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41
241화
2부 외전-후일담(2)
남송 황궁.
“폐하께서 전해주신 고려상(고려상인)이 받아 진상한 고려 왕태자의 사의서방책략(私擬西方策略) 책을 읽어 보았사옵니다. 널리 생각해 보건대, 우리 국조(國朝)는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유학을 높이고 도를 중시하여 이에 지금에 이르러 아름다우니, 삼대 이후로 이와 같이 성대함에 이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거란과 여진이 그리고 지금은 몽고가 강토를 침탈하고 압박하여 본조에 해악이 이 이상 크지가 않사옵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와 의를 모르니 일개 금수일 뿐입니다. 그리고 몽고는 그중에서 가장 크고 사나운 금수이오니 그 금수를 조련하고 유인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법을 실행하여야 하는 법이옵니다.
동쪽에서 집필한 책략 또한 그러한 금수를 대하는 책략이라 할 수 있으니 마땅히 받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왕검이 집필하여 바친 서방책략에 대해 남송황제는 두 승상에게 그것을 구독케 하였고, 사숭지는 서방책략에 대해 동의하였다. 곁에 있던 정충지 또한 서방책략에 대한 의견은 다르지 않아 그의 의견에는 동의하였다.
“사 승상의 말이 맞사옵니다. 상고하여 보면, 우리는 한나라 시절부터 이적들을 상대로 원교근공(遠交近攻)과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사용하였으며 그것에 크게 다른 점이 없었는데 이는 이적들에 대한 책략으로 이 이상 적합한 책략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형세와 지금의 책략을 보아도 가까운 북적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수료를 하였습니다. 또한 서방에 얼마나 많은 나라가 있다 한들, 그들은 전부가 서융(西戎 서쪽의 오랑캐)이니 이들을 이용해 북적의 전력을 소모시키자는 왕태자의 책략 또한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일환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왕태자의 책략과 식견이 어디까지 시행될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정말로 북적의 노추(虜酋)가 정말로 친정을 나간다면 이는 천하의 흥복이옵니다. 하옵고 지금 본조의 국력으로 북적을 치기에는 부족함이 많으니 치는 것은 성급한 것도 사실이오니 거절할 이유는 없사옵니다.”
두 승상 모두가 동의를 뜻하니 남송 황제 조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때 정청지는 뒷말을 덧붙였다.
“하오나 고려를 경계해야 할 것이옵니다. 고려가 지금 본조에게 입조하고, 이러한 책략을 올린 것은 이 책략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본조의 도움이 필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책략을 올린 것 자체가 고려는 적극적으로 북적과 싸울 의사는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고려의 관계를 소중히 하시되 고려가 본조를 어부지리(漁父之利)하는 것을 주의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왕검이 적어 보낸 서방책략의 요지는 지금의 몽골에게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송과 고려가 결맹(結盟)을 맺고, 위험할 때는 서로 도와야 하며, 그럼에도 몽골은 강성하니 무조건 힘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몽골의 관심을 서방에 돌려 힘을 소모 시키고, 그 틈을 타 자강을 도모하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정청지는 책략의 전제 조건에서 오는 허점과 고려가 적극적으로 나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그 조언에 조윤은 이상의 비방은 허락하지 않았으나 부정도 하지 않았다.
“정 승상의 말이 참으로 옳다. 저들이 본조를 따른다 하나 그 속에 어찌 자국보다 본조를 우선하겠는가. 그러나 애당초 외방(外邦)의 족속이라 애당초 족히 깊이 논할 필요도 못 되는 것이거늘 그대는 지금 그것을 일부러 들추어낸 것이다. 이것은 분란을 조정하는 행위이니 이후 그 속으론 깊숙이 명심하되 구태여 조정에서 입 밖으로 내뱉어 논할 필요는 없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사숭지와 정청지가 순순히 고개를 숙이자 조윤은 굳은 표정을 풀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어찌 되었든 경들도 저 북적의 심력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는 고려 태자의 책략에는 동의하는 바 같으니 짐도 더 논할 수 있을 것 같도다. 지금부터 짐이 말하는 것에 대해 경들은 각자 심사숙고하여 진솔한 의견을 내놓도록 하라.”
* * *
“그대 형의 일은 참으로 유감이로다.”
“소인의 형은 나라의 장수로서 힘껏 싸운 것입니다. 태자 전하께서도 그렇게 믿었기에 보내신 것이 아니옵니까?”
사무적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이 사내는 현재 대장군 자리에 있는 채화로 이번 전쟁에서 전사한 채송년의 동생이었다. 그의 대답은 장수로서는 문제없었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다소 찔리는 답변이었다. 그것을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지. 그리고 이 부채에 대해 그대에게 묻고자 한다. 본래 이 부채는 그대가 받을 자격이 없다. 왜냐하면 과인은 그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모른 채 그대의 답만으로 결정하려고 한다. 받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내가 채화에게 내건 부채는 다소 잔 흠집과 피가 묻어 있는 접부채였다.
그것은 내가 채송년을 고취시키기 위해 친필로 ‘변방지평재장’이라고 적고 선물로 준 접부채였다.
장성 이북 지역의 포로들이 송환되었을 때 채송년의 시체와 함께 이 부채도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채송년이 이 부채를 죽을 때까지 쥐고 있었다는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난신(亂臣)의 비호를 받았으나 그 최후는 그야말로 고려의 충신이 따로 없구나.’
비슷하게 나에게 직접 죽은 역적이었으나 살신성인과 희생의 충장으로 둔갑한 홍복원도 있었지만 경우가 다르다.
홍가 놈은 반드시 죽이자는 생각이였던데 비해 채송년은 내심 최우 덕분에 부친인 ‘채영’이 관작을 받은 사례와 최우와도 관계가 좋다는 것과 종종 연회나 임무에도 참가했다는 것에 당여라는 인식은 있었어도 꼭 죽인다는 생각은 없었다.
거기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개인 처신도 잘하였는지 주변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고, 악평도 적었다.
이 때문에 그가 선인인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최소한 효심이 깊은 것은 사실이라 죽어도 상관없지만 살아도 그만인 생각으로 변방에서 일을 맡긴 것이었는데, 정작 올라온 최후는 나를 착잡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죽게 만든 것에 원인을 만든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충성을 기리고자 채송년의 시호를 직접 짓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무산계 정2품)으로 추증하여 달라고 대왕께 진언하였다.
“…….”
채송년의 동생 채화는 내 물음에도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부채를 주시했다. 만약 받겠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그를 장성 밖으로 내보낼 것이다.
변방에서 목숨을 잃은 장수의 아우마저 변방으로 보내는 것은 너무 심한 것은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채송년의 명성은 장성이북 지역 신토(新土 새로운 영토. 여기서는 요동 원정 이후 얻은 땅들을 말함.)에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번 아라크부케의 난동으로 신토의 절반이 엉망이 되긴 하였지만 그래도 그가 전사한 것으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연고가 없는 새 장수를 보내는 것보다 친 아우를 보내는 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이란 내 판단이다.
다만 채화 본인이 변방 직을 거부한다면 구태여 억지로 보낼 생각은 없다.
채송년에게는 아들이 있고, 채화에게도 아들이 있어 종묘를 잇는 것은 문제가 없긴 하지만 채화의 자식은 6살인가 하고, 채송년의 아들은 이제 11살인가 한다고 들었다.
채화가 자식과 조카가 어려 노부인 아버지 채영을 모시기 힘들다고 한다면 그렇게 해줄 생각이다.
솔직히 변방이 편한 곳도 아니고 오히려 영웅으로서 죽은 형의 그림자에 압박감을 받아 힘겨울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채화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은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다.
“…이 부채는 형님의 것이옵니까?”
“…그렇다. 과인이 그대의 형. ‘충평공(忠平公 채송년의 시호)’이 변방에 갔을 때 준 선물이로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집어 살펴보아도 되겠나이까?”
“그리하도록 하라.”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채화는 떨리는 손으로 부채를 집고는 펼쳤다.
펼쳐진 부채에는 내가 직접 적은 ‘변방지평재장’이라는 글과 함께 드문드문 피와 땀 자국으로 보이는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본 채화는 울컥했는지 그것을 천천히 품에 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 시기 형제들이 보통 그러하듯 채송년과 채화도 나이 차이가 제법 되었는데 형제지간의 우애가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런 듯하다.
“…크흑. 흐으흑.”
“…….”
한참을 들썩이던 채화는 이내 눈물을 그치고는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태자 전하의 안전에 못 볼 꼴을 보였사옵니다.”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인재를 잃었다.”
나의 대답에 채화는 애수 어린 시선으로 부채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내가 물은 질문에 대답했다.
“소장은….”
* * *
고종 20년(1233년). 고려 왕태자 왕식(당시 이름)이 동하정벌에 참전하면서 얻은 갈라전도 2년에 접어들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고, 많은 세력이 변하고 있었다. 특히 두만강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하여 남쪽에 위치한 남갈라전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세력을 꼽으라면 부병마사 아부한 두문을 제외하면 단연 고려인 이안사라고 할 수 있었다.
3차 여몽 전쟁에서 동하잔당(+옷치긴 왕가군)을 상대로 가장 먼저 의병으로 일어나 맞서 싸운 이안사는 종전 후 공신에 오름과 동시에 정조호장이라는 직위를 받으며 근방 부족들 사이에서 주도권과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안사의 성장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그런 이안사에게 더 큰 행운이 왔으니 바로 용강상단의 보부상들이 갈라전에 진출한 것이다.
본래라면 이미 고려 조정과 고려에서 품목들을 수입하여 북쪽에 팔거나 주어 신뢰와 이윤을 얻고 있는 이안사의 입장에서 보부상은 자신을 통하지 않아도 고려의 물건들이 갈라전에 퍼지게 되니 떨떠름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실제 이안사의 수하들 중에는 그러한 이유로 보부상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거나 자신들 위로 가는 것은 막자는 의견을 하는 자도 나왔는데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이안사는 일언지하로 반대했다.
“저들은 용강상단의 상인들이다. 그 상단의 주인이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느냐?”
용강상단이 무엇이 아쉬워 이 척박한 땅에 사람을 보내겠는가.
갈라전에서 이윤을 얻는 것보다 다른 곳에서 더 큰 이윤을 뽑을 것을 구상하는 것이 용강상단의 창고에 더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한데 말이다.
그 말인즉슨 그 뒤에는 무엇인가가 있다고 이안사는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을 내린 이안사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어서 오시오. 우리 이안사 장군께서 먼 길 오느라 고생한 상인들을 위해 내리는 은전이오. 따뜻한 숭늉을 받고 푹 쉬다 가시오.”
“이안사… 장군?”
“허허허. 갑오년에 있던 외란에서 의병으로 활약한 우리 장군님을 모르다니 이 사람들. 갈라전에 오면서 아직 갈라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군. 이리와 앉아서 식사하면서 들어보시오. 우리 이안사 장군은 말이오. 고려 태생으로….”
지금의 용강상단은 금인 출신 정안연과 그 상단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음에도 만들어진 이후 많은 유입에 의해 금인보다 고려인이 더 많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고려인들에게 있어 갈라전은 직할지가 되긴 하였으나 여전히 외지에 더 가까웠는데 그런 갈라전에서 동국(同國) 출신인 이안사와 그 수하들의 속지에서도 보기 힘든 환대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의 말
*작중 채송년 형제의 우애가 각별하다는 식으로 묘사되었지만 채송년 형제의 우애에 대한 기록은 딱히 없습니다.
**채송년의 아들 채정은 생몰 연도가 불명이라 작중 11살이라는 것은 작중 창작 설정입니다.
작가는 이안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