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66
교랑의경 266화
진씨 가문은 누군가가 정교랑의 병을 고쳐 주고, 의술을 가르쳤다고 여겨 왔다. 정교랑은 그 점을 알면서도 딱히 부인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비술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자신조차도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의문이 드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쭉 자신을 따랐던 반근조차도 그에 관한 기억은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소가 사람을 찾아내 서찰까지 받아 왔으니 놀랄 수밖에.
정교랑에게는 병이 낫기 전의 기억이 없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존재했던 걸까? 정말 그 사람이 병을 고쳐 준 걸까? 머릿속에 있는 이 어지러운 기억들도 그 사람이 넣어 준 걸까?
반근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어떤 사람인데요?”
반근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마흔 남짓한 서생입니다. 도관 근처에 머물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고,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더군요. 의술을 좀 알아서 병을 고치고 약도 지어 줬고요.”
진소의 말에 정교랑이 반근을 쳐다봤다.
“네, 그런 사람이 있긴 했어요. 다들 노(路) 수재라고 불렀죠.”
반근은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 듯했다.
“아, 참. 유모가 아플 때도 그 사람이 약을 지어 줬어요.”
노 수재? 정교랑의 기억 속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이 내 병을 고쳐 준 거야?”
정교랑이 물었다. 진소도 반근을 쳐다봤다.
“아니에요. 원래 거기 사람도 아닌걸요. 유모가 병을 얻은 후에야 오기도 했고요.”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도관엔 한두 번 정도 왔던 것 같아요. 유모의 병을 고쳐 주러 왔던 건데, 나중에 유모의 병이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안 왔어요. 유모가 세상을 뜬 후로는 본 적도 없고요. 그 기간이 한 일 년 남짓 됐던 것 같은데, 아씨의 병을 고쳐 준 일은 없어요.”
없다고? 저 애는 가장 가까이에서 정 낭자의 시중을 들었는데, 접촉한 일이 없다고 하다니.
진소가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봤다.
“아님, 제가 잘 모를 수도 있고요.”
반근이 얼른 덧붙였다.
“유모의 병을 치료해 줄 때, 아씨도 옆에 같이 계셨거든요. 그 사람이 아씨를 보고, 유모에게 약을 처방해 주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반근은 자신을 자책했다.
“그때만 해도 유모가 아씨를 보살폈거든요. 먹고 입는 부분에선 소인이 딱히 한 일이 없어요.”
고개를 가로저으며 잠자코 있던 정교랑이 손을 뻗어 서찰을 들었다. 서찰을 빤히 보면서도 왠지 주저하는 듯했다.
이 안에, 잃어버린 기억이 있으려나?
“그럼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앞으로는 낭자의 일에 대해 알아보는 일이 없을 테니, 그 점은 안심하십시오.”
진소가 일어나며 작별을 고하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진소 부부의 배웅을 마친 시녀가 돌아왔다. 정교랑은 서찰을 손에 든 채로 여전히 대청에 앉아 있었다.
“저게 뭐야?”
자리에 없었던지라 자초지종을 모르는 시녀가 반근에게 물었다.
“진 대인 말씀으로는 아씨의 스승님이 남긴 서찰이래.”
반근의 대답에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씨의 스승님?”
“나도 잘 모르겠어. 아무튼 누가 진 대인을 통해 아씨한테 전한 거래.”
시녀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시녀와 반근은 대청을 쳐다봤다. 대청에 있던 정교랑이 서찰을 열었다.
종이에 쓰인 건 단 한 문장이었다.
‘넌 누구지.’
난 누구지? 난 누구야?
서찰을 읽은 정교랑은 물이 고여 있던 머리가 펑 하고 터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씨, 차를 더 올릴까요?”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서찰을 들여다보고 있는 정교랑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새로 만든 간식을 드셔 보시겠어요?”
반근도 물었다.
“어떤 새로운 간식을 만들었는데?”
시녀가 궁금한 듯 물었다.
“또 이상해서 못 먹는 건 아니지?”
“언니, 무슨! 어디가 이상해?”
반근이 따지자 시녀는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아씨, 얘가 지난번에 만든 그 간식 이상했죠?”
시녀가 정교랑을 보며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반근과 시녀를 쳐다봤다.
“난 누구지?”
정교랑의 말에 시녀와 반근은 멈칫했다.
“네?”
두 사람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난 누구야?”
정교랑이 다시 물었다.
난 누구지?
시녀와 반근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뜻이지?
시녀와 반근이 막 대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여인의 두 눈이 뒤집히더니 여인이 그대로 쓰러졌다.
대청에서 흘러나온 여자들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마당의 하늘을 갈랐다.
“어떻게 된 일이래요?”
주 부인이 밖으로 나가는 주 노야를 보며 다급한 투로 물었다.
“병으로 쓰러졌다는군.”
주 노야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으며 대꾸했다.
“멀쩡하던 애가 왜 갑자기 쓰러져요? 자기가 신의인데, 어떻게 갑자기 쓰러지죠?”
“진 상공이 다녀간 후, 의식을 잃었다고 했소.”
“진 상공이요?”
주 부인이 소리를 빽 지르며 일어섰다.
“원수를 갚은 건 아니겠죠?”
“원수는 무슨 원수!”
주 노야가 인상을 쓰며 호통을 쳤다.
“무슨 원수냐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린 똑똑히 알잖아요! 당신, 그 애랑 둘이서 뭐 하느라 바삐 돌아다녔어요? 탈영병들 일 때문이었죠? 듣자니 진 대인이 탈영병을 문제 삼아 서북 군무의 죄상을 지적하려 했는데, 탈영병이 석방됐다면서요. 다들 진 대인이 이번에 크게 낭패를 봤다고 하던데요.”
주 부인의 말에 주 노야는 어안이 벙벙했다. 부인이 알아서 안 될 일은 아니었지만, 한 번도 얘기를 꺼낸 적 없었는데 부인은 나름대로 정보를 수소문해 다 알고 있었다. 어느 정도 더해지거나 빠진 이야기가 있고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사실과 일치했다.
이 일이 최종적인 결과가 어쩌다 그렇게 나온 건지는 주 노야 자신도 몰랐지만, 탈영병이 석방된 것만 봐도 외조카가 중간에서 뭔가 손을 썼다는 사실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진 상공이 크게 낭패를 보긴 했지. 그래서 단죄하러 왔던 건가?
주 노야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렇다면, 교교가 진 상공을 해치울 승산은 얼마나 되지? 순간 오싹 소름이 끼친 주 노야는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후려쳤다.
이런 우라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일단 상태가 어떤지부터 가서 봐야지.”
주 노야가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진안 군왕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탁자 위로 무겁게 떨어졌다.
“의식을 잃어 못 깨어난다고?”
그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의원이 여럿 다녀갔지만 무슨 병인지도 진단을 못 하고 있습니다.”
내시가 나지막이 고하자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전하.”
내시가 막아서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멈췄다.
“요 며칠 너무 자주 나가셨습니다. 태후마마와 폐하께서도 전하께서 어디를 가시는지 하문하셨고요. 적당히 둘러대긴 했지만 지금 또 나가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더는 속이기 힘들어요. 마마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정 낭자한테도 안 좋습니다.”
진안 군왕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밖에는 그래도 빛이 남아 있었지만 실내는 햇빛이 거의 사라진 후라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어둑해지는 빛을 바라보는 소년의 어두운 얼굴에 내시 역시 기분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황족 신분은 더없이 존귀하면서도 아무 자유가 없는 몸이었고, 황궁은 더없이 존귀하면서도 아무 자유가 없는 곳이었다.
“전하께서 지금 가셔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소인이 지켜보다가 새로운 소식이 있으면 바로 전하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말없이 서책을 들고 다시 서책에 고개를 박았다. 내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발소리를 죽여 물러났다.
“소인이 직접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내시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다시 한번 말했다. 진안 군왕은 책에 몰두한 채 대꾸하지 않았다.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전부 머릿속에 각인시키려는 듯했다.
내시는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아침 해가 뜨고 날이 훤히 밝을 무렵, 정교랑 저택의 대문이 열리더니 주 부인이 급히 나왔다.
“약 잘 먹여라. 난 노야와 상의해서 의원을 더 찾아볼게.”
주 부인은 반근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여종의 부축을 받아 허둥지둥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반근은 대문간에 서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새빨간 두 눈은 이미 퉁퉁 부어 있었다.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자 시녀가 침상 위에 누운 아씨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고, 한 손으로 주전자의 약을 먹이는 모습이 보였다.
약은 대부분 입으로 들어가지 않은 채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시녀는 손수건으로 닦아 주며 계속해서 약을 먹였다.
반근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주 부인은 가셨어.”
반근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갔다는 표현보다는 도망쳤다고 하는 게 맞겠지……. 최대한 피하고 싶다는 표정이 감춰지지 않았으니까.
“갈 테면 가라지.”
시녀가 반근을 보며 소리쳤다.
“울긴 뭘 울어. 그 사람들 없어도 우리가 있잖아. 아씨께선 무탈하실 거야. 어서 와서 아씨나 부축해.”
반근은 얼른 눈물을 닦고 달려와 꿇어앉았다.
허둥지둥 마차에서 내린 주 부인이 안으로 들어갔다. 대청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주 노야는 부인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랐다.
“왜 돌아왔소? 교교가 깨어난 거요? 좀 어때? 별일 없지?”
주 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내가 보기엔 좋아지긴 글렀어요.”
“뭐라고? 죽을 것 같소?”
주 노야는 금방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나갈 기세였다.
“반응이 전혀 없어요. 약을 먹여도 넘기질 못하고요. 의원이 여럿 다녀갔는데 다들 몸은 아무 문제 없다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대요. 의식이 없으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라나. 산송장이 뭐겠어요? 또 어릴 때처럼 지각이 없는 바보로 돌아갔단 거잖아요”
또 바보가 됐다고? 주 노야는 경악했다.
“이 망할 진씨 놈들! 우리 교교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주 노야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내 당장 가서 따져야겠소!”
“거기 서요!”
주 부인이 얼른 일어나 다급하게 붙잡았다.
“미쳤어요, 거길 가게? 거기 가서 뭐 하려고요? 말 몇 마디 하고 서찰 한 통 건넨 일로 애가 죽게 생겼다고 하게요? 말이라도 새어 나가 봐요. 그 말을 누가 믿어요?”
하긴, 누가 믿겠나. 유 교리가 여인의 말 몇 마디에 풍질을 얻어 초주검이 됐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주 노야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진 상공은 여전히 진 상공이에요. 그 애는 이제 바보가 됐고요.”
주 부인이 천천히 말했다.
바보 시늉을 하는 사람은 두렵지만, 진짜 바보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주 노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여인이 아직 살아 있다면, 아무리 큰일을 벌이겠다 한들 지시하는 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서 훌륭한 의원이나 더 찾아보시오.”
주 노야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근심 어린 표정으로 말하고는 몇 걸음 서성이다가 도로 자리에 앉았다.
오 관리인이 대청을 나오자 시녀가 뒤에서 배웅했다.
“외숙부님은 왔다 가셨고?”
오 관리인의 물음에 시녀는 냉소를 지었다.
“오는 게 더 이상하죠. 의원을 청하러 갔다고 전갈이 오긴 했는데, 어디 가서 의원을 청해 오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하루 종일 코빼기도 안 보이니 말이죠.”
“서두를 것 없어. 내가 아는 의원이 하나 있는데, 특히 난치병에 용하거든. 내가 가서 모셔 오지.”
오 관리인의 말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아씨를 돕는 게 곧 나 자신을 돕는 거야. 수고라니 당치도 않아.”
다른 이들은 아씨가 없어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은 구경만 하고 있어도 되겠지만, 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허둥지둥 문을 나서는 오 관리인의 모습을 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다시 대청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