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12
412화
22장 이안사의 고뇌
‘내가 미친놈이지. 미친놈이야.’
고려인 출신으로 유일하다시피 갈라전에서 이름을 떨친 신흥 호족 이안사는 연신 자책하며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에 이안사의 처. 이 씨가 걱정스레 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안사는 그런 처를 보더니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주에서도, 삼척에서도 오직 자신만을 보고 따라오는 아내에겐 정말 미안한 마음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번 일의 전말도, 그 뱀의 혀를 가진 중놈의 정체도 모른다. 근심을 줄까 봐 말하지 않았던 것인데 이제 숨기기엔 너무 큰일이 벌어진 것이다.
“내가 큰 실수를 하여 우리 모두가 위험에 처했네.”
“그러면 또 떠나야 하는 겁니까? 이번에는 어디로 말입니까?!”
좀처럼 높이지 않는 언성을 높이는 아내의 반문에 이안사는 여러 의미로 할 말이 없다. 태자께서 온다는 말에 이번에도 전투에 참전하여 눈도장이나 받으려 부랴부랴 참전하고 돌아오니, 갑자기 태자께서 그 보을이란 승려를 찾고 있다는 말이 귀에 들어온 것이다.
무릇 도둑이 제 발 저린 법이라고, 이안사는 그 소식을 듣자고는 눈앞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을이 역적이라는 것은 이안사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그가 최산(1부 동경의 난 주도자 중 하나)의 수급을 취할 수 있었던 것도 추적 중 우연히 마주한 보을의 밀고로 얻은 것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역적의 잔당인 보을을 숨겼으니 틀림없는 이안사 본인의 잘못인 것이다.
‘이건 모두 다 내 탓이다. 괜히 왕의 상이니,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을 듣고 헛된 생각을 품었으니 이런 꼴이 된 것이야.’
당시 이안사는 전주 현감과의 마찰 사태로 삼척으로 도주한 이래, 나라의 혼란스러운 조정과 관리들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보을이란 범상치 않은 승려가 자신을 보고 왕의 상을 운운하고 있으니,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고 하니, 내심 동하는 것이 있어 품에 들인 것인데, 이후 태자를 만나고 갈라전으로 이주하면서 심정이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 솔직히 처음에는 동하긴 했다. 지방은 소란스럽고, 조정은 난신적자들에게 휘둘리고, 전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급기야 관군은 부월을 빼앗기는 추태까지 일어났기에 고려가 망조에 들긴 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여 정말로 천운이 내게 와 새로운 왕조가 도래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어. 아니었단 말이다.’
갈라전에 처음 이주하였을 때도 변경으로 쫓기는 것에 불만이 있긴 하였으나 반대로 고려의 지원을 받아 북방에서 제 세력을 구축하고, 갈라전은 고려의 외지인 만큼 이곳의 여진들을 고려보다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포섭한다면 향후 고려의 처지에 따라 독립하여 나라를 세우자.
그것이 왕기가 있는 자신이 해야 할 운명이다, 라고 큰 야심과 포부를 가슴에 담고 있던 이안사였으나 그마저도 시간이 흐를수록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고려가 망하기는 무슨…. 고려가 건국된 이래 오늘같이 번성하던 시절이 얼마나 있었던가? 거기다 인근 여진인들이 모두가 나보다 태자께 충성하고 이제는 저 북왕가(옷치긴 왕가)마저 무너졌는데, 내가 무슨 고려에서 떨어져 나라를 만들어, 왕위에 오르란 말인가.’
그렇게 이안사가 갈라전에서 세력을 키울 때마다 더욱 몽골에 대한 태자의 웅거함과 여진인들에 대한 위상을 체감하며 얌전히 왕위에 대한 야욕을 접고 있는 상황인데도, 정작 보을은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연신 새 나라를 만들어야 하며 왕이 될 수 있다고 간하는 것이다.
당연히 현실의 어려움으로 야심을 버리고 있던 이안사에게 보을의 그런 간언은 이제 가슴이 두근거리기보다는 짜증과 실증만을 불러올 뿐이었다. 그래도 도움받은 것도 있어 조용히 처리하려던 찰나 결국 태자의 귀에 들어갔으니 제때 처리하지 않은 것에 대한 뒤늦은 후회로 한숨만 팍팍 나왔다.
역적을 보호한 것만 하여도 큰 처벌을 피할 수 없는데, 왕위를 탐하고 있었다는 것마저 밝혀진다면 사율로 처리되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도 이안사는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야반도주를 한들, 이곳 갈라전에서 어디로 도망간단 말인가?
“이번에는 무슨 일이옵니까?”
“…이전에 본 보을이라는 승려를 알 것이네.”
“네. 다소 독특하신 기인이시지요. 그분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그 승려가 알고 보니 역모에 연루된 자였네.”
“예?! 뭐라구요?”
“역모에 연루된 이를 내가 절까지 만들어 보호해 주었으니,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내가 미쳤네. 미쳤어.”
“여, 역모라니….”
이안사의 말에 그의 처도 단번에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고, 그런 처의 모습에 이안사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정말 미안하네.”
“…이번엔 어디로 가면 되는 겁니까? 몽고로 가시렵니까? 아니면 전에 말씀하신 동토(凍土)뿐이라는 수분하 너머로 가시렵니까?”
이안사는 과거 전주의 관기 사태로 삼척으로 이주하였을 때처럼, 삼척에서 북청으로 이주했을 때처럼 이번에도 질책하면서도 함께하겠으니 어서 가자는 조강지처의 태도에 찡한 감동을 먹으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홑몸도 아닌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거기다 수분하 너머라도 안전하지 않고, 몽고라면 그곳까지 가기 전에 잡힐 것이 뻔한데.”
이안사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일은 과거 전주의 관기와 현감 문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태라는 것과 지금 보을을 찾고 있는 자가 전하인 이상, 마음먹고 자신을 추포하라는 명을 내린다면 자신들은 고려는 물론, 요동과 갈라전 어디에도 자신이 살아 있을 곳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어제까지 자신과 호형호제하던 여진인들도 태자가 지시를 내린다면 즉시 사냥개로서 자신을 잡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추격할 것이다.
갈라전에 온 이후로 여진인들과 많이 친해지면서 그들의 추적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이안사는 차라리 고려 내부로 도망가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목숨을 보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입니까?”
아내는 지금까지 이룬 공적으로 용서를 빌어보거나, 신하로 들어가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래도 도주하자고 말은 했지만, 이안사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이룬 공적? 갈라전에서의 입지? 자신이 여기에 오게 된 것은 저들 내부에서 고려의 영향력을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늘날 갈라전에는 태자의 지시를 거스르는 자는 없다.
즉, 자신의 가치는 이미 많이 떨어진 상태였고, 자신이 저지른 것은 역적을 숨기고 왕위에 올라갈 꿈도 꿔서는 안 되는 야심을 갖춘 것이다.
부하로 들어간다는 발상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스스로에 대해 모자란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명군 밑에는 명신이 있는 법.
그리고 태자에겐 이미 인재가 여럿 있다. 그들이 자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것은 광오한 것이며, 역모의 심증을 가진 자를 신하로 받아주리라 생각하는 것은 광오함을 넘어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이들이 할 법한 것이다.
“우선 도주에 대해선 포기하게. 저 멀리 떨어진 몽고 놈들의 움직임도 파악하여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안경공 전하로 하여금 전투가 벌어질 전장을 예견하시고 지시 내린 분인데 어찌 피하겠는가?”
“그러면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추포되어 형장에 끌려갈 생각이십니까?”
“아니네. 나는 이대로 전하를 뵙고 용서를 빌 생각이네. 전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친족만은 유지하고자….”
“안 됩니다. 차라리 도망갑시다.”
“어허.”
이 씨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만삭이 다 되어가는 몸으로 도망가자고 간청하였고, 이안사는 그런 아내를 진정시키고 태자를 뵈러 가고자 고집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흘러 겨우 진정시킨 후 태자 전하를 뵈러 연길성으로 가려는 찰나 이안사의 자택에 상인이 찾아왔다.
이안사는 그 상인의 얼굴이 다소 익숙한 것으로 용강상단의 상인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장군님 계십니까?”
“무슨 일로 나를 찾느냐?”
“연길성에 계신 왕 대인께서 장군을 찾고 계십니다. 서둘러 올라가시지요.”
“왕 대인이라…. 알았다. 아니, 그래도 뵙고자 출발할 생각이었다.”
“아이고. 안 됩니다. 돌아오신 지 얼마나 됐다고 또다시 집을 나가시려는 겁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을 보내시지요.”
연길성에 계신 왕 대인이라 하면 이미 고려로 떠난 왕 재상이 아닌 이상에야 한 분뿐이니 이안사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아내도 왕 대인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간파하고는 더욱 울상이 되어 이안사를 막았지만 이미 부름이 왔는데 안 갈 수는 없었다.
이미 각오를 마친 이상 불려가는 것은 문제없었지만 이안사에게도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자진 고변을 하려 했는데 결국 전하께서 먼저 부르게 되었으니 처벌을 조금이라도 감면받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쉬워하던 도중 이안사는 문득 의아함을 느껴야 했다.
“진정 홑몸도 아닌 처를 두고 가시려는 겁니까?”
“진정하게. 임자. 내가 돌아올 때까지만 기다리세.”
아예 곡(哭)을 하듯 우는 아내를 진정시키고 나서야 겨우 떠날 수 있었다. 이안사는 연길성으로 가던 내내 어째서 태자께서 태자의 이름이 아닌 왕 대인이라는 신분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 의문이 떠올랐다.
‘이상하군? 태자 전하의 권세라면 역모에 관련된 자를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처리할 재량은 가지고 계시거늘 어찌 나를 이렇게 우회하여 부르는 것이지?’
“어서 가세.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네.”
연길성에 도착한 이안사는 무려 완안자연 병마사에게 직접 안내받는 경험을 하며 왕 대인이 계신다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방 안은 불도 다 꺼지고 암막까지 처져 있어 무척이나 어두컴컴하였다. 그런 방으로 조심조심 들어가자 그곳 중앙에 희미한 불씨 하나만을 켜 놓은 탁자에서 차를 마시고 계시는 흑의를 입으신 사람이 있었다.
“왔느냐?”
익숙하고도 두려운 목소리에 이안사는 왕 대인의 정체가 짐작하던 태자라는 것을 깨닫고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
“소인을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허, 다짜고짜 죽여달라?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정말 모르겠다는 듯 묻는 내용과 달리 태자의 말투는 이미 이안사가 이렇게 나올 것을 짐작했음이 다분하였다. 이안사는 발뺌을 해봤자 의미가 없음을 알고 그대로 솔직하게 보을을 만나고 지금까지의 일들을 모조리 자백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소인은 본래 죄를 지어 도주한 죄인으로, 운이 좋아 전하께 은혜를 받아 분에 넘치는 부와 명예를 얻은 자이옵니다. 그런데도 금수만도 못하게 은혜를 배반하는 짓을 저질렀거늘 어찌 살기를 바라겠나이까. 부디 이런 배은망덕한 이를 벌하여 조정과 황실의 기강을 바로잡아주시옵소서.”
이안사의 긴 자백이 다 끝나자 태자는 조용히 물었다.
“하여 너의 목숨만을 거두고, 일가붙이의 목숨만은 구명(救命)하여 달라?”
역적으로서 벌을 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부디 일가의 목숨만이라도 살려달라는 청이 얼마나 억지인지는 이안사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겐 이것 말고는 가족들을 살릴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지옥에서 부처님이 내린 실을 잡는 도둑놈인 양 잔뜩 긴장한 채 자비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이안사의 귀로 태자의 말이 들려왔다.
“…그렇게 왕이 되고 싶었더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안사의 전신에서 흐르는 식은땀이 등을 적시고 뺨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셨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자의 용안을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