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21
21화.
허리까지 늘어진 연푸른 머리가 흩날린다.
‘머리색이…….’
저건 멋을 부리겠다고 염색을 한 것도 아니었고, 가문의 핏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마나와 몸의 친화력이 너무 높아서 머리 색상까지 순수 마나와 유사한 색상으로 물든 것이다.
소위 말하는 축복받은 몸.
몸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듯 쥐고 있는 검.
여성임에도 잘 자리 잡은 근육과 올곧게 잡혀 있는 무게중심.
목덜미까지 전부 잠그고 있는 잠옷 단추는 그녀의 성격을 비추는 거울과 같았다.
휘둘러지는 검은 빠르고 정확했다.
다만 죽이지 않기 위해 검집째로 휘두른 검의 속도는 현저히 느렸다.
후웅!
머리 위로 검이 스쳐 지나간다.
“금남구역!”
그녀는 왜 자신이 검을 휘두르는지 간단히 설명했으나 검을 피한 나는 이미 창틀을 넘어가고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보석함을 통째로 가져와 버렸지만 문제없다.
“어딜 도망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여생도의 머리카락이 흉흉하게 넘실거린다.
“실리아! 1학년들 물건은 찾았어? 세나 지금 2층에서 1학년들 상대하고 있어!”
곧바로 뒤따라오려던 그녀는,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베티! 잠시만!”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은 치명적이었다.
그 틈을 타 나는 조경용 나무 사이로 숨어들어 자연스레 몸을 숨겼다.
* * *
여자 기숙사 2층 복도.
3층에 있는 세나의 방으로 향하던 샬롯과 다이니는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우연찮은 동행을 하게 된 두 사람.
폭죽처럼 시선을 끌고 있는 마리아 덕분에 쉽게 내부로 잠입할 수 있었으나, 운이 없었다.
3층 복도를 올라가던 와중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1층으로 내려가고 있던 세나를.
“깜찍한 귀요미들아. 여기 왜 있니?”
마리아를 상대할 생각이었는지 어깨에 검을 얹고 있는 세나.
샬롯은 당장에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다이니는 달랐다.
어차피 들킨 이상, 이대로 돌아가 봤자 지금까지보다 더한 보복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빠르게 판단을 마친 다이니는 선공의 이점이라도 가져가려 했다.
키는 작지만 민첩한 몸놀림으로 바로 뛰어 계단 난간을 밟고 세나에게 검을 올려친다.
힘의 차이를 속도와 무게로 이겨내려는 속셈이었으나….
콰드득!
“딱 보니까 1층에서 소란 피우는 사이 양동으로 내 방에 잠입하려고 했나 보네?”
신체 강화를 한 것도 아니었다.
단순히 양손으로 쥔 검으로 다이니의 일검을 버텨낸 세나의 입가에 하찮다는 미소가 그려진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뒤로 밀리면서 몸이 붕 떠버린 다이니. 세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계단에서 뛰어내렸다.
콰득!
“커억!”
역수로 쥔 세나의 검이 다이니의 가슴팍을 찌르듯 누르고 들어온다.
생도의 개인 검에는 프로텍터가 씌워져 있었기에 살을 파고들진 않았으나….
그와는 별개로 강렬한 통증이 다이니를 엄습해 왔다.
바닥을 구르며 헛구역질을 해대는 다이니. 괴로운 듯 가슴팍을 부여잡고는 신음을 흘리며 애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아…….”
그걸 본 샬롯은 손이 너무 떨려서 검을 제대로 쥐고 있기도 힘들었다.
대련에서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다이니를 무참히 쓰러트렸다.
아무리 다이니가 급하게 달려들어 빈틈이 많았다고 해도….
신입생 뷔페에서 이미 한번 느꼈던 2학년과의 격차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세나는 어깨에 검을 얹으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분홍아, 일단 무릎부터 꿇어야 하지 않을까?”
뱀 앞의 개구리.
딱 그 꼴이 되어버린 샬롯은 당장에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걸까?
아버지가 주신 가보를 가져간 쪽이 잘못한 것이지 않은가.
지키지 못했으니까?
약하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억울한 걸까?
이런 부조리에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걸까?
꾸욱.
– 거지같이 억울하고, 막 쫄아서 꺾일 것 같을 때. 딱 하나만 생각해.
문득, 훈련 메이트인 이안 아이넬이 오늘 저녁에 해준 말이 떠올랐다.
선배들 앞에서 잔뜩 겁먹어 있던 자신에게 심드렁하니 해주던 조언.
– 아, 내일 아침은 뭐 먹지?
그 말을 들었을 때도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태도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너무나 가벼웠기에 장난인 줄 알았다.
– 오늘은 결국 지나가는데, 내일은 무슨 맛있는 걸 먹을까?
“흐훗.”
저도 모르게 표정이 풀린 샬롯.
긴장되는 상황에서 하필이면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 확 모닝 스테이크 질러버려? 아니면 아이스크림 와플이나 조질까?
“짜증 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당시에는 진짜 짜증 났는데, 이런 상황에서 되새기니까 묘한 감정이 느껴진다.
– 내일 뭐 먹을지 고민하다 보면, 오늘 뭔 짓을 해도 결국 내일이 온다는 걸 깨달을 수 있어.
“웃어?”
– 안 뒤져, 쫄지 마.
그 말 한마디로 생각보다 어깨가 가벼워짐을 느낀다.
평생을 웅크리고 살아왔던 소녀는 일어나서야 자신의 크기를 실감한다.
세나가 검으로 샬롯의 어깨를 툭툭 밀쳤다. 밀려나던 샬롯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며 선언했다.
“내일 치킨 뒤졌다.”
캉!
호쾌한 일검이 위로 치고 나온다.
헐렁하게 쥐고 있던 세나의 검이 그대로 복도 천장에 부딪친다.
“어?!”
반응하지 못했다.
샬롯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뻐억!
정확하게 얼굴을 후려친 샬롯의 검.
신체를 강화한 세나가 급하게 손을 들어 막아냈으나.
어느새 반대편에서 같은 검이 날아들고 있었다.
뻐억!
“끄윽!”
– 생각보다 엄청 빠르게 흡수하네?
검이 닿는 순간 바로 반동을 이용해 몸을 빙글 돌려서 반대로 휘두른 것.
세나가 비명을 지르며 밀려나 복도 벽에 부딪친다.
– 하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지.
분홍머리가 거세게 휘날린다.
샬롯이 계속 치고나오려는 걸 끊기 위해 이빨을 아득 물며 손을 뻗은 세나.
잡으면 이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휙!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샬롯의 허리가 활처럼 뒤로 휜다.
달콤한 샴푸향만이 손아귀를 미끄러져 사라진다.
– 노력은 꾸준히 해왔으니까. 준비는 되어 있었던 거야.
젖혀진 허리 탓에 몸이 뒤로 넘어갈 뻔했으나, 허리에 단단하게 고정해둔 검이 지지대가 되어준다.
“이…!”
자신의 수준이 작은 움직임으로 적의 공격을 흘릴 수 있는 정도는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있었기 나온 기괴한 회피법.
“후웁!”
허리에서부터 시작된 근육의 수축이 마치 잘 깔린 수로처럼 어깨를 타고 팔꿈치를 넘어 팔목까지 닿는다.
고무와 같은 탄력으로 일어난 샬롯은 마나를 한 곳에 집중했다.
자신의 하얀 이마로.
빠아아악!
돌과 돌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부딪친 세나는 뒤로 밀려 벽에 한 번 더 머리를 부딪친 후 흰 자위를 보이며 쓰러졌다.
“허억! 허억!”
쓰러진 세나를 본 샬롯은 심장이 두근거려 터질 것만 같았다.
“아아! 아아아아!”
머리에 스파크가 튀듯이 파박파박 소리가 울려온다. 감정은 파도처럼 잔잔히 다가오지 않고, 폭포가 되어 쏟아진다.
끝내준다.
빌어먹게도 끝내주는 짜릿함과 통쾌함이 전신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겁나 아파아아아!”
괜히 2학년이 아니다.
그 와중에도 마나로 이마를 보호해서 샬롯에게도 피해가 있었다.
하지만 샬롯은 검을 놓고 양손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울면서 웃었다.
“내일 진짜 치킨 다 죽었어어어!”
* * *
“후우.”
2학년 여생도, 실리아 위드니스는 꾹 쥔 주먹에서 미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3층에서 뛰어내려 바로 투구를 쓴 괴한의 추격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속도가 빠른 것도 아니었어.’
오히려 신체강화부터 시작해서 속도는 이쪽이 우위였다.
하지만 상대는 조형용 나무 사이를 누비며 시야의 허점과 어둠을 이용해 도망쳤다.
단순 추격전만으로도 격의 차이가 느껴지는 경험과 응용력에 실리아는 솔직하게 감탄하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신입생 뷔페에 참여하지 않은 실리아.
악습이라 여기는 문화를 굳이 따르고 싶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지 않으려도 쓸 수밖에 없었다.
오늘 식당에서 세나 패거리가 하는 얘기를 들었으니까.
신입생 뷔페에서 1학년들의 물건을 뺏어 오고 그걸 돌려받고 싶으면 돈을 내라고 겁박하고 있던 것.
‘기사 생도로서 할 행동이 아니다.’
그건 저잣거리의 무뢰배들이나 하는 비열하면서도, 저급한 행동.
단순히 세나 패거리만의 문제로 끝날 게 아니라 1학년들이 2학년들을 보는 시선 자체가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
모범적인 선배가 되어주고 싶은 실리아였고, 자신이 그러했듯이 이번 1학년들 또한 자신들의 등을 보고 따라오길 바랐기에….
우연찮게도 벌어진 소란의 틈을 타서 세나의 방에 침입해 1학년들의 물건을 챙기고 내일 돌려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웬 괴한이 1학년들 귀중품을 가져간 것부터 시작해서….
“얘는 왜 여기 있는 거야.”
세나의 남자친구로 알려진 남생도가 여자 기숙사 옆에 기절한 채로 쓰러져 있었다.
이 시간에 여자 기숙사 근처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심되었기에 그를 일단 묶어둔 실리아는 입구로 향했는데….
“선배에! 좀 더 힘을 내란 말이야아!”
“이, 이익!”
입구에서 광인처럼 웃으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마리아 레이로즈.
그녀는 2학년 생도와의 1:1 대결에서 손쉽게 승리를 쟁취하고는 콧대를 높이고 웃어댔다.
“다음! 다음! 기념비적인 10번째 주인공은 누구십니까!”
이죽거리는 마리아.
1층에서 소란이 났다는 건 들었지만 설마 1학년이 혼자서 2학년들을 밀어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상위 경쟁을 하는 애들은 없네.’
나와 있는 건 2학년들 중에서도 썩 실력이 좋지 않은 아이들뿐이었다.
고작 1학년 한 명을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2학년들 중에서도 진짜 실력자들은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는 거겠지.
– 야! 너희도 밖에 쟤랑 같이 온 1학년이지!
– 크, 큰일 났어, 다이니! 어서 일어나!
– 뭐야? 여기 세나가 쓰러져 있어!
계단 위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괜히 할 일이 쌓인 느낌을 받은 실리아.
“모범적인 선배가 되어야지.”
앞에 있는 마리아 레이로즈부터 제압하고, 위에 소란을 정리하자 다짐한 실리아가 천천히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너무 늦었어. 가서 잘 시간이야, 후배님.”
* * *
소란이 있고 다음 날.
나는 당연하게도 어제 있었던 2학년 기숙사 습격 사건 때문에 생도들이 아침부터 시끌벅적할 줄 알았다.
그런데 1학년 교실은 한없이 조용했다.
단순히 말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제와 변함없이 생도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으나,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었다.
다른 화제들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시시콜콜 얘기하며 꺄르륵거리고 있는 걸 보면….
‘아예 모르나 보네.’
당장에라도 2학년들이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잠잠하다.
1학년 여생도 하나한테 굴욕을 당한 걸 숨기고 싶은 건가?
‘이쯤 되면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네.’
2학년 전부를 이기지는 못했을 거다.
교수가 와서 말렸거나 아니면 마리아가 졌을 가능성이 높다.
드르륵.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장미색 머리의 여생도.
녀석은 오늘도 당연하단 듯 옆자리에 앉아 쓰러지듯 책상에 늘어져 숨을 내쉰다.
“야, 너… 얼굴이….”
나도 모르게 마리아를 부를 정도로 얼굴에 남아 있는 꽤나 억센 상처들.
주변 생도들도 힐끔힐끔 마리아를 보고서는 이제야 저들끼리 무언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 씨.”
하지만 마리아는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허탈하게 웃으며 책상에 이마를 박고는 마이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으며 중얼거렸을 뿐.
“개발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