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15
교랑의경 115화
“할아버님.”
두칠이 앞으로 걸어가 꿇어앉았다. 옆에 앉아 있던 두 관기(官妓)가 술 주전자를 건네자, 두칠이 직접 받아 술을 올렸다.
“할아버님께서 살펴 주신 덕분에 술을 팔 수 있게 됐습니다.”
술은 관부에서 관리했기에 주점에서 술을 팔려면 관부에 세금을 내야 했다. 사내는 술잔을 받아 들며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그래, 하고 대꾸했다.
“좋은 술도 아니고. 관부에서 파는 술은 맛이 제대로 빚은 술만 못해.”
사내가 딱 한 모금만 마시며 말했다.
“회선루에서 빚은 술이 맛있더구나. 거기 비법을 알아 와라.”
“하지만 회선루는…….”
기뻐하던 두칠이 곧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점을 열고 직접 술을 양조겠다는 허가를 받으려면 관부의 뒷배가 필요했다. 더구나 술을 빚는 비법은 그 가치가 천금에 달하니 말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사중승 우문청이 실각했다.”
사내가 담담하게 말하자 두칠은 바로 이해했다. 우문청은 회선루의 뒷배였다. 뒷배가 쓰러졌으니 이익을 나눠 먹을 때가 온 것이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두칠은 얼른 큰절을 올렸다. 과로신선에 맛좋은 술까지 있는데 신선거가 돈을 쓸어모으지 않기도 힘든 일 아닌가! 하지만 대박이 나면 눈독을 들이는 인간들이…….
“할아버님, 지난번에 말씀드린 일 말입니다. 만에 하나…….”
두칠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무슨 일?”
사내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과로신선의 진짜 주인이요.”
두칠이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
사내는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뭔 대수라고. 언급할 가치도 없다.”
“하온데 주씨 가문이 요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진 상공에 이어 동 내한과도 연줄이 닿은 데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선까지 집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두칠이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신선?”
사내는 더욱 냉소를 지었다.
“군자는 괴력난신을 멀리해야 하느니라. 시정잡배들의 입은 못 막는다 쳐도, 저들까지 나서서 인정한단 말이냐? 어엿한 조정 관료가 그런 말을 대놓고 떠벌리다니. 내 눈엔 주씨 가문의 저의가 의심스럽구나. 저 과로신선도 신선이 준 거라고 하더냐? 저들만 쓸 수 있고 남들은 못 쓴대?”
거기까지 말한 사내가 손 닦던 물수건을 탁자 위로 탁 내팽개쳤다.
“어딜 감히!”
사내의 입가에 탐욕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감히 그리 나온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감히? 나쁘지 않다고? 두칠은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을 살린다? 재미있군.”
사내는 혼잣말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동 내한을 치료한 후 곧바로 정교랑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그 놀라운 일에 대한 경탄이 수그러든 건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정교랑에게 진료를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정교랑의 확고한 원칙 때문에 벌떼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곧 죽을 사람은 많지 않았고, 1만 관을 감당할 정도의 재력을 가졌으면서 곧 죽을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았다. 물론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늦겨울 새벽, 조용했던 주씨 저택이 또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어서 신의를 불러 주십시오. 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습니다!”
쾅쾅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주 노야 내외는 두통을 느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번번이 다 죽게 생긴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네요, 재수가 없으려니.”
주 부인이 푸념했다. 동씨 가문의 일을 겪으면서 주씨 가문도 교훈을 얻었고, 한층 대담해졌다. 이제 누가 됐든 무슨 이유든 간에 주씨 저택의 문턱을 함부로 넘을 순 없게 됐다.
“왜 막는 거요? 우린 주씨 가문을 찾아온 게 아니오. 정 낭자를 찾아온 거라고. 냉큼 비켜서시오.”
문밖에 선 사람들은 기세를 높여 소리쳤고, 여인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주 부인은 그 소리에 열이 받아 또다시 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주씨 가문은 빠지라니! 이것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대문 앞에서 소란을 피우도록 그냥 둘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하는 수 없이 명첩을 받고 안으로 들였다.
“무슨 일이에요? 우리 교랑은 병이 났어요.”
마당에 선 주 부인이 말했다. 주 부인은 명첩에 쓰인 별 볼 일 없는 이름을 보고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정교랑이 병을 얻어 의원을 부른 일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들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때마침 시녀가 오는 모습이 보였다.
“부인, 저희 아씨께서 출타하셔야 하니 마차를 준비해 주세요.”
순간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출타할 정도면 아픈 게 아닌가 본데?
주 부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일찍 말하든가, 늦게 말하든가, 하필 이때 말하다니. 주 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정교랑은 왜 이렇게 사사건건 나한테 맞서고 드는 거지?
“정 아씨, 정 아씨.”
저쪽에 있던 사람들이 정교랑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이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지라 주 부인은 하는 수 없이 이들에게 길을 안내했다. 이들은 중문에서 정교랑과 마주쳤다. 정교랑은 두모를 살짝 들어 올리고 실려 온 사람을 힐끔 쳐다봤다.
“지금은 못 고쳐요. 다른 사람한테 데려가 봐요.”
사람들은 멈칫했고, 주씨 가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못 고친다고? 왜 또 못 고쳐? 원칙에 안 맞아 안 고치는 게 아니라, 못 고친다고 했지? 이게 무슨 뜻이야?
“아씨, 아씨.”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제 아버지는 힘드실 것 같습니다. 아씨, 제발 자비를 베푸세요.”
“돈 있습니다. 돈도 가져왔어요! 1만 관이요!”
누군가가 소리쳤다.
“아니, 1만 5천 관도 상관없습니다. 2만 관도 괜찮아요. 아씨, 제발 살려 주십시오!”
2만 관이라니! 주씨 가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정교랑은 표정 변화가 없는 얼굴로 사람들을 쳐다보고 고개를 까닥여 예를 표했다.
“난 병이 나서, 병자를 고칠 수 없어요.”
병이 났다고? 죽은 사람도 살리는 신의가 병이 나? 그저 저잣거리에 떠도는 풍문 아니었어? 아니, 그래도…….
“낭자, 낭자, 제 부친께서……. 방법 좀 생각해 주십시오. 돈은 있습니다.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몇몇이 소리쳤다. 정교랑은 시끄러운 소란 속에서 잠자코 있었다.
“못 알아들었어요?”
몰려드는 사람들을 막으며 시녀가 언성을 높였다.
“아씨께서 편찮으셔서 못 고친다고 하셨잖아요. 아씨는 편찮으시면 병을 못 고치세요. 어서 모시고 가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뒤쪽에서 두봉을 싸매고 있는 여인은 과연 앞으로 나설 뜻이 없어 보였다. 상황 파악을 끝낸 사람들이 불평을 쏟아냈다.
“아이고, 진짜 독하네!”
“죽는 걸 보고도 안 구하겠다니!”
“주씨 집안은 참 모질기도 하지!”
“주씨 집안은 사람을 가리는군. 우리가 진씨 가문이나 동씨 가문만 못하다고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안 구하겠다네!”
뭐가 주씨 가문이 독하고 모질다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이게 주씨 가문과 무슨 상관이지?
울화통이 치민 주 부인은 또다시 격렬한 기침을 해댔다.
안 고친다던 병을 갑자기 고친다고 하질 않나, 원칙에 안 맞으면 안 고친다더니 또 뚝딱 고쳐 놓고, 이제 와선 또 안 고치겠다니! 아주 사람을 들들 볶아 죽이는구나! 어쩜 이렇게 뻔뻔해! 왜 못 하는 말이 없어! 병이 나? 병이 났으면 얌전히 누워 있어야 할 거 아냐. 최소한 그럴듯하게 보이긴 해야 하잖아! 다른 사람들이 무슨 바보인 줄 알아? 저 화근덩어리!
“그다음엔?”
진 노태야가 호기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방법이 없으니 결국 다른 의관으로 데려갔죠.”
사환 하나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죽었대?”
몇몇 낭자들이 긴장하여 물었지만 진단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럴 뻔했죠. 다행히 그 댁 사람들이 잽싸게 태의국으로 쳐들어갔나 봐요. 태의 네다섯 사람이 한나절을 매달린 끝에 간신히 목숨을 구했대요. 원기를 상한 데다 어혈로 종기가 생겼다고 합니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거봐, 애초에 죽을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 정 언니가 그래서 안 고친 거야. 원칙에 안 맞잖아.”
진단랑이 말했다.
“태의들의 의술이 좋아서 살린 걸 수도 있잖아?”
낭자 하나가 반박하고 나섰다.
“아니면 처음부터 죽을 사람이 아니라 안 고치겠다고 했어야지. 왜 병이 나서 못 고친다고 해?”
정단랑은 입을 삐죽이며 잠자코 있었다.
“의원은 부모의 마음을 가졌다던데, 어떻게 딱 잘라 안 보겠다고 하고 진짜 안 보냐.”
다른 낭자도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원칙을 말한 건 본인이야. 본인한테 병이 나면 안 고친다는 건 원칙에 없었잖아. 본인이 원칙을 어긴 꼴 아냐?”
“언니가 병이 나서 못 고친다는데 뭐 어때? 그리고 언니는 의원도 아닌걸.”
진단랑이 나섰다.
그렇지. 정교랑은 의원이 아니었다. 두 자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도…….
“의원은 아니지만 병을 고칠 수 있잖아.”
잠시 침묵했던 낭자가 입을 열었다.
“할 수 있으면서 안 하는 건 도의가 아니지.”
“정 언니는 병이 났잖아. 고치고 싶어도 못 고치는 거야.”
진단랑이 억울한 듯 반박했다.
“그 말을 누가 믿어?”
두 자매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쪽 옆의 진 노태야는 입씨름을 하는 손녀들을 꾸짖지 않고 미소를 지은 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진십팔랑이 냉소를 지으며 자매들을 훑어봤다.
“이제 보니 정 낭자가 왜 말을 많이 안 하는지 알겠다.”
진십팔랑이 불쑥 입을 열자 자매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
“말해 봤자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다들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잖아. 정 낭자가 뭐라고 말하든 믿지도 않고.”
두 자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못마땅한 투로 따졌다.
“십팔랑, 너 그게 무슨 뜻이야?”
“정 낭자가 병이 나서 못 고친다는데 그 말을 안 믿고 함부로 추측하고 있잖아. 도의니 아니니 하는데, 그건 언니들의 도의지 정 낭자의 도의가 아니야. 왜 본인들의 잣대로 낭자를 구속하는 거야?”
두 자매는 얼굴이 시뻘게졌지만 따지려 해도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할아버지, 애초에 할아버지와 정 낭자가 낡은 묘당에서 만나 문진한 일이 없었다면, 숙부님이 강남까지 천 리 길을 내려가 청한다 한들 낭자가 왔을까요?”
진십팔랑이 미소를 짓고 있는 진 노태야를 보며 물었다. 손녀들의 시선에 진 노태야는 자세를 바로 앉았다.
“물론.”
진 노태야가 심호흡을 한 후 말을 이었다.
“안 왔겠지.”
진 노태야는 그 여인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말투와 목소리를 따라했다. 예전이었다면 어떻게 고쳤을 거냐고 묻자 지금보다 훨씬 쉽게 고쳤을 거라고 하여 말문을 막히게 했을 때처럼.
각박해 보이고 매정해 보이다가도 올곧아 보였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닐 뿐, 거짓도 위선도 속임수도 허풍도 아부도 없으니.
“그럼 할아버지, 정 낭자가 원망스럽진 않으세요?”
진십팔랑은 무언가 떠올랐는지 한마디 덧붙였다.
“정 낭자가 할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는 전제라면요.”
남의 일이면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