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65
교랑의경 265화
얼굴만 그림처럼 예쁜 줄 알았더니, 정말 그림인가 화도 안 내네.
“관두자. 좌우지간 분위기 깨는 덴 뭐 있어.”
왕십칠이 일어섰다.
“나 간다.”
“왕 공자님.”
정교랑이 왕십칠을 불러세웠다.
“우리, 언제 돌아가요?”
그 말에 반근과 금가아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돌아가?
어쩐지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던 왕십칠의 시종만 그제야 안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낭자가 경성에 별게 없나 보군. 여기서 잘 지냈다면 따라가고 싶지 않을 텐데. 어젯밤에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도 주씨 가문의 체면을 봐서 그런 거겠지. 천가에 천막을 치고 꽃등을 구경할 정도면, 주씨 가문도 듣던 바와 달리 대단한 모양이야. 좀 더 알아봤다가 돌아가면 노야께 말씀드려야겠어.
“곧 돌아가야죠. 정씨 가문에서는 아무도 안 왔습니까?”
시종이 나서서 대답하며 물어보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씨 가문에서는 별 신경을 안 쓰네.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나 보군.
“그럼 우리랑 같이 가면 되겠다.”
왕십칠은 또 불러세울까 봐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때가 되면 부를게.”
왕십칠은 정교랑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대문을 나섰다.
“공자님.”
시종이 얼른 따라와 왕십칠 앞을 막아섰다.
“때가 되길 기다릴 게 아니라, 바로 출발하시죠.”
나이 든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고 아범, 급할 게 뭐 있어. 난 아직…….”
“공자님, 아무튼 이제 가셔야 해요. 안 그럼 노야와 부인께서 직접 오실 겁니다.”
고 아범이라고 불린 시종은 웃으며 왕십칠을 달랬다.
“그럼 더 좋겠네. 아버지랑 어머니도 경성 구경 좀 하시고.”
왕십칠의 말에 고 아범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공자님, 뭐라 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이미 시간을 많이 끌었어요. 구경도 실컷 하고 놀기도 실컷 노셨잖습니까.”
고 아범이 고개를 돌려 다른 시종에게 명했다.
“말과 마차를 준비해라.”
시종은 얼른 네 하고 대답하고 달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왕십칠을 에워싸고 압송하다시피 객잔으로 데려갔다. 말해 봤자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왕십칠은 알았다고 하고, 시종들을 시켜 돌아갈 준비를 하게 한 후 객잔에 홀로 남았다.
“왕 공자님.”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
“춘령!”
왕십칠은 안으로 들어오는 어린 몸종을 보고 반색을 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왕 공자님, 어젯밤엔 왜 안 오셨어요? 주 낭자가 묻기까지 한걸요.”
춘령이 말했다.
“갔었어. 예약된 방이 없다고 하던데, 너 혹시…….”
“그럴 리가요. 분명 잡아 놨어요. 제 이름을 대면 들어가게 해 주기로 했는데…….”
춘령 역시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인간들이 제 말을 무시한 거예요? 당장 가서 주 낭자한테 일러야겠어요.”
춘령은 씩씩거리며 뒤돌아 나가려 했다.
그랬구나. 의혹이 풀린 왕십칠은 서둘러 춘령을 불러 세웠다.
“그럼 내가 말을 제대로 못 전한 것 같구나. 괜찮아. 어차피 별일 아니야.”
왕십칠은 싱글벙글 웃으며 춘령을 쳐다봤다.
“주 낭자가 정말 나에 대해 물었어?”
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자님께서 정혼자랑 꽃등을 구경하러 오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정혼자가 얼마나 아름다운 낭자인지 보고 싶다고도 하신걸요.”
그 말에 왕십칠이 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춘령은 멈칫하여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교랑이 예쁜 걸 주 낭자가 어떻게 알았지?”
왕십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교랑? 이름이 교랑이었구나, 정교랑.
춘령은 입술을 달싹이며 나지막이 읊조려 봤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의외의 수확이네. 정교랑이라…….
“이름도 교랑이라니, 정말 아름다운 낭자인가 봐요.”
춘령이 웃으며 말했다.
“말도 마. 걔만 아니었으면, 어제 주 낭자를 보는 건데.”
왕십칠이 손을 내저었다.
“왜요? 덕승루에 가는 걸 싫어하세요?”
춘령이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니, 내가 잠깐 한눈을 판 사이에 다른 놈이랑 도망쳤지 뭐야. 걔 찾으러 다니느라 저녁내 시간만 낭비했다.”
다른 놈이랑 도망을 쳤다고…….
“도망을요? 납치된 거 아니에요?”
춘령은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시늉을 했다.
“저, 저도 예전에 납치돼서 팔려갔거든요. 요즘 인신매매범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 그분은 괜찮으실까요?”
춘령이 놀라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자 왕십칠이 헤헤 웃었다.
“아냐, 아냐. 오해였어. 외숙부 댁의 사촌 오라비였거든.”
왕십칠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거슬리는 놈이야.”
외숙부, 사촌 오라비. 춘령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담 다행이네요. 깜짝 놀랐어요. 공자님의 정혼자한테 경성에 외숙이 있으셨군요. 대단한 분이겠죠?”
“대단하긴 뭐. 그냥 무관이야. 뭐라더라…….”
왕십칠은 입을 삐죽거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귀덕낭이라나. 아, 그래. 귀덕낭장, 주씨 가문이다.”
귀덕낭장, 주씨 가문. 춘령은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혼인을 한 후에도 친척집에 들르려면 경성에 자주 오시겠어요.”
춘령은 밝게 웃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 또 볼 수 있겠죠?”
“친척집에 들르든 말든, 난 와야지. 주 낭자한테 전해라. 내년에도 꼭 보러 오겠다고.”
“곧 떠나세요?”
춘령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왕십칠을 쳐다봤다.
“응. 정혼자가 난리를 쳐서 집에 가야 해.”
왕십칠은 일부러 도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당한 사내로서 시종들한테 납치되다시피 돌아간다는 말을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낭자와 함께 백년해로하시길 바랄게요.”
춘령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서 일어나. 경성에서 잘 지내고 있거라. 나중에 꼭 보러 올게.”
달콤한 말로 달래 놓아야, 주 낭자 앞에서 나에 대해 좋은 얘기를 해 주겠지.
예상대로 춘령은 기쁘고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왕십칠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객잔을 나온 춘령은 왕십칠이 상으로 준 돈과 서찰을 보낼 주소 쪽지를 힐끔 쳐다봤다. 얼굴에 있던 밝은 웃음은 걷힌 지 오래였고, 가소롭다는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부디 백년해로해라!
“언니, 언니. 우리 오늘 정 언니네 놀러 가면 안 돼?”
진십팔랑을 쫄랑쫄랑 따라온 진단랑이 팔을 잡아끌며 물었다. 진십팔랑은 진단랑을 붙잡고 앞쪽 대청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제도 봤잖아. 할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보자.”
진단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매가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진소의 사환이 보였다.
“아버지께서 조부님이랑 같이 계셔?”
진십팔랑의 물음에 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 중이신 거야?”
“네, 병주로 갔던 사람이 돌아왔습니다.”
병주? 진십팔랑은 멈칫했다.
“언니, 병주가 어디야?”
진단랑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물었다.
병주라면…… 정교랑이 오랫동안 지낸 도관이 있는 곳인데…….
진십팔랑은 대청을 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거기서 정교랑과 관련된 소식이라도 온 건가?
진소가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진 노태야는 서찰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사람을 찾았을 땐, 이미 병이 깊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답니다. 며칠을 지켰지만 호전될 기미가 안 보였고요. 경성으로 데려올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다더냐? 아무 말도 안 남겼어?”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일관 말이 없어서 다들 사람을 잘못 찾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 서찰을 내밀더랍니다.”
진소는 서찰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정 낭자한테 주라고 했다는 걸 보면 정 낭자를 아는 듯싶습니다. 그 후 숨을 거뒀고요.”
진 노태야는 서찰에 시선을 고정했다.
대체 어떤 내력이 있는 자지? 세상 사람들 말처럼 고인이라면 왜 그리 허망하게 떠난 거야?
서찰엔, 뭘 쓴 거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비술을 더 많이 적어 놓았나? 죽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써 두었나? 아니면 사문(師門)의 내력이나 비밀?
손을 뻗던 진 노태야는 봉투를 만지던 손을 돌연 멈췄다.
“정 낭자한테 보내거라.”
진 노태야가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앉았다.
왕십칠이 떠난 후, 정교랑의 저택은 고요를 되찾았다. 금가아는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었고,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던 반근은 차를 들고 대청으로 들어왔다.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씨.”
반근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우리 돌아가는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성에서 지낸 시간이 오래돼서요?”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은 반근을 보며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 역시 웃음을 지었다. 반근이 앞으로 다가가 차를 올리자 정교랑이 찻잔을 받았다.
가을바람이 대청으로 들어오자 창가에 걸어둔 점풍탁(占風鐸: 바람이 부는 것을 알기 위해 쓰던 방울)에서 딸랑딸랑 소리가 났다.
“그럼 아씨, 정말 왕 공자와 혼인하시려고요?”
반근이 주저하다가 또 물었다.
“반근, 지금 나한테 가장 부족한 게 무엇인 것 같니?”
정교랑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질문하시는 건가? 난 생각하는 걸 제일 못하는데…….
반근은 긴장한 채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겼다.
도련님들께서 떠나셨고, 짜증 나고 성가시게 굴지만 가끔은 우릴 지켜 주던 주육낭도 떠났다. 주 노야 일가와는 예를 지키되 가까이 지내지는 않고…….
“사람이 없죠.”
반근이 떠보는 투로 대답하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없지. 집이 없어.”
정교랑이 손을 펴서 내밀었다. 혈육이 있으나 가깝지 않으니, 집이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반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왕 공자가 정말 아씨한테 집을 줄 수 있을까?
정교랑이 웃었다.
“내가 원하는 집은, 깨부수고 나서, 내 뜻대로 다시 합칠 수 있는 집이야.”
정교랑이 펼쳤던 손을 꽉 쥐었다.
“그 집은, 단순한 집이 아니야. 뿌리가 깊고 잎이 무성한 가족이 필요해. 날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가족 말이야. 그 사람이 적당해.”
반근은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했지만, 아씨께서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일이 아니라 이득을 보고자 결정한 일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놓였다.
“아씨께서 계시는 곳이 소인의 집이에요.”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교랑은 말없이 미소만 짓고는 찻잔을 내려놓고 책을 들었다. 반근은 조용히 찻잔을 정리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소 부부가 방문한 것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였다. 전에는 진십팔랑과 진단랑처럼 동년배끼리만 왕래했기에 진소 부부가 정교랑의 저택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며 금가아에게 진소 부부를 맞이하도록 하고, 정교랑에게 고하러 갔다.
진소 부인은 대청으로 들어가지 않고 진단랑의 손을 잡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단랑한테 들으니 여기 활을 쏘는 곳이 있다던데, 구경해도 될까?”
자리를 비켜 주려는 건가? 시녀는 얼른 일어섰다.
“절 따라오세요, 부인.”
시녀는 반근에게 차를 올리게 하고, 진소 부인과 진단랑을 뒷마당으로 안내했다.
대청에는 진소와 정교랑만 남았다. 반근은 차를 올린 후 문가로 물러나 꿇어앉았다.
“실은 낭자를 경성으로 청해 올 무렵, 우리가 병주로 사람을 보내 낭자의 이력을 알아봤습니다.”
진소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냈다.
“이해해 주십시오, 낭자.”
“당연한 일이에요. 저 역시 기회가 됐다면 알아봤을 거예요.”
정교랑이 진소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알아낸 게 있나요?”
진소가 서찰을 한 통 꺼내 내밀었다.
“낭자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남긴 서찰입니다.”
작가의 말: 당나라 에 ‘기왕(歧王)의 궁에서 대나무 숲에 옥 조각을 걸어 놓았다. 밤이면 옥 조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이를 ‘점풍탁’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풍경(風磬)과 유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