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20
20화.
“……하아.”
이안 아이넬과 훈련을 끝마치고 여자기숙사로 돌아온 샬롯은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쉬었다.
검술에 관련해서 꽤나 깊은 가르침을 받은 풍족한 시간이었다.
배울 때까지만 해도 이제 더 이상 맞고 다니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을 했지만….
막상 기숙사 곳곳에 남은 신입생 뷔페의 흔적들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움츠러들게 된다.
어제 새벽에 여생도들끼리 담합해서 대청소를 했지만, 흐릿하게 남은 핏자국이라든가, 시큼하게 배인 땀 냄새는 아직까지 심장을 쿵쿵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나마 방이 1층에 있기에 계단을 오르며 어제의 역사를 탐방하지는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생각하며, 샬롯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으나….
바로 옆방 문이 열리며 갈색단발 머리의 소녀가 튀어나왔다.
다이니 브랜드.
반 배치고사에서 자신을 무참하게 짓밟고 승리했던 당돌한 여생도.
브릴리언 패거리에도 일찍이 자리 잡은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생도였다.
샬롯은 처음에 다이니의 옆방을 배정받았다는 걸 알고 괴롭힘당하지는 않을까 했으나.
의외로 다이니 브랜드는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저기, 야.”
“어? 나?”
조금 다른 방식으로 두 번 불린 샬롯.
그 말투에서 다이니가 왠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평소의 시원시원한 성격과 다르게 쭈뼛거리던 다이니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급전이 필요해서 그런데, 돈 있으면 조금 빌려주라.”
불량스럽게 뺏어가려는 게 아니고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말투에서 샬롯은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혹시 너도 2학년 선배들한테 뭐 뺏긴 거 있어?”
“…….”
예상이 적중했는지 다이니는 고개를 홱 돌리고는 입고 있던 겉옷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냥. 빌려줄 수 있냐고.”
무너져 가는 일레인 가문의 마지막 희망인 샬롯이지만 그렇다고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니진 않았다.
당장에 가보라 불리는 ‘초식의 가지’를 되찾아올 돈도 부족했으니까.
답하기 곤란한 샬롯이었으나 다행히도 다이니가 고개를 휘저으며 말을 주워 담았다.
“하아, 됐다. 그냥 자라. 애들한테 말 못 한다고 너한테 이러는 것도 찌질하네.”
다이니가 그대로 샬롯을 지나치려던 순간.
쿵.
쿵.
쿵.
2층 계단 위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히 여성의 발걸음이라는 느낌보다는 묵직한 무언가가 계속 계단턱에 걸리는 듯한 소리.
장밋빛 화려한 머리색을 가진 소녀, 마리아 레이로즈가 무기들을 질질 끌면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어엉? 너희 뭐 하냐. 이제 소등 시간일걸?”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샬롯은 목을 타고 혀 위에 올라탄 말을 억지로 다시 삼켰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하지만 그와 반대로 다이니 브랜드는 거리낌 없이 물었다.
“뭘 물어. 어제 우리가 수성을 했으면 이번에는 공성을 해야지.”
“잠깐만, 설마…….”
지금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게 맞냐고 다이니는 되물으려 했으나 마리아가 말을 끊으며 호기롭게 웃어보였다.
“신입생 뷔페 다음은 선배 뷔페지! 2학년 기숙사 가서 다 조지고 올 거야!”
“혼자서?”
어물쩡거리는 샬롯의 물음에도 마리아는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라인 레이먼드 님도 악마의 군세를 홀로 이겨내셨어! 기사를 꿈꾸는 자로서 숫자는 문제가 아니야.”
만약, 라인 레이먼드.
그러니까 이안 아이넬이 이 말을 들었다면 바로 이마를 지긋이 누르면서 자신을 무식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아 달라 부탁했겠으나….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는 동갑내기 소녀의 패기에 감화된 두 사람밖에 없었다.
“와.”
“…….”
솔직히 대단해 보였다.
자신들은 전혀 생각도 못 했던 일을 혼자 하려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잠시 침묵이 깔린다.
샬롯은 우물쭈물거리고 있었고, 팔짱을 낀 다이니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마리아를 바라봤다.
“뭘 꼬라…….”
“야, 나도 같이 갈래.”
“엉?”
다이니의 말에 오묘한 표정을 지은 마리아가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마저 내려와서는 다이니를 슬쩍 훑어봤다.
그러곤 혀를 한번 차더니 답했다.
“짐덩이를 데려가서 지켜줄 생각은 없는데?”
“내 몸은 내가 알아서 지켜. 너야말로 괜히 도와달라고 하지 마.”
“하! 패기 좋네! 같이 가려는 이유라도 들어보자.”
마리아의 물음에 다이니는 팔짱을 풀고 주먹을 꽉 쥔다.
“어제 뷔페에서 세나 선배가 우리 부모님 유품을 가져갔어. 그거 다시 되찾아 와야 해.”
“허! 스토리 좋고! 오케이, 0시에 출발할 거니까 준비해 놔!”
“나, 나도!”
목소리를 높이며 끼어든 샬롯에게 꽂히는 두 소녀의 시선.
원래라면 그냥 방으로 돌아갔겠으나, 샬롯은 이걸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이니와 마찬가지로 일레인의 가보 역시 세나가 가져갔으니까.
“세나 선배가 가보를 가져가서… 나, 나도! 같이 싸우게 해줘!”
다이니는 별 상관 없다며 어깨만 으쓱거릴 뿐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마리아는 손으로 턱을 감싸며 샬롯을 쭉 훑어봤다.
“너 최근에 이안이랑 훈련하고 있지?”
“어? 으, 으응. 오늘도 했어.”
뭐가 문제인 걸까.
하지만 샬롯의 걱정과는 반대로 마리아는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채용! 실력 한번 보자고!”
* * *
“1학년 신입생, 마리아 레이로즈! 이번엔 우리가 선배들을 조지러 왔습니다아아!”
“푸핫!”
호기로우면서도 강단 있는 외침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저게 바로 대장부의 품격이지 않겠는가.
아마 레이로즈가 봤어도 이번만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아무래도 샬롯이랑 다이니를 도와주러 온 것처럼 보이지는 않고.’
두 사람은 그냥 2학년들과 싸우러 나가는 마리아의 옆에 껴서 본인들 물건을 찾을 심산으로 보였다.
‘꽤 용기를 냈는데.’
검을 쥔 손이 벌벌 떨리고는 있었으나 그래도 도망치지 않고 있는 분홍 머리 소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 미친년이!”
“어제부터 진짜 돌았구나?”
“저거 진짜 또라이야! 나 쟤 때문에 옆구리 멍들었어!”
아무래도 어제 신입생 뷔페에서도 큰 활약을 했는지 2학년들이 마리아를 보자마자 이를 간다.
“아, 좋아좋아.”
그런 반응을 즐기는지 마리아는 곧바로 자신이 가져온 커다란 가방을 뒤적여서 무언가를 쑥 뽑았다.
“창! 아주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무기지! 말을 타는 기사에게 있어 검보다 더 중요한 무기라고 볼 수도 있어!”
갑자기 자기 혼자서 막 떠들어대며 창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무기를 몇 개나 가져온 거야.’
대충 봐도 가방 안에 무기를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 같은데….
“따라 올 거면 오고. 쫄아서 못하겠으면 구경이나 해!”
함께 온 두 사람에게 호탕하게 외친 후, 마리아는 마치 마녀처럼 깔깔 웃으며 앞으로 치고 나갔다.
나이트 아카데미는 기본적으로 전투 기술을 배우는 장소다.
학년이 지날수록 강함의 격차는 분명하고, 그렇기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 질서가 명확히 잡혀 있지만….
“크흐하하하!”
그중에도 예외는 존재한다.
붉은 장미인 줄 알았으나, 실은 야차였던 소녀가 광기에 사로잡혀 질서를 뒤엎기 시작했다.
“꺄아악!”
“바, 방패 가지고 있는 애가 앞으로 좀 나서 봐!”
“로미니아가 방패 가지고 있잖아! 어디다 버렸어!”
“어제 저년 때문에 수리 맡겼어!”
넓게 휘둘러지는 창에 도망치듯 뒤로 물러나는 2학년들.
화려한 불꽃이 되어 의도치 않게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끈 마리아 레이로즈.
그녀와 함께 왔던 두 소녀는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눈을 돌리니 다이니가 1층 창문을 통해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고 샬롯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조금 아쉽네.”
개인적인 욕심으로는 마리아의 싸움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입구 앞에서 거세게 창을 휘두르며 지형을 이용해 수적 열세를 뒤집는 모습.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말투와는 다르게 교활할 정도로 자신이 이기는 방법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부터가 솔직히 호감이었다.
남들이 볼 때는 숫자 앞에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 말하겠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이길 생각이었다는 거니까.
나사 빠진 듯한 성격 때문에 고민해 왔지만, 오늘 모습에서 결심이 섰다.
마리아 레이로즈. 합격이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마리아가 아니었기에 조금 시야를 넓게 잡고 기숙사를 눈에 담는다.
혹시 모르니까 넬슨이 준 투구를 더 깊게 눌러쓴다.
뒤따라 들어갈 수는 없으니 밖에서라도 상황을 좀 파악하고 싶었는데….
‘그런데 무사히 나오면 어떻게 하지.’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되면 넬슨의 촉매로 사용할 ‘초식의 가지’를 얻지 못하는 거 아닌가.
애매해진 상황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드르륵 하고 3층 방 중 창문이 하나 열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얼굴을 내민 건….
“남자?”
분명 여자 기숙사인데?
내가 잘못 봤나 싶어서 투구 바이저를 올리고 확인해 봤으나 역시 남자였다.
녀석은 소란을 틈타서 도망치려는 건지 신체를 강화해서는 1층으로 착지했다.
깔끔하게 양쪽 발에 마나를 분배한 게 인상적이긴 했지만….
얼굴을 보니 낯익는 사람이었다.
일레인 가문의 가보를 뺏어 간 여생도의 남자친구다.
분명 샬롯을 둘러싼 무리에 섞여 킥킥거리며 웃고 있던 걸 봤다.
“너, 너 뭐야?”
나를 확인한 녀석은 당황하며 몸을 추슬렀으나, 이미 내 주먹은 얼굴에 꽂혀 들어가 있었다.
퍼엉!
깔끔하게 들어간 주먹에 몸이 뒤로 밀려난 녀석은 기숙사 벽에 뒤통수를 부딪히고 쓰러졌다.
“괘씸한 놈.”
한창 검만 휘둘러야 할 때에 연애질이나 하고 있어?
까마득한 선배로서 후배를 향한 충고의 주먹이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갈고리 밧줄을 풀어헤친다.
“저 방이 그 여자의 방이라 이거지?”
아마 여자친구랑 좋은 시간 보내려다가 마리아 때문에 소란이 일자 도망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차라리 잘됐다.
다이니랑 샬롯이 도착하기 전에 내가 먼저 방으로 들어가 초식의 가지를 빼 오면 된다.
밧줄을 걸고 벽을 타고 올라가 창문으로 방에 들어간다.
일련의 행동들은 버벅임 없이 깔끔하게 진행되었다.
“이건가?”
지저분한 방 책상 위에 놓인 보석함.
열어보니 이것저것 물건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지에 달린 꽃모양 브로치가 딱 보였다.
수월하게 챙길 수 있겠구나 싶던 순간.
벌컥!
방문이 열리며 들어온 푸른 머리의 여성.
샬롯의 물건을 뺏어 간 사람도 아니었고 완전히 처음 보는 2학년이었으나 문제는 여기가 여자 기숙사라는 거였다.
“도둑?”
‘뭐지? 세나라는 여자 방이 아니었나?’
판단을 잘못했나 싶다가도 1학년 귀중품이 담겨 있는 보석함을 보며 스스로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신하던 찰나.
푸른 머리의 여생도는 내게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