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16
교랑의경 216화
마차가 옥대교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진소 부인이 왔다는 말에 시녀가 대문 앞까지 마중을 나갔다.
“부인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듣고 아씨께서 저희한테 마중 나가라고 분부하셨어요. 아씨께서는 아직 주무시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녀가 대청에 마련해 둔 자리로 안내했다.
“힘들어 죽을 뻔했지?”
진소 부인이 따뜻한 말투로 물었다.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쳐줄 때도 그랬으니, 진소 부인은 이 상황이 익숙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진 부인에게 돌렸다.
“부인께서는 치료비를 주러 오신 거죠?”
진 부인이 시녀를 향해 미소 지어 보이고는 여종을 향해 손짓하자 여종이 얼른 상자 하나를 시녀 앞으로 건넸다.
“낭자의 원칙은 나도 들은 게 있지. 이 2만 관은 목숨값이야.”
진 부인의 말에 시녀가 상자를 건네받아 열어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나머지 2만 관은 다리를 고쳐 준 값이란다.”
진 부인이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시녀는 진 부인에게 감사의 예를 표하고 상자를 잘 보관해두었다.
반근이 차를 올리러 왔을 때 즈음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아씨께서 깨셨나 봐요.”
시녀가 말하며 얼른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들어갔다.
진 부인이 고개를 들어 시녀가 간 방향을 쳐다보니, 휘장 뒤로 여인의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 뿐 걸어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 부인. 용모를 단정히 하고 뵙겠습니다.”
목이 잠긴 여인의 목소리였다.
“괜찮아요.”
진소 부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조용해진 방 안에서 옷감이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진 부인에게 조용히 차를 한 모금 마시라고 했다.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던 진 부인은 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흠칫했다.
“맛있네. 조금 연한 것만 빼면.”
진소 부인도 저택에 방문하여 차를 마신 적이 많지 않아 그 말에 차를 한 모금 들었다.
“차를 바꿨니?”
진소 부인이 옆에 있던 반근에게 물었다.
“네. 집에 차나무를 한 그루 심어 두어서 아씨께서 며칠 전에 직접 덖으셨어요.”
“낭자가 다재다능하네요.”
진 부인이 말했다.
그런 담소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휘장이 들어 올려졌다. 휘장 쪽으로 시선을 옮긴 진 부인은 창백하고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에 순간 멈칫했다.
“교랑.”
진소 부인이 정교랑을 향해 손짓하고는 진 부인을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쪽은 진씨 부인, 십삼낭의 모친이에요.”
진 부인이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자 정교랑도 시선을 진 부인에게로 옮겼다.
자세히 보니 날렵한 콧대와 오목조목 수려하게 생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무뚝뚝한 표정 때문인지 어딘가 어두운 느낌이 들어 가까이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진 부인이 치료비를 가지고 오셨어요.”
시녀가 조용히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잠시 넋이 나갔던 진 부인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정교랑에게 큰절을 올렸다.
“목숨을 구해 준 낭자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은 황송하거나 불편한 기색 없이 담담하게 절을 받고,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 앉으며 답례를 표했다.
“워낙 놀랐다 보니 혈육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만 추태를 보이고 말았네요. 무례를 범한 게 있다면,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괜찮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짤막한 정교랑의 대답에 진 부인은 당황했다. 정교랑에게 말을 더 이어 나갈 뜻이 없어 보이자 진 부인이 어쩔 수 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낭자의 신묘한 의술이 우리 십삼을 고쳤네요. 그동안 아무리 훌륭한 명의를 수소문해 봐도 소용이 없어서 가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진 부인이 눈물을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
“낭자, 정말 이 은혜를 어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치료비면 충분해요.”
정교랑이 또 짧게 대답했다.
무슨 대화가 이래? 진 부인은 눈물을 훔치며, 앞에 무표정한 채로 앉아 있는 여인을 바라봤다. 언변이 뛰어난 진 부인이었지만, 열 글자도 안 되는 짤막한 대답만 하는 정교랑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여 뭐라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진 부인은 감격스러운 감정이 북받쳐 올라, 어떻게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할지 며칠 동안 밤낮없이 고민했다. 그런데 막상 여인을 만나 보니 준비했던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도 없고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저 진 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여인의 모습에 도리어 진 부인이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미치겠네. 내가 어떤 가문의 여식이고, 어떤 집안의 며느리냐고. 항상 남들이 내 앞에서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모습만 봤거늘, 어쩌다 딸 또래의 어린애 앞에서 이리 긴장을 하는 거야.
아니면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런가.
진 부인은 진십삼의 다리를 고치는 사람이 있다면, 한평생을 부처처럼 모시겠다고 한 적이 있었다.
신과 부처 앞에서 공손하고 긴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창피한 일이 아니야.
“우리가 어제 범한 무례한 행동 때문에 아직 화가 안 풀린 거죠?”
진 부인이 아예 까놓고 물었다.
“아니에요. 인지상정이죠.”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가 지나친 걱정이라고 말했잖아.”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진 부인을 나무랐다. 그리고는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오늘 감사의 말을 전하러 온 것도 있고, 진십삼이 또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
“그 약만 다 먹으면 돼요.”
“그게 다예요? 진십삼은 십수 년간 다리를 못 썼는데…….”
진 부인이 놀란 듯 되물었다.
“병은 별거 없어요. 다만 마음의 병이 깊었을 뿐이죠. 이제 기가 통하게 됐으니 요양만 제대로 하면 괜찮을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마음의 병?
“우리 십삼은 그릇이 넓어 매사에 의연한데, 무슨 마음의 병이 있죠?”
진 부인이 서둘러 묻자 정교랑이 곧바로 대답했다.
“이런 일을, 어떻게 의연하게 받아들이겠어요?”
진 부인은 흠칫했다.
그래. 이런 일을 어떻게 의연하게 받아들여…….
그랬구나. ‘통즉통(痛則通)’이라 했으니 아프면 뚫리는 게지.
다들 무슨 말을 더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면서 대청은 조용해졌다.
이젠 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것도 없고, 보아하니 이 낭자도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마음이 없어 보이네.
“그럼 푹 쉬어요. 우리는 이만 가 볼게요.”
진소 부인이 깔끔하게 일어나며 작별을 고했다. 붙잡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정교랑의 모습에 진 부인도 하는 수 없이 예를 표하고 따라 나갔다.
마차에 탄 진 부인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팍을 몇 번 쳤다.
“낭자가 참…… 재미있네요.”
그런 진 부인의 모습을 보며 진소 부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할 말 있으면 숨기지 말고 얘기해. 내가 정 낭자를 아끼긴 하지만 네가 흉보는 것을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야.”
진 부인이 실소를 터트리고 마차의 휘장을 올려 저택의 대문을 내다봤다.
“저리 이상한 낭자를, 십삼은 도대체 왜 좋아하지?”
“십삼도 별나긴 하지.”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밖을 내다보던 진 부인은 갑자기 웃음이 났다.
“그럼 별난 사람들끼리 잘 어울리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 마. 예전에 내가 이야기했었잖아. 십삼의 다리를 원한다면, 다른 건 생각하지도 말라고. 정 낭자가 병을 고치는 데에는 원칙이 있어.”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고 있죠. 찾아가서 치료하는 법이 없고, 불치병이 아니면 안 고친다는 거요.”
“또 있어.”
진소 부인이 잠시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치료한 가문의 사람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진 부인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진소 부인을 쳐다봤다.
“치료한 가문과 연을 맺지 않는다고요? 언니가 한 말이에요?”
“낭자의 말이야.”
진 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말없이 진소 부인을 바라보았다.
“정말이라니까. 난 이미 거절당해서 잘 알아.”
진소 부인이 진 부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 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그렇담 어리석은 우리 아들이 정말 아쉬워하겠네요.”
진소 부인도 진 부인을 따라 저택을 내다보는데, 대문 앞에 서 있는 진십삼이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받고 선 소년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넘쳤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났다. 기대와 감동과 흥분과 환희로 가득한 표정이었다.
“봐요, 보라고요.”
대문 안으로 들어온 진 공자는 마당에 우뚝 서서, 자신을 부축하던 사환을 밀어내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회랑 아래 서 있던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 공자를 쳐다봤다.
“봐요.”
진 공자는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낭자는 어차피 결과를 알고 있었겠지만, 그래도 이 모습을 제일 먼저 보여 주고 싶어서 왔어요. 직접 봐요. 이게 낭자가 해낸 겁니다.”
정교랑은 음,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낭의 일은 너무 나무라지 말아 줘요.”
진 공자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진 공자를 빤히 바라봤다.
“아, 아니지, 아니지.”
진 공자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내저었다.
“다리가 다 나았더니 머리가 고장 났나 보네요.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낭자가 어찌 육낭을 탓하겠습니까. 다 괜한 걱정이죠.”
눈앞의 여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진 공자는 뭐라 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데…….
“낭자가 내 다리를 고쳐주기 위해서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하지만 낭자의 말이 다 맞았어요. 난 연기를 아주 잘했을 뿐, 그 누구보다도 다리를 신경 쓰고 있었죠. 남들이 내 다리를 어떻게 보는지 죽도록 신경 쓰였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유유자적하게 보이도록 애를 썼습니다.”
진 공자가 다시 몇 걸음 앞으로 걸어가며 웃었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를 정도였죠.”
“인지상정이에요. 괜찮아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 공자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사실 정신을 차렸을 때 깨달았어요. 다 알게 되었다고요.”
진 공자는 다시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이제 다리도 나았는데, 낭자가 시킬 일은 더 없습니까? 아, 차를 좋아하면, 내가 보수사 외에 좋은 차나무를 키우는 다른 사찰도 몇 개 아는데…….”
“경성 일대의 차는 다 비슷하니, 하나면 충분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지만 진 공자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똑같은 경성이지만, 성 남쪽과 성 북쪽의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럼 이건 어때요? 내가 낭자와 함께 가서 차나무를 보는 건?”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정교랑의 대답에 진십삼은 아, 하는 말을 내뱉은 후 잠시 뒤에 또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내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건요? 뭐, 먹는 거라든지, 천천히 걸어야 한다든지.”
“없어요. 정상인처럼 행동하면 돼요.”
진십삼은 다시 한번 아, 하고는 손을 뻗어 허벅지를 쳐보았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네요.”
정교랑은 그저 예, 하고 대답하고는 달리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마당은 다시 조용해졌다.
“다른 일 없으면, 난 이만 가볼게요.”
진십삼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숙여 예를 표했다. 진십삼이 예를 표하고 잠시 머뭇거리자 사환이 얼른 와서 부축하며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몇 걸음 걸어가던 진십삼은 다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회랑 아래서 가만히 서 있었다.
“정 낭자, 전에 나한테 했던 행동과 말들, 그 많던 말들은 모두 내 병을 치료해주기 위해서였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