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268
교랑의경 268화
“정 낭자는 진 노태야의 병을 고쳤으면서도 이 댁에 의탁하지 않고, 빠르게 경성에 자리를 잡았죠. 낭자의 재산을 노리던 이들은 죽거나 불구가 됐습니다. 무뢰배에서부터 유 교리에 이르기까지, 대인을 놀라게 한 일이 여러 번이었죠. 대인은 놀라는 동시에 내심 염려가 됐을 겁니다. 저렇게 감쪽같이 살인을 행하는 여인이라면, 경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셨겠죠. 먼 훗날, 언젠가는, 대인의 차례가 올지도 모르니까요.”
진십삼은 진소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속도는 느렸지만 소년 특유의 맑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진십삼의 말을 따라 지난 일들이 진소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인과 고 통사가 오랫동안 싸워 온 일이 그런 식으로 결론이 날 거라고 말입니다. 다 이겼다고 득의양양했는데 영문도 모르고 내키지 않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모든 건, 그 어린 낭자가 이 일에서 제삼자였던 장강주 선생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후 만들어 낸 결과였고요. 여러 사람이 그 오랫동안 공들여 계획한 일을 말 한마디로 망칠 수 있는 사람이죠. 그 여인 때문에 목숨을 잃고 앞길을 망칠 사람이 앞으로는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 여인이라면, 두려울 수밖에요.”
진십삼이 미소를 지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병을 얻어 의식을 잃었다면, 대인께서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시지 않았을까요?”
서책을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로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 있던 사환들이 놀라 얼른 자리를 피했다.
“소인배의 심보군!”
진소가 노기 띤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나 진소는 올곧고 떳떳하게 행동했다. 너 같은 어린애의 억측을 무서워할 성싶으냐?”
진십삼은 잠자코 공수의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듣고 보니, 그 일은, 정말 너희가 은밀히 꾸민 짓이었구나.”
뒤에서 진소의 목소리가 들리자 진십삼은 고개를 멈추고 돌아봤다.
“은밀히 하는 일만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정 낭자가 나으면 곧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어떤 일들을 하는지요.”
말을 마친 진십삼은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서재에 남은 진소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녀석이!”
진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마차를 준비해라.”
문밖에 시립해 있던 사환은 네 하고 대답한 후 얼른 뛰어갔다. 진소 역시 지체하지 않고 서재를 나와 안채로 향했다.
한편 진 상공 댁으로 따지러 달려왔던 시녀는 안에서 나오는 진십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그 서찰이냐?”
진십삼이 물었다.
“어, 어떻게 아셨어요?”
시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서찰을 쳐다보며 놀라 물었다. 진십삼은 서찰을 홱 낚아채 펼쳐 보았다.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일이 생기면 내 사환을 찾아가라고 했는데, 왜 안 갔어?”
소년은 여느 때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표정이 아니었다. 어두운 표정이었다. 시녀는 순간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일이 생기거든 주씨 가문으로 찾아가도 된다. 주육낭이 떠날 때 두고 간 사환도 문간에 있어. 그 애한테 말해도 돼. 그 애가 나한테 소식을 전할 거다.”
진십삼은 시녀의 대답도 듣지 않고 서찰을 도로 쥐여준 다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시녀는 네, 하고 대답하며 진 상공 댁의 대문과 진십삼을 번갈아 쳐다봤다.
“가서 네 아씨의 시중을 들거나 점포나 잘 살펴라. 나머지 일은 나한테 맡기고.”
진십삼은 뒤도 안 돌아보고 훌쩍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더니, 시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말을 몰아 자리를 떴다. 시녀는 어, 어, 하며 붙잡으려 했지만, 소년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 낭자한테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내가 요즘 선생을 새로 청해 글공부를 배우느라 집을 비울 때가 많습니다. 날 찾을 일이 생기거든 우리 집 문간으로 와서 전하면 돼요. 내가 당부해 두었습니다.
소년의 말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별 뜻 없이 지나가는 투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짜였구나. 시녀는 한숨을 내쉬며 진 상공 댁의 대문을 올려다본 다음, 콧방귀를 뀌고 홱 뒤돌아 자리를 떴다.
왕십칠의 시종들이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가뜩이나 심기가 편치 않던 왕십칠은 더욱 화가 치밀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큰일은 내가 났다. 다 죽게 생겼어!”
“공자님, 공자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게 아니라 정씨 가문 낭자가 죽게 생겼어요.”
뭐라고? 왕십칠은 허리를 곧추세웠고, 다른 시종들도 자세를 똑바로 하여 섰다.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멀쩡하던 사람이 죽긴 뭘 죽어?”
“네, 앞으로 떠날 일에 대해 상의하려고 방금 찾아갔는데, 밖에서 막더라고요. 사람이 여럿 왔는데 병이 났다고 했습니다. 무슨 병인지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전 못 들어가게 했고요. 보통 큰 병이 아닌 듯싶습니다.”
병이 나? 그럼 안 돌아가는 건가? 왕십칠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래, 어서 가 봐야겠다.”
“공자님, 가시면 안 됩니다. 병자와의 접촉은 금기시하는 법입니다.”
나이 든 시종이 엄숙한 얼굴로 왕십칠을 막으며 다른 시종에게 명했다.
“넌 어서 가서 무슨 일인지 알아봐라. 무슨 병인지 확실히 물어봐.”
지목을 받은 시종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잘 살펴라. 진짜 병이 난 거면 우리가 기다려야지. 아픈 사람을 데리고 출발할 순 없잖아.”
왕십칠의 당부에 시종은 다시 한번 네 하고 대답했다.
고 아범은 한쪽 옆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왕십칠의 생각을 훤히 아는 그였다. 대충 눈감아주며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일도 있다.
정씨 가문 낭자가 정말 병이 났다면, 당연히 절대 데려갈 수 없다. 함께 길을 오르는 건 고사하고 혼사 역시 없던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어차피 공자를 달래고 비위를 맞춰 주기 위해 추진했을 뿐 진지하게 여긴 혼사는 아니었다. 병이 나서 쓰러졌다면 공자도 마음을 접을 테니 차라리 잘된 일 아닌가.
“좀 어떻던가?”
방에서 나오는 의원을 보며 대청에 있던 진(秦) 부인이 다급히 물었다.
“부인, 저로서는 역부족입니다.”
백발의 의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부족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진 부인이 물었다.
“몸에는 이상이 없고, 의식만 못 찾을 뿐입니다. 마음의 병이지요. 마음의 병엔 마음의 병을 치료할 약과 의원이 필요합니다.”
백발의 의원이 손을 내저었다.
“마음의 병이라니? 병이 났으면 무슨 병인지 말을 해야지, 왜 죄다 마음이니 정신이니 하는 소릴 늘어놓는 게야.”
진 부인이 부채를 탁 치며 말했다. 이 늙은 의원도 경성에서는 이름깨나 날리는 명의였기에, 진 부인의 말을 듣고는 예의를 벗어던지고 딱 잘라 말했다.
“부인, 어쨌든 전 못 고칩니다. 다른 고명한 의원을 찾아보시지요.”
의원은 약상자를 챙기며 인사를 올렸다. 몸종과 여종이 어, 어, 하며 붙잡으려 했다.
“관둬라. 가게 둬.”
진 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휘장 뒤에서 여인이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리자, 진 부인이 얼른 들어갔다. 진십삼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침상 위의 정교랑을 보고 있었다.
“좀 어떠냐? 정신이 들었어?”
진 부인이 물었다. 정교랑 옆에 있던 반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속 중얼거리기만 하세요.”
반근의 눈가는 눈물로 촉촉했다.
진 부인이 다가가 침상 옆에 꿇어앉았다. 침상 위 여인의 낯빛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듯이 누워 눈을 꼭 감고 있으니 전처럼 무뚝뚝해 보이지는 않았다. 가끔 입술을 달싹였다. 반근의 말대로 ‘넌 누구지’, ‘난 누구지’ 하는 소리인 듯했다.
넌 누구냐는 말 한마디에 사람이 쓰러져 이 지경이 될 수도 있는 건가?
“자기가 누군지 궁금하고 자기가 누군지 물으려 했다면, 마음이 있단 뜻이구나.”
진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마음이 있다면 구할 수 있어. 내가 다른 의원을 찾아보마.”
반근이 엎드려 절을 올렸다.
“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반근은 울며 머리를 연신 조아렸다.
“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은혜라고 할 것도 없지. 받은 걸 갚는 거야. 너희 아씨나 잘 모셔.”
진 부인은 침상 위에 누운 정교랑을 힐끔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기다가 진십삼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진 부인이 뭐라 하기도 전에 진십삼도 자리에서 일어나 한발 먼저 밖으로 나갔다.
“넌 공부하러 가거라. 학업을 그르쳐선 안 돼.”
진 부인이 따라 나오며 말하자 진십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학업에 방해될 일은 없을 겁니다.”
진십삼이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열심히 공부할 거예요.”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래야 관직에 나갈 테고, 그래야 남들과 경쟁할 수 있고, 그래야 저 대단해 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여인을 지켜 줄 수 있으니까.
두 모자가 대문을 나서는데 대문 앞에서 젊은 시종 하나가 금가아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남세스러운 병이기에? 왜 못 들어가게 하는 거냐?”
“우리 아씨는 남세스러운 병이 아니라, 그냥 병이 나신 겁니다. 성가시게 굴지 마요.”
“이 조그만 자식이, 내가 누군지는 아냐?”
“네가 누군데?”
진십삼이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돌리자 여종과 몸종에 둘러싸여 나오는 부인과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잠시 생각하던 시종은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주씨 가문 부인이시죠?”
시종은 소년의 몸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저는 아씨의 정혼자인 왕씨 가문 사람입니다. 아씨께서 병이 나셨다기에 특별히 문병을 왔지요.”
소년의 준수한 외모는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였다. 그날 천가에서 정씨 가문 낭자와 함께 있던 사내가 바로 이 소년이었다.
공자님께서 정 낭자의 사촌 오라비라 했으니, 주씨 가문의 도령이리라. 정 낭자가 병을 얻었으면 외숙 댁에서 살피러 오는 게 지당한 일이니, 이쪽 부인은 주 부인이겠지.
정말 정혼자가 있었어? 진 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시종을 훑어봤다.
“병이 났단다. 와 줘서 고맙구나. 들어가 보진 않는 게 좋겠다.”
시종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외람되오나 부인, 정 낭자는 무슨 병입니까?”
“별거 아니다. 며칠 쉬면 나을 거야.”
진 부인은 짧게 대꾸하고는 더 상대하기 귀찮은 듯 걸음을 옮겼다. 시종이 진 부인의 앞을 막아섰다.
“부인, 무슨 병인지 저희를 속이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몹쓸 병에 걸렸는데 숨기는 것도 칠거지악을 범하는 일이니까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 부인이 화를 벌컥 냈다.
“따귀를 쳐라.”
옆에 있던 여종이 즉시 달려들어 따귀를 두 대 후려쳤다. 시종은 미처 방어도 못 한 채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주 부인, 왜 이러십니까? 저는 왕씨 가문의…….”
“뭐 하는 놈이기에 감히 우리 부인의 길을 막는 게냐!”
여종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썩 꺼져라!”
욕을 먹은 시종은 다시 한번 뒷걸음질을 쳤다. 부인은 여종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고, 소년은 시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마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오만방자한 주씨 가문이로다! 시종은 열이 받아 부들부들 떨었다.
정씨 가문 사람들의 말대로 거칠고 무례하기 그지없군! 시종은 고개를 돌려 정교랑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숨고 피하며 보이지 않겠다 이거지? 남세스러운 병이 틀림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