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515
515화
22장 사냥(1)
경대승이 정중부 세력을 무너뜨린 일화는 가히 전설 같은 일로, 당대 고려에서도 무척이나 인상 깊은 일화다. 고작 수십 명으로 이미 도성 전부를 장악한 정중부 정권에 도전하여 단, 하루 만에 정 씨 일가를 붕괴시켰으니 말이다.
약자가 압도적인 강자를 쓰러트린 ‘자이언트 킬링(Giant-killing)’과 같은 그 일화는, 그야말로 반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사례로서 인용, 각인되었다.
계사년 마지막 날 내가 일으킨 ‘계사지주(癸巳之誅)’를 두고도, 경대승의 일화와 비교하는 말도 종종 나오니, 그의 업적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많은(힘은 엄청 약하면서도 야망만큼은 웅대한) 야심가들로 하여금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자신을 알게 해주는 폐단을 남겨주기도 했다.
어찌 보면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통칭 알렉산더 대왕이 부하들을 디아도코이로 만들어 버린 대왕병 발원한 것에 비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알렉산더 대왕의 사후, 그가 이룩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3대륙을 걸치는 마케도니아 제국 영토를 정복한 디아도코이가 있었는가? 그리고 경대승의 일화가 괜히 전설과 같다고 평가하겠는가?
쉽사리 재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전설이고 입에 오르내린 것이다. 실제 경대승 사후 경대승처럼 수십 명으로 작게 잡아도 수백 많게는 수만을 이룬 세력을 허를 찔러 잡은 사례는 없다.
그나마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가 이의민 일가를 몰아냈으나 이것도 경대승의 무모하다시피 한 시도에 비하면 무척이나 준비를 갖추고 전력도 준비한 후 거행된 거사다.
내가 벌인 계사지주도 전체적으로 보면 도박일지는 몰라도, 그 도박하는 심정 내에서 엄청난 준비와 의외성을 노린 시도였다.
애당초 경대승조차 친한 이를 정중부 세력에 미리 넣어 준비를 했는데, 그런 준비도 없이 그냥 ‘경대승은 수십 명으로 정권을 휘어잡았으니 나도 그렇게 해보겠다’라며 시도한다면, 장담컨대 승부라는 판에 오르기도 전에 그 야심가는 잡힌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참고로 지금 남경에 소환되었던 호장이나 호정들은 딱히 감옥에 갇힌 것은 아니더라도 남경 밖, 특히 자기가 살던 지역과 아무런 소통 하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쉽게 말해 사실상 감금된 상태다.
그러나 이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일들이 비공식적이고 이 자리에서 결판내야 하는 일이다 보니,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전령조차 보내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저들 또한 자신들이 반란 일으킬 생각도 없고, 의심받기도 싫고, 무엇보다 저들 나름 이 제안의 중요성을 이해했기에 비밀 유지를 위한 필요성에 동의했고 잘 따르는 중이다. 반대로 몰래 보냈다가 돌아올 뒷감당이 더 두려울 것이다.
사실 소식을 알릴 수 없다는 것만 제외하면 현재 남경에 소환된 전라도의 호장들과 호정들의 취급은 나쁘지 않다.
우선 사실상 감금이라고 해도 문자 그대로 남경의 건물에서 쭉 나오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개한 강무에서 관람할 때 대동하며 밖에도 나오고 있는데, 호장들은 몰라도 호정들은 병정과 창정보다도 서열이 낮은 입장에서 대왕과 왕태자가 있는 곳에 동석했으니 어찌 보면 횡재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돌아가서 평생 자랑할 안줏거리는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이 벌어졌다.
전라도의 호족들의 자제들 수십이 강무 장소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기를 갖춘 채 사냥을 하기 위해 내가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가 강무 주변을 순시하던 태자 견룡군에게 발각되어 잡힌 것이다.
일단 저들이 말로는 지인들끼리 모여 사냥을 하다가 왕과 태자 전하 두 분을 멀리서나마 뵙고 싶어 왔다는데….
고려 시대에 딱히 총도법(銃刀法) 같은 것이 없었고, 호족들은 사실상 사병들도 가지고 있었던 만큼 호족 자제들이 모여 사냥을 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이 무장을 한 채 향한 곳이 왕과 태자인 내가 있는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버지와 내가 있는 곳으로 향하다가 잡혔다. 저들 말로는 사냥하다가 왔다지만, 구태여 이 시기에 타지의 향리 자제들까지 모아 왕과 태자가 있는 곳에 무장을 한 채 찾아왔다라….
‘진짜 수상하군.’
당연한 말이지만 이건 어떻게 취급하냐에 따라선, 역모죄로 판정 내릴 수 있는 안건이다.
실제 따로따로 은근 낚시성 질문으로 찔러보니 태자를 흠모하여 만나보고 싶다거나, 지역의 어르신들이 소환되었는데 오지 않아서 자식인 자신이 찾아왔다느니, 길을 잃어서 여기까지 왔다느니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은 철저한 계획하에 온 것이 아니라 이번 호장, 호정들의 소환과 전답 반납사건 등에 반응하여 이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 이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들을 두고 경대승을 거론했는가 하면….
‘경대승의 일화를 꿈꾸는 얼뜨기 놈이 있군.’
저들을 발견한 것은 순시를 하고 있던 김방경이었다. 태자인 내가 직접 작성하고 주도하는 계획 속에서 측근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 만큼, 상장군이라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직접 순시를 뛰는 것을 두고 취급이 박하다고 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김방경 본인도 나의 믿음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박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김방경은 내 믿음을 그대로 보답했다.
김방경은 이들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무장을 해제시키고 이동하면서도 알아보려 했는데, 이때 눈빛이 범상치 않은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김방경은 그자를 눈여겨보고 병사에게 그를 수색하고 돌아올 때 실수로 근처에 단도를 떨어뜨리고 오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사내가 돌아가면 먼저 단도가 그 장소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라고도 지시를 내렸는데, 병사가 확인하니 떨어뜨린 단도는 없었고 그 사내는 단도를 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물론 강제로 무장해제 된 것에 대한 불안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말하나. 이건 어떻게 취급하냐에 따라선, 왕족을 시해하는 대역무도한 죄로 취급할 수 있는 안건이다.
그리고 동시에 아직도 번민하는 향리들을 단번에 설복시킬 ‘패’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그 사내가 진짜 이후 뒷감당 문제보다는 당장의 울화를 해소하기 위해 칼을 든 미친놈일 수도 있어 감시를 붙이기로 하고, 그 외에 사내들에게 몇 가지 확인을 위해 내가 그들에게 갔다.
아버지와 대면하는 일은 안 되고, 내가 대신 가기로 했다.
* * *
대충 짐작이 간다. 급조하여 만들어진 조직. 아니, 조직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저들 말에 의하면 저들 본인은 이번에 몰려온 것은 충신이 왕에게 상소(上疏)를 올리기 위해 간다는 생각으로, 백성이 왕에게 격쟁하는 것 같은 행동을 취한 것이다.
단지, 반란군이나 도적으로 오해받아도 모를 장비를 한 채로 말이다. 쉽게 말해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소집한 것은 김방경이 의심한 사내였다.
‘분조장? 이름 하나 뒷생각 없이 사고 한번 거하게 칠 것 같은 이름이네.’
내가 보기에 여기 있는 이 물정 모르는 자제들의 속내는 출세하거나 명예를 떨치는 것이 소망이긴 하지만, 그러한 능력도 비전도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분조장이라는 자에 의해 왕이 자신들의 아버지나 지역 어르신이 소환한 일과 이번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하소연을 하자니까. 거기에 냉큼 동의하고 몰려온 것으로 보인다.
즉, 체계적으로 뜻을 합쳐 온 것이 아니라 주먹구구식으로 어설프게 모아 술 힘으로 끌고 온 자들, 쉽게 말해 이용당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 분조장이라는 녀석이 진짜 이름대로 분노 조절 실패로 아버지나 나는 당연하고, 태자 견룡군들 상대로 무력이나 위협이라도 했다면 이들은 영락없이 굴비 두름처럼 역적으로 판정되어 죽었을 것이다.
‘만약 진짜 창칼로 협박하려고 한 거라면 진짜 구제할 길 없는 멍청이긴 한데, 실제 그랬을지는 나도 모르고, 이걸 어쩐다?’
여기서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지는 지금 내 의향에 달린 것이다. 입꼬리가 실실 올라가는 것을 참으며 온건하게 끝내기로 했다.
“갑수야.”
“예. 전하.”
“호장과 호정을 은밀히 부르도록 하라.”
* * *
“이, 이 멍청한 놈!!!”
보름도 안 되는 짧은 이별이었으나 만나는 부자간의 상봉은 주변의 눈시울을 젖게 하는 감동스러운 광경으로 벌어졌다. 사랑이 듬뿍 담긴 아버지들의 주먹과 욕이 사정없이 자식들에게 향한 것이다.
그것은 21세기 한국에선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는 물리적인 사랑의 체벌과 언어폭력이 고려 시대에서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네, 네가 우리 집안을 망칠 작정을 했구나.”
“아, 아버지. 그런 게 아니오라….”
호장들과 호정들은 이번 일의 자초지종을 듣고는 식겁하며 주변 이목과 스스로의 지위도 무색하게 제 자식들을 사정없이 두들겨 패기 시작했고, 그 광경에 아직 맞지 않은 다른 자제들도 조만간 자신도 저 꼴이 날 것을 짐작하고는 떨기 시작했다.
“정신들 차려 이놈들아! 지금 너희가 한 일은 역모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짓이야!! 그대로 갔으면 너희는 물론 집안 모두가 역적으로 죽었을 것이야!”
늙은 호장 한 명이 그런 이들에게 일갈하고, 다른 호장과 호정들도 맞장구를 치며 분기탱천하여 제 자식이기만 했다면 당장 요절을 냈을 것이라는 그들을 시선으로 노려보자, 그들도 그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려 했는지 깨닫고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불안한 감도 있긴 했지만 분조장의 호기로운 모습과 총대를 메겠다는 모습에 술김에 자신들에겐 피해가 적고, 잘못돼도 도중에 빠지면 그만이라 여긴 것이었으나, 현실은 달랐던 것이다.
‘순시하던 장졸만 해도 우리와 비슷하고 끌려오는 동안에는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많고 한명 한명이 강맹해 보이던데….’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이 책임지겠다는 것도, 벌을 내리는 사람이 그 책임을 전부 받는 것을 허락할 때만이 아닌가?’
‘태자 전하가 애민(愛民) 하신다는 것 하나만 믿고 따지기엔 내 목숨이 너무 아까워.’
‘…씁. 그냥 돌아가고 싶다. 오지 말걸. 괜히 술을 해가지고….’
순시하던 태자견룡군에게 잡혀 끌려오던 중 점점 더 드러나는 병사들의 수에 그들은 기가 꺾인 것이다.
그렇게 갑오년(甲午年 1234년) 3차 여몽 전쟁에서 이안사와 함께하다가 과음이 얼마나 문제인지 깨달은 여진 추장들처럼 그들도 과음의 문제를 절실히 깨달으며 어리석은 스스로와 분조장을 욕하고 있을 때, 진정한 그들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호장, 호정들은 사색이 된 표정으로 왕태자를 향해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고 있었다.
“소인들이 자식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사옵니다.”
고개를 숙인 그들은 이제 다 끝났다는 것을 인정했다.
물론 여기서 끝났다는 것은 자신들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이 아닌, 패배로 끝났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안 그래도 별장들의 문제가 역모로 연계될지 모른다 싶어 노심초사한 상황에서 겨우 태자 입으로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다고 안전을 보장받았는데, 어리석은 자식들 때문에 별장들 문제는 비교할 수 없는 역모로 몰릴 판국인 것이다.
자식들이 그냥 쫄래쫄래 와도 태자의 지시를 어기고 소식을 전했냐고 의심받을 판국에 저 멍청한 아들놈들이 회까닥 돌았는지 무기까지 갖춘 채 대왕과 태자 전하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붙잡혔으니….
여기서 더 버틴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고, 그걸로 죽더라도 자살과 다를 바 없었다. 밀당하여 조금이라도 더 좋은 혜택을 받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무런 보상을 안 줘도 되니 그걸로 넘어가 주기만 하면 부디 그래 달라고 애원해야 할 판인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지만, 이건 아니야. 여기서 난을 일으킨다고 한들, 백성들도 따르지 않을 것인데 뭘 하란 말이야.’
‘저놈은 내 자식이 아니라 웬수다! 웬수야!’
그리고 그들은 여기서 다시금 ‘태자의 애민’(이라는 이름의 당근을) 받을 수 있었다.
“그대들이 자식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대 자식들도 그리 말하니 내 어찌 그대들을 벌하겠는가. 저들이 말하길 자신들은 그저 술김에 상소를 올리고자 찾아온 것이라고 한다.
저들이 혈기가 넘쳐 무례한 짓을 저지르긴 하였지만 저들에게도 의종, 명종대왕 시절의 난신적자들과 같은 이들은 아닐 것이라고 과인도 믿고 싶은 바로다. 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