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514
514화
21장 정전(井田)(2)
나주 오씨 오달변은 안도와 함께 고심하는 목소리로 내 이야기에 대한 반응을 보였다.
전자의 안도는 내가 요전 별장 사건으로 질책하거나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 후자의 고심은 그래도 결국 더 뜯어내는 것 아니냐는 불안과 의심 속에서 이걸 쉽사리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것일 것이다.
“전하의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나, 그것은….”
사실 나주 오씨가 이렇게 총대 메고 과거에 외척이던 시절로 최대한 인척인 양, 화를 피하려 든다면 내 쪽이 되레 환영할 일이다. 달랠 때 무섭게 달래면 그게 달래는 거겠는가? 울지 말라고 협박하는 거지.
“근시안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그대들의 손해인가 고심하는 것이오?”
“아, 아닙니다.”
너무 대놓고 말하니, 다시 움츠러든다.
나이로 보면 아버지보다도 많고 가문도 태조의 인척이었다는 것도 인정해 주는데도, 움츠러드는 모습은 조선 시대 사람보다 더하니, 이것이야말로 법과 주먹 모두 가까우면 성리학의 나라보다도 더욱 예(禮)를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진리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진짜 이들의 불만을 달래고 향후 상생을 위한 대안이지, 이들을 착취하기 위해서 내놓은 게 아니다.
“오 호장은 그리 생각하는가 본데, 어디 차근차근 생각해 보시오. 이미 전국에는 조운만이 아니라 육로로도 봇짐을 들고 오가는 상인들이 늘어나고 있소. 그리고 그들이 오가는 길 중간중간에는 주막이 세워져 과거와 달리 원(院)외에도 사람이 목을 축이고 잠을 청할 수 있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소이다. 이들이 오가는 길을 지방에서 닦아 준다면 이것이 어찌 나라를 위한 충정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물론 얼마 뒤 조칙이 선포될 것이나, 그전부터 관리하는 이들이 나온다면 황상께서 어찌 그들을 어여삐 여기지 않겠소? 그리고 그 길을 통해 물류가 오갈 것이니, 이 또한 각 지역에도 큰 진흥이 될 것인데 무엇이 문제겠소?”
내가 그들을 불러 달래면서 한 말은, 대략 2가지다.
하나는 전라도의 남경으로 통하는 길의 보수와 유지, 이후 농사를 실패한 농민들을 도와주거나 돈이나 쌀을 빌려줘도 싼 이율로 받는 것을(톡 까놓고 이번처럼 농사 망친 농민들을 노비로 만드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장해 준다면 2, 3품군은 조정의 지시가 없는 한, 각 주현의 보와 길을 설치하는 데 협력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서 저들은 그 보와 도로가 언제 설치될 줄 알고 투자를 하냐며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 장래적으론 몰라도, 당장의 이익은 들어올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가 저들에게 눈앞의 이익도 선사해 주었다.
“…오 호장도 직전(職田)을 이앙법으로 경작하였으니 알 것이오. 이앙법은 직파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확량을 늘려주나, 농사를 무사히 성공하기 위해선 물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하여 그대들은 전답은 늘렸어도 그 전답에 일일이 물을 채우는 것이 어려워 나라의 군을 이용한 것이 아닌가?”
“그, 그건….”
이번에 전라도 호족들에게 전답을 내놓게 한 것에는 앞서 말한 대로 군사력의 우위도 매우 크지만 무엇보다 전라도의 토호(별장)이 나라의 군을 사사로이 쓰고 ‘다른 호족들의 전답을 경작’해 주는 짓거리를 했기 때문이다.
이걸 구실로 전라도에서 또 역모한 거냐고 몰 수 있어서 저들을 압박하고 노비와 전답을 자진 반납하게 한 거지. 이 구실이 없었다면 저들은 법적으로나 이 시대의 시선으로나 딱히 죄지은 게 없다.
막말로 저들이 농부들에게 이앙법을 강요한 것도 아니고, 저들은 어디까지나 익숙하지 않은 이앙법에 쫄딱 망한 농민들에게 그들이 가진 땅을 대가로 식량을 주고, 땅이 없는 그들이 먹고살 수 있게 가노로 들여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여 준 거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게 내가 전라도를 떠나기 전에 전라도에 바른 관례를 만들어두려는 이유기도 하다.
전에도 말했지만 농사가 잘되는 전라도에서도 망해서 가노로 들어간 백성들이 있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는 더 많다는 거라 이건 이미 나라 전체의 문제다.
이거 놔두면 원 역사 고려말 권문세족이 땅 따먹는 꼴이 재현될 가능성도 크다.
전쟁이 선결이긴 하지만 이건 자칫하면 전쟁에서 이기고도 고려라는 나라는 반쯤 다 죽지 못해 살아 있는 좀비 같은 나라가 될 우려도 있는 수준이다.
그것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서라도, 크게 잡으면 전국을, 작게 잡아도 인구와 조세가 많은 전라도, 경상도 지역은 정상적인 땅으로 하고, 조세도 제대로 올라오게 해야 한다.
“재차 말하나 지금 내가 오 호장을 비롯한 호장들을 문책하려는 것이 아니오. 그 문제는 일전의 환전으로 넘어갈 생각이오.”
참고로 내가 하오체를 하는 것은 총대를 멘 오달변 한정이다. 다른 호족들에겐 그냥 하대한다. 이건 단순히 서열 확인이 아니라 저들이 원하는 대로 오달변이 말한 대로 태조의 인척 가문이었던 나주 오씨의 오달변을 저들의 대표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건 이 대화로 문제가 일어날 시 가장 책임을 받는 것도 오달변이란 말이다. 그걸 알기에 저들도 이 차별엔 따질 수 없는 거다.
“대신 조만간 나라의 조세를 늘리기 위해 해에 두 번 이, 삼품군은 전라도의 둔전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각 지방의 전답들에 가뭄이 생길 때 강과 천에서 물을 퍼다 보조하고자 하는 조치를 취할 것인데 이때 그들이 경작한 땅의 9분의 1은 나라에 바쳐지고, 9분의 1은 이, 삼품군을 포함한 둔전(屯田)으로 나눠줄 것이로다. 이 토전(土田)의 대상에는 향리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처음 내 말이 끝나고 한순간은 호족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침묵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아!”
오달변의 입에서 이해했다는 반응의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뒤늦게 다른 호족들 에게도 비슷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이 기간은 큰 사고가 없는 한 약 10년 동안 유지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여기까지 말하면 그곳에 있는 모두가 이해했을 것이다. 일품군은 안 되지만, 이, 삼품군이라면 너희들이 지금 가장 바라고 곤란한 것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다.
저들이 바라고 곤란한 것이 뭐냐고?
바로 물이다. 모내기법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경작보다 물의 유지다. 받아둔 물이 부족할 때 물을 퍼 올리는 인력으로 이, 삼품군을 쓰게 해주겠다는 것은 저들에게 큰 이점이다.
여기에 둔전 운운하면서 경작을 만들겠다는 것도 진짜 맨땅에 둔전을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토호들이 새로 얻은 땅들을 경작하고 그 수확량의 9분의 2만 조세와 이, 삼품군들에게 나눠주겠다는 말이다.
이건 사실상 이번에 죽은 별장들이 하던 것을 나라에서 허락해 주겠다는 것이니 말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 군을 부리는 것은 나라이며, 도와준 비용에 이, 삼품군들 것까지 들고 간다는 점이지만, 말이다.
“이것은 주대(周代)의 정전법(井田法)에서 차용한 것이다. 본래라면 9분의 1만을 취해야 하나 이, 삼품군은 그들의 노고와 신세를 감안하여 보내려는 것이니 여러 향리들은 뭇 이 선정에 동의해주었으면 한다.”
내가 내건 제안대로 할 경우 이, 삼품군들에게 노동의 대가로 토호들의 것에서 뺏어 보상해 주는 셈이다.
그리고 이건 주현일품군별장들 사건과 달리 태자인 내가 허가를 하는 셈이니, 사실상 공식으로 나라의 군을 이용하는 것을 허가해 주는 셈이다.
이 제안들은 전라도에서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이마저도 10년이란 기간이 정해져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고, 보와 도로 설치도 10년이면 대략적으로 성과가 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영구적으로 허용해서 이, 삼품군을 농사 부대로 완전히 바꾸기도 싫고, 노동과 대가라는 식으로 거래 형식으로 자리 잡으면, 일정 이상 보와 도로가 개설되면 조선 후기처럼 이앙법을 크게 관리하지 않고 쓸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면 호족들은 더 이상 도움이 이, 삼푼군의 협럭이 없어도 되니 안 하겠다고 나올 수 있는 만큼, 가장 급한 지금만 이 조치를 취하겠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의문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호족들은 제 땅의 9분의 2나 소모하니, 호족들이 큰 손해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건 이앙법의 성능을 너무 얕보는 이야기다. 크게 잡아 3할을 떼먹히더라도 이앙법에 성공하면 기존 직파법의 3, 4배는 들어온다.
때문에 이앙법이 성공할 시 얻는 성과의 9분의 2 정도를 빼더라도 이전 직파법으로 전부 얻는 것보다 큰 이익이 남는 장사였다.
그런데 현재 고려의 열악한 환경상 수확이 달달한 이앙법은 그해 농사를 성공한다는 것은 복불복에 가깝다. 조선도 후기에 전국에 보가 많이 설치되면서 공식으로 인정받고 사용된 것이다.
그러니 나처럼 인력으로 물을 퍼다 마르지 않게 만드는 생노가다가 필요하고 그게 아니라면 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깐. 이, 삼품군들에 대해 설명하겠다. 주현군은 모두 지방군이고, 현역이나 전투부대도 아닌 일품군도 조정의 조사와 통제를 받으나, 이, 삼품군이 보승(保勝)과 정용(精勇)은 물론, 공역부대 취급 받는 일품군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호장들이 조사하고 통제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우선, 이품군(二品軍)은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이거나 형제가 없는 장정들이 소속된다.
삼품군(三品軍)은 가사(家事)로 인하여 현역에 종사할 수 없는 장정들로 편성된 부대다.
조정에선 그런 현역에 집중할 수 없는 부대들을 지방의 호장들에게 조사하고 맡긴 것이다.
그러니 그런 그들을 부려 토호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줄 테니 그들이 부린 만큼 그들에게도 먹고살 양식은 부담하자는 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의미를 이해했기에 호족들은 지금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앙법을 알기 전이라면, 반대로 이미 보가 충분히 설치되어 자력으로 충분히 관리하거나 뽑아대는 것이 익숙해졌다면 수 이 2할마저 매우 아쉬워했을 것이고, 거절해도 문제가 없다면 즉시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하지만, 이앙법의 수확량을 어느 정도 맛본 지금은 쉽사리 거절할 수 없어 고민할 문제였다.
저들의 상태를 요약하면 총체적으로 따지면 기존 전답의 9분 7만을 얻어도 큰 이득이긴 하지만, 그래도 9부의 2가 아쉬운 감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마땅찮은 계륵 혹은 계륵보단 낫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쉽다는 의미다.
“황상 폐하와 태자 전하께서 소신들에 대해 많이 생각해주시니 참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하오나….”
말을 하는 오달변이나 그 뒤의 호족들은 점점 긴장이 풀리는 기색이 보였다. 이걸 좋다고도 나쁘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저들도 이제 내가 창칼로 뜯어낼 생각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하루 만에 즉결할 생각이 아니라서 여러 날을 거쳐 이야기하려 했는데….
저들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거다.
“소신들은 이미 문적을 태우고, 전답까지 내놓았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뭇 여러 지방의 모범이 돼 보인 것이 아니옵니까? 반납하기 전이면 모를까? 지금은 기존에 있던 전답을 기준으로 둔전과 조세를 추가로 내야 합니다. 하물며 정전법도 9분의 1만을 공전으로 쓰는 것인데, 이것은 9분의 2나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들 중 힘 있는 장정들도 적고, 보를 설치하는 것도 그렇게 의욕적이지 않습니다. 정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우리들도 다소 쉴 수 있게 정전법처럼 9분의 1만 바치는 것으로 하면 아니 되겠습니까?”
라는 말이다. 뭐, 저들 입장에선 이미 얻어먹은 전답까지 토하게 해놓고, 여기서 설치된 도로 관리와 농민들이 망할 때 지원해주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되는 거냐 불만도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이놈들 봐라? 지금 밀당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