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179
179화
33장 남북조 상황(4)
“흐미. 힘들어라.”
“이렇게 하면 진짜 인삼이 자란당가?”
“몰라유. 태자님이 하시라니 하는 거예유.”
“게기(거기) 노가리 까리지(깔지) 말고 어여 손 움직이래(움직여).”
“야아.(예.)”
우두머리의 말에 공노비들은 서둘러 조제 중인 인삼 비료들을 뒤집기 시작했다.
인삼의 비료는 활엽수의 생엽이나 낙엽 등을 옥외에 퇴적하고 적당히 관수하는데 이때 월 2∼3회 뒤집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근디근디, 참으로 재밌혀. 내 살다 살디아 이렇게 같은 고려말인데도 다르게 말하는 사람들과 모인 건 첨이지라.”
“그야 글켓체. 전하께서 진압한 반란이 어디 한두 개이기래? 거기 댁은 뭐하다 왔다 했기래?”
“이가(이연년을 말함) 놈들에게 부역되었다가 잡혀 왔다 했지라. 아, 그래도 내는 사람 죽인 적 없고 강제로 중군에 끌려간 거지라. 그래서 정상 참작돼서 온 기니 살인자니 뭐니 심하게 차별하면 섭하지라.”
“길체. 글체! 아, 내(나)는 필현보. 가노였기래.”
왕식의 사전(私田)에는 왕식이 진압을 하면서 노비로 들인 자들도 다수 배치되어 일을 하였는데, 원체 각지에서 진압하였더니 과장 좀 보태서 고려 전 지역 출신이 모여든 듯했다. 그러던 도중 공노 청구는 주변을 둘러보곤 없는 이들을 발견하고 물었다.
“근데, 어째 되놈들이 안 보인다. 그 녀석들도 오면 제법 편해질 텐데”
“되놈들은 개간하러 갔지라.”
“논에 물 퍼주는 것도 고된데 그거 끝나고는 개간이라니 되놈들도 불쌍하군.”
전쟁에서 사로잡힌 노비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이 오기 전 고려인들이 고되어 힘들다고 말 많이 나온 염전이나 논에 물이 마르면 물 퍼나르기 등의 고된 일 투입되고 있었다.
드디어 추수철이 되어 논에 물을 줄 필요가 없어져 그들도 좀 간편한 일을 하는가 했는데 이제는 개간에 투입되었단 말인가?
청구는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동료 노비는 딱 잘라 말했다.
“불쌍하긴 무슨! 함부로 나라를 쳤는데 그만한 일은 해야지. 거기다 듣자 하니 그들은 나중에 개간한 노고만큼 나중에 사면할 때 삯으로 준다고 들었어! 그걸 생각하면 좀 더 고생해야지!”
그건 조금 부럽군.
청구는 속으로 그렇게 답하며 퍼놓은 물로 손을 씻었다.
인삼에 쓰이는 비료는 월의 2~3회씩 뒤집으면 되기에 더 이상 할 것이 없었다.
제대로 삭혀지고 있는지 보초 일을 맡은 자가 하는 것이고, 청구는 다른 일을 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염초니 뭐니 만든다고 분뇨 뿌리고, 흙 푸고, 굽는 것은 냄새가 고약해서 싫은데. 이것만은 그치들이 부럽군.”
청구는 어째서 그치들한테는 이 악취 나는 일들을 안 맡기는 것 같아 부럽다고 생각했다.
사실 외국 노비들이 맡지 못한 것은 왕식이 그들에게 인삼이나 염초생산지엔 일을 맡기는커녕 얼씬도 못 하게 당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도 우리의 백성이 되긴 하였으나 아직 쉽사리 공개하지 마라. 물론 본국인이라 할지라도 금구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선 아는 이가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물론 이 사실은 전쟁 노비들은 물론 고려 노비들도 몰랐다. 그러나 몰랐다고 해도 청구의 불만에 동의하는 이는 적었다. 되려 비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진심으로 그치들의 일을 하고 싶나? 논에 물이 떨어진다 싶으면 수차례를 먼 거리를 왔다 갔다 해야 해서 더위로 혼절하는 경우도 번번한데? 나는 차라리 악취가 나더라도 그 일을 계속하지. 그건 못 한다.”
“으음. 생각해 보니 그건 그래.”
청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땡볕에서 쉬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무거운 것을 지고 고생하는 것에 비한다면, 분뇨를 뿌리거나 긁거나 굽는 것은 틈틈이 한숨이라도 돌릴 수 있었다.
그렇다. 거기다 어쩌다가 염초를 많이 생산하기라도 한다면 그 날 밥도 푸짐해지니 적당히 편히 일하고 편히 밥 먹고 지낼 수 있는 일이다, 라고 청구는 생각했다.
‘그래도 처음에는 서경의 모든 초가지붕, 처마 밑 흙이나 마루 밑이나 아궁이의 오래된 먼지 흙과 재를 구한다고 고생했다지 않은가? 심지어 처음에는 태자 전하께서 직접 설명을 하고 가르쳤다 하셨으니… 나는 용문창 이후 올라와서 염초밭이 완성되어 그나마 서경 민가에 들어가 잿물과 흙을 굽는 고역은 피했으니 그것도 운이 좋았어. 그런데 이 염초를 만드는 흙도 참으로 요상해.
그저 오래된 흙을 구우면 되는가 하는데 분뇨를 뿌리거나 오래 재워두는 것을 보면 또 아닌 것 같고… 혹시 짜고 양분이 있는 비료를 오래 재워둔 흙이 관건인 건가?
그러면 바다의 갯벌이나 땅도 괜찮지 않을까? 해수는 짜고, 그 흙들에는 물새들의 똥이나 작은 벌레나 물고기, 게들이 죽어 양분이 있을 터이니 나름 비료로 뿌려져 있다고도 할 수 있을 터, 그렇다면 그것도 구우면 염초가 나올 것 같기도 한데….’
그날 청구는 우연히 떠오른 그 생각이 자꾸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혹시나? 설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르지만, 만약 성공이라도 한다면 이건 큰 공을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지금 자신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는 이들도 당장 전하의 설명을 듣고 행사하는 것에 불과하여 염초 생산에 대해 잘 아는 장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그러니, 자세한 것은 알아도 얼마나 알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자 이 발상이 마냥 틀렸다고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고 청구는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조, 좋아! 어디 해보자. 내 어리석은 도적 때문에 역적이 되어 죽을 뻔했다가 태자 전하의 자비로 살아남긴 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죄가 사해질 때까지 노비로 있을 이유는 없지!’
* * *
직속 부하들과 여진, 거란 노비들과 함께 사냥을 하다, 꿩고기를 반찬 삼아 냉면을 먹고 있는데 심도에서 소식이 올라왔다. 근데 썩 좋은 소식은 아니다.
“그런가. 회안공(淮安公) 백부(伯父 큰아버지)께서 돌아가셨나? 상을 치우도록 하라. 노비들과 병사들의 식사가 끝나는 대로 돌아갈 것이다.”
“하오나 끼니를 거르신다면 옥체에….”
“오늘 내 이미 많이 먹어서 그러는 거니 아무 말 말라.”
나는 젓가락을 놓고 반상을 치우라 했다. 일단 왕실 어른인데 졸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식사하고 계속 사냥할 수는 없는 노릇은 아닌가?
회안공 왕정(淮安公 王侹).
인종의 셋째 딸인 창락궁주(昌樂宮主)의 아들 영인후(寧仁侯) 왕진(王稹)과 인종의 셋째 아들인 명종의 딸 연희궁주(延禧宮主)의 아들로서, 이자겸과 묘청의 난으로 유명한 인종의 증손자에 해당한다.
때문에 촌수로 따지면 아버지인 고려왕의 형제로 나에게 있어선 백부뻘에 해당하는 왕실의 어르신이라 볼 수 있다.
‘한때 내 맘대로 인질로 보내려고 마음먹었는데….’
이런 말을 하면 너무하긴 하지만 회안공은 왕실 어른이긴 하더라도 왕위 계승에선 멀어 인질로 보내졌다 무슨 일이 생겨도 고려에 큰 타격이 없다.
그리고 1차 여몽 전쟁 당시에 몽골과 화친할 때 토산물을 전하러 직접 살리타이에게 갔다가 술자리에서 살리타이랑 친해졌다고도 하니, 인질로 가서도 나름 잘하지 않을까 하는 심산도 있었다.
그런 그를 인질로 보내지 못한 것은 2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내가 최우를 잡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는 것과, 최우를 잡고 나서 겨우 내부를 다듬고 있을 때, 북방 전쟁이 터져 구유크와 만나면서 족쇄를 차버렸기 때문이다.
지금은 몸을 바싹 낮춰야 할 때인데, 이때 제대로 된 인질 같지도 않은 인질을 보냈다간 되로 주고 말로 받는 상황이 돼버린다.
원 역사에서 고려가 했던 애자(愛子)와 친자(親子)사건을 사용하기엔, 지난 살리타이에게 갔을 때 사촌이라는 것을 밝혀져 무리고, 설령 사용한다 한들 금세 들키니 나중에 다시는 못쓰니 결국 그만두고 혹시라도 어떻게 활용 못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다니….
“전하. 사람이란 무릇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필연이며 순리입니다. 회안공 전하도 분명 전하께서 이리도 걱정하여 끼니를 거르는 것은 바라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휘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순진한 환관은 내가 정말로 백부가 졸한 것에 비통하여 식사를 금하고 있는 거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어느 미친 꼬맹이가 자기 큰아버지가 죽었는데 이용해 보지 못한 것 회상하겠는가.
고려로 떨어진 지 수년. 여몽 전쟁 대비라는 이름하에 생각하거나 계획을 구상하는 것들을 보면 나도 여러 의미로 원래에서 멀어졌긴 하구나.
* * *
강화도 조정.
“태자는 오늘날 북조를 상대하는 법으로는 그 옛날 신라와 백제와 같이 남조와 협력하여 남조를 부강하게 하고, 아조도 부강하게 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이에 대해 경들의 뜻은 어떠한가?”
“태자 전하의 말씀은 참으로 이치에는 맞사오나 현실로는 부합하지 아니하옵니다. 백제와 신라는 지경이 맞닿아 양군이 오고 가는 것이 수월하고 신속하였으나 남조와 아조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거기에 과거 남조와 아조는 그 어느 곳도 제대로 군을 보낸 적이 없사온데 어떻게 서로 돕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나이까?”
“마필을 공물로 내자는 계책도 좋은 것이 못 됩니다. 당장 이번 전쟁에서도 얻은 마필도 대부분은 몽고가 수거하였고 남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이번에 거둔 마필의 수만 보고 해마다 마필만으로 공물로 보냈다가 아조에서 사용할 군마들도 부족해져 본국의 군사력 약화로 이어질까 우려되옵니다. 하니 장구지계(長久之計)로 하기엔 부적합하옵니다.”
이때 호부상서 경번은 다른 의견을 늘어놓았다.
“그, 그러나 금, 은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합니다. 본국이 금, 은 패물들과 사치품을 공물로 (남조로) 보내긴 하나 금, 은은 본국에서 산출되지 않으니 금, 은을 공물로 보내다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나라가 부, 부끄러울 것입니다. 하지만 마, 말은 갈라전과 각장에서 얻을 수가 있고 우리 땅에서도 산출되는 것이니, 적은 말과 더불어 다른 공물을 보내는 것으로 끝낼 수 있다면, 국고는 보다 풍족해질 것입니다.”
고려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부상서의 말이 맞다. 태자도 마필을 바치는 일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마필을 보낸다는 것’에 초점을 주고, ‘본국의 기마(騎馬)에 영향이 갈 정도로 보내서는 않아야 한다’고 당부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남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을 얻어야 한다 하였는데, 짐이 듣기로 가축 중 나귀가 중원에서 많이들 이용되고, 남조의 미곡은 아조와 달리 잘 자란다 하니, 이런 가축과 미곡의 종자를 요청하여 본국에서 기르는 것이 어떠한가?”
조석이 대답했다.
“물소(水牛)도 그 뿔들이 군사(軍事)에 긴요하온데, 남조 황제께 이 또한 주청(奏請)하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만약 받아 길러 번식시키면 그 이익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신하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고, 전부 들은 고려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소의 뿔로 만든 궁이 궁 중 으뜸이라 하니 그 또한 맞는 말이로다. 지금 한 말들을 정리하여 예부에 전하도록 하라!”
“황명을 따르겠나이다.”
* * *
강화도 내 기루.
“크윽. 주상께선 오늘도 태자! 태자!! 태자!!! 여전히 태자 전하만을 언급하고 계시구려.”
“진정하십시오. 듣는 귀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어허. 어디 내가 못 할 말이라도 했소. 이 나라의 지존은 황상 폐하가 아니오? 그런데 아직 어리신 태자 전하만을 언급을 하며 태자가 이러했으니 이래라, 저래라. 어떠하느냐. 이러는데 도대체 누가 황상이고 누가 태자이며, 누가 아버지이고 누가 자식이란 말이오!”
“크흠. 그건 그렇지만….”
“자아. 자아. 진정하세요. 오늘 일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쁘지 않다니? 그대는 오늘 정전에서 황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못했는가? 뭔가 이야기만 하면 태자 전하만을 언급하시는 것을….”
“예. 그러나 태자 전하께선 실제 뭍에서 전국 각지는 물론 외지까지 나가 대사를 맡으시니 황상께서도 신경을 쓰시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 간간이 보여주시는 모습에선 태자 전하가 아닌 스스로 묻고 결정을 내리시지 않았습니까? 조금씩 좋은 변화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렇긴 하였지.”
“예. 그랬습니다. 그러니 저는 이것을 조짐으로 보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조짐이라 함은 무슨 조짐이라는 것인가?”
“그야 봉환(奉還)의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그리 말하는 젊은 신료의 입에선 미소가 귀에 걸렸다.
# 작가의 말
*회안공 왕정의 나이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고종 치세 초기에 졸한 것을 보아 고종보다 나이가 많다고 설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