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49
교랑의경 149화
정교랑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서무수는 정교랑이 생각 중이라는 걸 알았기에 방해하지 않으려고 잠자코 있었다. 실내가 조용해졌다. 마당에서 대나무 통과 돌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올 뿐이었다.
“반근, 적어.”
정교랑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시녀가 서둘러 붓과 종이를 들고 탁자 앞에 앉았다.
“버섯탕 끓이는 법. 팽이버섯과 목이버섯, 얇게 썬 죽순을 넣고······.”
시녀는 정교랑이 말하는 것들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황궁 안. 태후가 앞에 앉은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떠냐. 외운 것을 다 썼느냐? 벌써 향을 한 대 다 피웠구나.”
대황자가 붓을 내려놓았다.
“마마, 소손은 다 썼습니다.”
태후가 기뻐서 손을 뻗자, 내시가 대황자의 종이를 들어 태후에게 올렸다. 하얀 종이 위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듯한 정교한 글씨가 보였다.
“첫째가 아주 잘 썼구나.”
태후는 앉아있던 다른 두 사람을 쓱 쳐다보더니 엄한 얼굴로 물었다.
“너희들은?”
진안 군왕도 해맑게 웃으며 붓을 내려놓았다.
“마마, 저도 다 썼습니다.”
내시가 종이를 태후에게 올리자, 태후가 쓱 훑어봤다. 태후의 얼굴색이 점점 잿빛으로 변했다. 종이는 반밖에 채워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글씨였다.
“은 이미 배우지 않았더냐? 폐하께서 외울 시간을 사흘이나 주었는데, 어떻게 문공(文公) 반 장도 못 써 내?”
진안 군왕은 헤헤 웃었다.
“마마, 스승님께서 제게 1년이면 배울 거라 하셨는데, 지금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반년은 더 기다려야 욀 수 있어요.”
옆에 있던 대황자의 얼굴에 조소의 빛이 스쳤다. 대황자는 같잖다는 듯 입을 삐죽이고는 턱을 치켜들고 의기양양한 자세로 고쳐 앉았다.
“마마, 마마, 저도 다 썼습니다.”
이황자도 급히 붓을 내려놓고 자기 앞에 놓였던 종이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태후에게 걸어갔다.
“아유, 우리 둘째도 다 썼어?”
태후는 종이 위에 대문짝만하게 쓴 두 글자를 보면서 칭찬했다.
“위낭 형님이 잘 가르쳐 준 덕분이에요.”
이황자가 태후의 옷깃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태후는 입을 삐죽이고, 여전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진안 군왕을 노려봤다.
“네 꼴을 좀 봐라. 어린 이황자까지 나서서 널 도와주잖아. 돌아가서 공부 열심히 하거라. 매일 허튼짓만 벌이려 들지 말고. 나중에 뭐가 되려고 그래.”
“네, 마마.”
진안 군왕의 웃음기 가득한 모습에 태후는 고개를 내저었다.
“됐다, 그만 물러가거라.”
세 사람은 자세를 바로 한 후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문을 나서자, 이황자가 한 손에는 진안 군왕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대황자의 손을 잡았다.
“형님, 우리 버드나무에 활 쏘는 놀이 하러 가요.”
“난 아직 읽어야 할 책들이 있다.”
대황자가 단호하게 말하고는 손을 휙 놓아버리자 이황자가 무안해했다.
“우리끼리 가요, 우리끼리.”
진안 군왕이 이황자를 보며 말했다.
“군왕, 이황자는 아직 어려 근면이 뭔지 잘 모릅니다. 괜히 이황자까지 물들게 하지 마십시오.”
대황자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심한 말을 뱉었다. 내시들은 낯빛이 하얗게 질렸지만 감히 나설 수 없어 고개를 숙인 채 못 들은 척 입을 다물었다. 진안 군왕은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네, 네. 나도 근면해져야죠.”
“책 읽으러 가자.”
대황자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이황자에게 말했다. 이황자는 입을 삐죽이고는 손으로 대황자를 밀어냈다.
“형님이랑 안 가요!”
이황자가 소리치고 도망쳤다. 내시들은 초조한 기색으로 서둘러 이황자를 따라갔다.
대황자는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구겨지자 부아가 치밀었지만 몇 살배기 어린아이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직도 미소를 짓고 있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보였다.
“쓸모없긴.”
대황자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성큼성큼 걸어가자 내시들도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홀로 남은 진안 군왕은 두 사람이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고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싸우는 자들이 모두 군자인데, 누구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백주리가 손을 높이 들며 ‘이분은 왕자 위(围)로 군주께서 아끼는 동생이시다’ 하고, 다시 손을 아래로 내리며 ‘이분은 초나라 변방을 다스리는 현감 천봉술이다. 둘 중 누구에게 생포됐느냐?’하고 물으니 포로가 이르되 ‘나는 왕자를 만나 패했소이다’ 하였다(의 한 구절).”
진안 군왕이 중얼중얼 읊조리며 유유자적 걸어갔다.
근처를 지나던 뚱뚱하고 새하얀 피부의 늙은 내시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
늙은 내시는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멀어져 가는 소년의 꼿꼿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 어디로 가려고 좌회전을 해요?”
옆에 있던 어린 내시가 물어봤다.
“좌회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책을 읽지 않으니 아무것도 모르지 이 녀석아.”
늙은 내시가 눈을 부릅뜨며 호통을 치자 어린 내시는 웃으며 목을 움츠렸다.
“할아버지, 소손은 책을 많이 읽지 못해서 할아버지처럼 폐하를 모시지 못해요.”
늙은 내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저쪽으로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대황자께서는 이제야 를 배우고 계시고, 진안 군왕은 내년이 돼야 을 배우실 텐데, 벌써 백주리가 포로를 심문하는 편까지 외웠다니?”
중얼거리던 늙은 내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상하기수(上下其手: 위와 아래로 손을 들어 신호한다는 뜻. 의도를 갖고 사실을 왜곡시킬 때 쓰는 말), 상하기수. 황궁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그런 모습이겠지.”
“할아버지, 상하기수가 뭐예요?”
어린 내시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뭐긴, 개소리지!”
늙은 내시가 어린 내시를 걷어차며 노려봤다.
“냉큼 가지 않고 뭐해? 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마. 하여간 오지랖도.”
앞에 선 어린 내시가 재빨리 길을 안내하자 두 사람의 뒷모습도 금세 멀어져갔다.
진안 군왕이 편전 바닥에 앉아 시선을 내리깔고 무언가를 쉼 없이 읊었다. 책은 펼치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을 쉬지 않고 읊는데, 밖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 돌아왔습니다.”
내시의 말에 진안 군왕이 일어났다. 시위 한 명이 들어왔다. 얼굴을 보니 옥대교 정교랑의 저택을 잘못 찾아갔던 그 사람이었다.
“어찌 됐느냐?”
“진씨가 아니라 정씨입니다. 나이는 스물여섯에서 일곱쯤 되어 보이는 사내였고 서북 말투를 썼습니다. 문을 열었던 시녀 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시위가 군왕에게 답했다. 아닌데, 하긴 이런 식으로 찾기에는 가망이 없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직접 진 대인을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게 빠르겠구나.”
“군왕, 아니되옵니다.”
시위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렸다.
“그래, 안다. 급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분명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세상에 아무 방법도 없는 일이 어디 있어? 어떻게든 해결이 되지.”
진안 군왕의 마지막 말은 혼잣말 같았다. 시위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문밖으로 걸어 나오던 시위가 별안간 인상을 쓰며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내시가 조용히 물었다. 시위는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시위가 또다시 멈춰 섰다.
이걸 말씀드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옥대교에서 본 그 정씨 사내, 어딘가 낯이 익단 말이야. 분명 그 눈빛을 본 것 같은데. 아니야, 잘못 본 걸 수도 있지. 경성에 오가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시위가 한숨을 깊이 내쉬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오가 다 되어 가는 무렵, 말을 탄 주육낭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옥대교 근처에 도착했다.
“공자님?”
사환이 물었다. 주육낭이 심호흡을 하고 말에서 내려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또 왔어요? 왜 왔는데요?”
금가아가 문틈 사이로 소리쳤다. 왜 왔냐고? 내가 왜 또 여길 왔는지 난들 아나!
“아직 돈은 남았고?”
주육낭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돈 있어도 댁한테는 안 꿔 줘요!”
금가아가 경계하며 말했다. 주육낭이 홧김에 문을 발로 걷어차자 금가아가 화들짝 놀라 문에서 떨어졌다.
소리를 듣고 마당으로 나온 반근이 금가아의 만류를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공자님, 아씨는 집에 안 계세요.”
“또 나갔다고?”
주육낭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허구한 날 밖에서 뭐 하는 거야?
“네.”
반근이 대답했다.
“필, 필요한 건 없고? 있으면 말만 해.”
반근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공자님,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해요. 아씨께서는 필요한 게 없으세요.”
주육낭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던 주육낭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문을 닫으면서 금가아와 환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는 반근의 옆모습이 보였다.
저 아이가, 언제부터 내 앞에서 다시 웃기 시작한 거지? 말할 때도 고개를 들고 하네? 허리도 곧게 펴고······.
문이 서서히 닫혔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뿐이다. 사람도, 이름도 그뿐이다.
시선을 거둔 주육낭은 사환이 건넨 말고삐를 붙잡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탄 후 질풍처럼 내달렸다.
부드럽고 하얀 두부를 조심스레 물그릇에 넣었다. 크기와 재질이 다양한 칼들이 이대작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대작은 그중 하나를 신중하게 골라 집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숨을 참고 이대작이 물그릇 안에 손을 넣어 칼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대작의 칼질에 두부는 눈송이처럼 물그릇 안에 천천히 퍼졌다.
정교랑과 관리인, 서무수는 멀리 떨어진 회랑 아래에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작이 허리를 곧게 펴고 멍하니 물그릇을 바라봤다.
“다시.”
이대작의 말에 시녀가 두부 한 모를 다시 가져다주었다. 이대작이 집중하느라 새빨개진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다시 허리를 숙여 물그릇에 손을 넣었다.
“꽃을 조각해내는 것 정도는 이제 문제없습니다.”
관리인이 그릇 하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정교랑 뒤에 서 있던 시녀가 탄성을 내뱉었다.
“와, 세상에나! 꼭 진짜 모란꽃 같아요! 이게 정말 두부로 조각한 거예요?”
“그럼, 그럼. 불과 이틀 만에 해냈다니까.”
서무수가 이대작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딱히 특별한 능력은 없어 보이던 숙수에게 이리 섬세한 손재주가 있었을 줄이야.
“사람이 참 성실합니다. 아둔하다 보니 우직하게 손재주를 익혔죠. 사부의 문하에서 배울 땐 제자 중 가장 못났습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새로운 요리며 새로운 맛 하나 못 만들어 냈죠. 그래도 기본기 하나는 최고였습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죠, 다 가질 수는 없는 게 세상 이치입니다.”
오 관리인도 감탄하면서 이대작 이야기를 했다.
“그럼 꽃을 조각하면 되겠네요. 뭘 더 하려는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음식 공양이기도 하고 부처님 앞에 올리는 게 아닙니까. 이대작이 꽃은 새로울 게 없다며 좀 더 알맞은 걸 연습하겠답니다. 꼭 불상을 조각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네요.”
시녀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다시 이대작 쪽을 쳐다봤다. 그 사이에 이대작은 또 두부 한 모를 가져다 고개를 박은 채 칼질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고작 나흘 남았는걸요?”
시녀는 걱정되는 말투로 물어보았다.
“정 안 되면, 모란꽃을 조각하기로 했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두부의 맛이고, 조각은 금상첨화를 위한 것이니까요.”
정교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시선은 다시 이대작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