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491
491화
10장 삼종혈맥(三宗血脈)
최종준의 설명에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도다. 어떠한 이유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냐?”
“신 직문하(直門下 종 3품) 조수(趙脩) 아뢰옵니다. 신이 보기에 조세가 정체된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의 재해와 전란으로 군현의 사람이 도망쳤거나 죽은 것도 있으나 가장 큰 문제는 근래 들어 전국에 향학(鄕學)을 다수 설치하며 향학에 내리신 학전(學田)으로 인해, 본래 황도로 올라올 지방의 조세가 지방에서 소비되는 것으로 보이옵니다.”
향학. 즉, 향교(鄕校)를 운영하기 위한 재정은 기본적으로 국가의 지원이 요구되었으며, 교사, 시설물, 교생들의 숙식비, 학업 활동비 등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었다.
조선 시대도 그렇지만 고려 시대에도 향교의 운영은 건물에서 일하며 교도들과 학도들을 도울 노비를 공급하고, 재정은 나라에서 학전(學田)이라는 이름으로 전답(田畓)을 내려 그곳에서 나는 비용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래 들어 사학의 중흥을 막기 위해 각 지방에 국가의 관리를 받는 향교가 늘어난 만큼 그만큼의 전답도 내려졌는데 이 중에는 해당 근저 호족에게서 얻은 땅을 대여해주는 식으로 내린 것도 있었다.
그러니 향교에서 빠지다 보니 조세의 양이 줄어들었다는 것도 얼추 납득이 가는 주장이었고, 하여 이에 대해선 따로 막을 이유도 없었다고 봤다. 사학을 막기 위해 둔 것이고 그걸 조세로 받아봤자 운영을 위해 내려야 하는 것이니 결국 빠질 비용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방에 향학을 설치한 것이 태자인 것을 아는 제신들이다 보니 주변에서는 그의 설명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 문제를 넘어가려고 했는데, 최종준만이 이의를 제기했다.
“폐하. 혹시 모르니 이에 대해 제대로 조사해 보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조사하라고?”
“그렇사옵니다. 향학은 대부분 대도시에서 설치되고 아닌 곳도 왕실의 토지나 빈 전답들 위주로 내리고 그것으로 운영이 가능한 수준 내로 설치한 곳이 대부분입니다. 더러 토호들의 전답을 대여하는 방식으로 내리긴 했으나 그 경우는 적지 않은데, 이렇게 단시에 빠지니 비상한 일입니다.
부디 각 지역의 향교가 설치된 곳에서 설치되며 줄어든 조세와, 향교가 설치되기 전 들어온 조세를 제대로 조사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설령 조수의 말이 사실이라도 전국에 향학이 이렇게나 설치된 것은 성종 제왕 이래 처음이니 조정에서 모르는 문제가 일어나도 어찌 이상할 것이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만일 누가 향학이 설치된 것을 핑계로 조세를 착복한 것이나 문제를 은폐한 것이라면 속히 징계하거나 수습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후 비록 군기(軍期)처럼 중대한 일이라 하더라도 끝내 각 군현에 호령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른바 조수의 말이 그럴듯하고, 사실일지는 몰라도 아닐 경우 초장에 바로잡아야 하니 확인하자는 말이었다.
“…문하시중의 말이 옳다. 해당 부에서는 이 일을 속히 조사하고, 현지의 일을 알기 위해 안무사를 보내도록 하겠다. 적임자는 있는가?”
“판합문사 삼사사(判閤門事 三司使 둘 다 정 3품 관직) 손변이 어떻겠사옵니까?”
“판합문사 삼사사 손변?”
“예. 그는 성품이 곧고, 행정에 밝아 일을 잘 처리하길 과거 여러 해 동안 처리하지 못한 송사를 슬기롭고 공정하게 처리한 인재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삼사사만 한 적임은 없다고 사료되옵니다.”
“하나 이 일은 한 명으로 하기엔 시간이 걸리고 장소도 많으니, 그와 더불어 직문하 조수도 각자 양광도와 교주도 안무사로 보내도록 하겠다.”
“윤당(允當)하신 본부시옵니다. 폐하.”
“하면 이것으로 퇴… 아, 마지막으로 짐이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
그대로 정무가 끝나고 퇴청한다고 생각하던 찰나, 왕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제신들을 불렀다.
“근래 보건대, 짐이 황도로 환궁한 지 벌써 해를 넘겼고, 나라가 중흥했다고 자부하게 된 것도 어언 수년이로다.
아! 의종 대왕 시절 경인년의 참변(庚寅年 이 경우 무신정변을 말함)으로 나라가 휘청이고, 하늘이 뒤바뀌는 참담한 일이 있었음에도 숙종, 인종 대왕의 자손들이 무사히 종사를 잇는 실정이니 이는 실로 하늘의 뜻이다. 더욱이 난신적자들이 여러 번 하늘을 뒤엎는 만행을 벌였으나, 결국 오늘날 명종 대왕의 자손인 태자의 손에 난신들이 도륙되고 조정과 황실의 기강이 바로잡히며 난세가 끝이 났으니 이는 실로 사필귀정(事必歸正)이로다. 더욱이 태자가 ‘삼종의 혈맥(三宗血脈)’이 끊어지려는 것을 막아냈으니 이 또한 천운(天運 하늘이 내린 운수), 천의(天意 하늘의 뜻)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로다!”
왕의 말이 끝나자 방금 전까지 퇴청하려던 분위기였던 정전이 무섭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무신정변을 당한 의종 대왕은 당연한 이야기였고 무신들에게 폐위되어 즉위한 명종 대왕은 인종의 3남이었으며, 명종 다음 즉위한 신종 대왕도 인종 대왕의 5남이었으며, 신종 대왕의 자식으로 즉위한 희종 대왕은 인종 대왕의 손자에 해당했다.
희종 대왕이 최충헌을 숙청하려다 실패하여 폐위되고 즉위한 강종 대왕도 명종 대왕의 장남이었으니 똑같이 인종 대왕의 손주였다. 그리고 강종 대왕께서 붕어하신 후 즉위한 당대 임금인 고려왕은 인종 대왕의 증손주였으니 무신정권 시기 모든 임금은 모두 숙종, 인종 대왕의 자손들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은 구태여 삼종혈맥(三宗血脈)이라고 말하고 천운(天運), 천의(天意)가 그곳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 삼종혈맥에 대해 만일 숙종까지 포함한다면 몰라도, 숙종, 인종 대왕까지도 제외하고 말한 것이라면 이는 명종-강종-당대 임금(원 역사 고종)을 두고 삼종의 혈맥이라고 말한 격이 된다.
더욱이 후자로 해석할 경우, 무신정변 이후라는 전제를 추가로 두고 해석하면 무신정변에 폐위된 의종은 피해자로서 예외가 될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신종, 희종은 정통임금이 아니거나 정당성이나 정통성이 삼종의 혈맥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즉, 어떻게 해석해도 명종 대왕 후손인 자신들이 정통성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보일 요지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아! 공자께서 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로 이루어야 한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무겁지 않으면 권위가 없다.’ 하였는데, 오늘날 오직 태자만이 이를 실천하였도다.
위로는 이미 선조(先祖)께 고하고 아래로는 중외(中外)에 유시하였으니, 의리(義理)가 세워지고 명위(名位)가 정하여졌도다.
아! 이극(貳極 황태자)이 바르게 하고, 동궁(東宮)이 거듭 새롭게 했으니 본국, 만년(萬年)의 국운(國運)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이에 교시하노니, 마땅히 모두 다 알게 하라.”
왕은 그 말을 끝으로 퇴청하고 신하들도 퇴청하는데, 왕이 말하고 간 내용에 수군거렸다.
“어허. 폐하께서 갑자기 저런 하교를 하시다니 당혹스럽구려.”
“갑자기 저런 하교를 하신 것은 당혹스러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소.”
“그렇소. 일찍이 명종 대왕께서도 난신적자 정중부를 토벌한 경대승이 선왕의 복수를 운운하자 껄끄러워하셨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았소? 주상께서는 전하께서 난신적자들을 도륙 낸 공으로 명종대왕의 혈맥을 추존(推尊)시키시려는 것이 아니겠소?”
“덩달아 태자 전하께서 제위를 물려받는다고 재차 확언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에 대해 수군거릴 뿐 반대하려는 이는 없었다.
만일 조선 시대, 그것도 후기였다면 이에 대한 적잖은 반발이 나왔을 것이나 조선 시대에 비하면 종법의 전통이 약하고, 당대 실권을 강하게 부리는 태자가 후일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내용에 섣불리 반박하다가는 태자의 후계에 반박하는 모양새도 나와 더욱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태자가 보위에 오르는 것은 공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맞고, 왕이 저러는 것도 딱히 해가 되지 않는데, 굳이 입을 열어 반대하거나 이견을 내는 것은 입만 아프고 잘못될 경우 위험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저 왕이 태자의 위세를 빌려 ‘무신들에 의해 즉위하여 미약할 수도 있는 명종 가계의 정통성을 강화했구나’ 정도로만 생각하며 넘어갔는데, 최종준만은 유일하게 왕이 무엇을 노리고자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해했다.
‘폐하께서 삼종의 혈맥을 언급한 것은 당대의 위상만이 아니라 후대까지도 명종 황제님의 왕계(王系)만을 계승의 우선으로 만들려고 하심이야. 그리된다면 후일 다시 무신정변과 같은 난이 일어나 지존이 바뀌는 일이 일어나도 태조 황제님의 후손, 용손(龍孫) 중에서도 명종 황제의 혈족이 우선될 공산이 커지는 게야!’
물론, 최종준은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 그저 속으로만 끌끌 웃으며 퇴청하니 많은 신료들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채로 삼종혈맥에 대해 수다를 떨 듯 담화를 나누며 자리로 퇴청할 뿐이었다.
오직 직문하 조수만이 다른 주제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손변인가.”
부임 받은 지역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다름 아닌 그와 동시에 안무사가 되어 같은 일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참으로 아이러니한 인연이라고 생각하며 조수는 마지막에 퇴청하였다.
* * *
바그다드.
아버지가 이룩한 중흥기를 그대로 유지한 명군. 제36대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1세가 1242년 말에 죽고 난 후, 그의 자리는 무사히 그의 아들 알 무스타심이 이어받았다. 알 무스타심은 선대 칼리파인 아버지가 맺었던 몽골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칼리파.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보고를 하는 장수의 뒤로는 짐을 짊어진 수많은 낙타와 말, 그리고 수레가 늘어져 있었다. 그 짐들은 모두 동유럽과 아나톨리아에 있는 몽골군에게 갈 식량들이었다. 동유럽과 아나톨리아를 정복하였지만 몽골은 여전히 아비스 왕조를 통해 식량을 공급받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양이 많군. 이 정도면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이번에도 저번과 같다. 몽골 놈들에게 제대로 값을 받아내는 것이 좋기는 하나, 저들의 불만이 가지 않는 선에서 받고, 불만을 가지려고 한다면 손해를 보지 않는 선에서 싸게 팔아도 좋다.”
식량을 공급해 주고는 있으나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파는 것이었기에 아비스 왕조 또한 이익은 있었다. 단지, 저 측에서 요구한 양을 반드시 맞춰야 했고, 공급을 해주는데도 오만한 태도가 당초 알 무스타심으로 하여금 몽골에 큰 반감을 안겨다 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몽골과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식량 장사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는데, 이러한 심적 변화의 원인은 부친 생전에 명을 받고 몽골에 식량을 전해주러 간 경험 때문이었다.
동유럽에 갔다가 몽골 제국이 만든 참상과 무력과 병력은 알 무스타심이 생각한 야만적인 몽골의 무력을 훨씬 뛰어넘었다. 나아가 수년 후 몽골 제국이 동유럽의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아나톨리아 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했다는 소식에는 적잖은 충격과 경계를 하게 만든 것이다.
만약 가서 보지 않았다면 아나톨리아의 장악 건도 그저 운이 좋았다거나 그곳의 나라들이 허약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으나 ‘오고타이칸이 있던 대군’을 목격한 알 무스타심으로서는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덕분에 원 역사와 달리 섣불리 싸워서는 자신들이 동유럽의 국가들처럼 멸망 당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린 알 무스타심은 극동의 어느 왕태자가 한 것처럼 와신상담(臥薪嘗膽)을 선택한 것이다.
‘몽골 놈들. 내가 이대로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알 무스타심 속에 몽골에 대한 반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의 힘과 잔혹함을 목격한 알 무스타심은 더욱 몽골에 대해 경계하며 언젠가 토벌하여 이슬람의 세계에서 격퇴해야 하는 적이라고 확신하였다.
그저 지금은 저들의 힘과 기세가 강하고, 반대로 자신들은 아직 그때 본 몽골군을 제대로 격퇴할 정도로 힘이 없으니 때를 기다리며 저들을 토벌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을 우선이라고 생각하며 재화를 모을 따름이었다.
#작가의 말
*작중 언급된 손변은 고려사에 열전을 남긴 유명한 판관입니다.
**작중 나온 조수는 실존 인물로, 손변과 같은 해 과거에 급제했는데, 병과(丙科) 1위는 손변이고 조수는 병과(丙科) 3위로 급제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