버지는 제 상전인 척 하면 돼요. 흥정은 제가 할 게요. 더군다나 장원에 있을 때 루주님께 마차를 모는 법도 배웠잖아요. 평탄한 길이라면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어요. 제발 시켜주세요. 진짜 자신 있어요.”
나는 진청운과 마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헤아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광과 점박이 노인은 외부에 노출된 적이 없었기에 의외로 위험부담이 적었다. 그리고 점박이 노인은 하급의 독인이었으나 흑도의 불량배 몇 명쯤은 능히 물리칠 능력이 있었다.
내 암묵적인 동의를 얻은 진청운이 이광에게 마방의 마사들을 대하는 요령과 마차를 구입할 시의 주의사항들을 일러주었다. 신이 난 이광은 반 시진 전의 참사를 잊은 듯 연신 싱글벙글했다.
나는 좌측 와옥에 들어섰다.
세 평 남짓한 방에 나란히 드러누운 괴선과 광객이 문을 여는 내게 시선을 꽂았다. 나는 그들의 중앙에 좌정했다. 침통한 분위기가 실내를 만근 거석처럼 내리눌렀다.
이미 진청운에게서 상황 보고를 받았을 두 노인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들은 한우경과 이모가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내게 던질 위로의 말을 찾느라 고심하는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불편한 얘기도 거침없이 쏟아내던 평소와 달리 머뭇거리던 괴선이 탄식으로써 대화의 운을 뗐다. 그러나 이어진 내용은 내 예상과는 딴판이었다.
“허어, 이거야 원, 어째 이런 일이. 헌데, 대체, 네가 어떻게 살아있는 게냐?”
나는 실소했다. 고작 그걸 물으려고 이렇게 뜸을 들였단 말인가.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나의 생존은 향후 모든 걸 바꿀 것이었다.
“전날 철마의 명줄을 끊지 않고 돌려보낸 내 호의에 대한 보답이라고 합디다.”
광객이 눈치도 없이 찬탄했다.
“허어, 마인들의 수괴이되 도리를 아는 걸물이로다.”
괴선이 당장 면박을 주었다.
“이런 푼수 같으니. 그게 지금 사부인 양 섬기던 어른을 잃은 이놈 앞에서 할 소린가?”
조심스럽게 나를 대하던 괴선의 호칭에 ‘놈’이 돌아왔다. 나는 기뻐해야 할지 불쾌하게 반응해야 할지 헷갈렸다. 어쨌거나 괴선의 책망에 당황한 광객이 허둥지둥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네, 은공.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아닙니다, 어르신.”
광객이 거듭 사과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이. 밖의 소란을 인지했지만 보다시피 이런 꼴인지라. 면목이 없네.”
나는 같은 응답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괴선이 정곡을 찔렀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린가, 태산? 우리가 멀쩡했다고 뭐가 달라졌겠는가? 시체만 두 구 더 늘어났을…….”
다소 과한 언사라고 자체 검열했는지 괴선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두 기인이 하필 마왕이 쳐들어오기 직전에 운신불능의 중상을 당했던 건 그들의 입장에서는 전화위복이었고 나에겐 불행 중 다행이었다.
헛기침을 한 괴선이 최초의 화제로 돌아갔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이해난망이다. 설령 철마의 건으로 네놈에게 일말의 선처를 베풀 요량이었다고 해도 이렇게 선선히 놔 주다니. 하다못해 팔 한 짝도 자르지 않고. 그 어른과 그 아이가 그를 공격할 동안 네놈이 손가락만 빨고 있지는 않았을 테니 마왕도 네 무력을 보았을 것 아니더냐? 방치하면 훗날 자기를 능가할 재목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찌 무시무시한 후환을 그대로 두고 그냥 갔단 말이냐? 최소한의 금제도 가하지 않고! 그럴 거면 그 어른을 죽이질 말던가. 괜히 검총과 원수만 되지 않았더냐? 뭐, 네놈하고는 원래부터 적이긴 했다만.”
괴선답지 않은 예리한 지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둘러가지 않고 바로 그의 의구심을 해소시켜주었다.
“그는 그냥 가지 않았소.”
“무슨 말이냐?”
“그는 가기 전에 나를 철저히 파괴했소. 내 단전을 터뜨리고 팔다리도 영영 쓰지 못하도록 만들었소.”
“뭐라? 허면 어떻게 네 발로 여길 들어올 수 있었더냐?”
나는 우연히 이모의 피를 받은 후 내게 벌어진 기사를 두 노인에게 털어놓았다. 두 사람 모두 찢어질 듯 입을 크게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