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34
교랑의경 434화
“노야.”
주 노야의 서재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부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벌컥 열렸다. 흥분한 표정으로 들어온 주 부인이 주 노야와 주육낭의 말을 끊었다.
주 부인의 시선이 탁자로 향했다. 탁자에는 상소문을 쓸 종이가 놓여 있었고, 주 노야의 손에는 붓이 들려 있었다.
“뭘 쓰려고요? 대체 뭘 쓰게!”
주 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아녀자가 이 무슨 짓이오?”
주 노야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탄핵 상소를 쓰려는 거죠? 그걸 써서 뭐 하게요? 거리에 인심이 흉흉해요. 노정의 일로 불똥이 튀어 어사대에서 잡으러 올까 봐 벌벌 떤다고요. 내가 다 알아봤어요. 전부 다 그 애가 한 짓이라고 밝히고, 우리는 선을 확실히 그어야죠. 왜 죽을 길을 스스로 찾아가려는 거예요!”
주 부인이 악을 썼다.
“어머니, 그리 심각한 건······.”
주육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 부인은 주육낭의 따귀를 후려쳤다. 주 노야까지 어안이 벙벙해졌다.
서재 안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을 세우라고 서북에 보낸 거야. 그 여인을 위해 집안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라고 보낸 게 아니라!”
주 부인이 울며 소리를 질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주 노야가 분통을 터트렸다. 따귀를 맞은 건 아들이지만, 이는 주 노야의 얼굴에 따귀를 날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 노야가 손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래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육낭이 왜 이러는지는 알아요. 너 양심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주 부인이 주육낭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그 여인이 아니었다면, 네가 그렇게 나서서 입을 열었겠어?”
잠시 침묵하던 주육낭이 입을 열었다.
“아니요.”
“거봐, 아니라면서 무슨······.”
주 부인은 기가 막혔다. 주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육낭이 말을 잘랐다.
“어머니, 그 여인이 아니라 정교랑입니다. 고모님의 딸이고, 우리 주씨 가문의 친족이라고요. 우리는 평생 그 애와 함께할 수밖에 없어요. 정교랑이 잘되면 우리도 함께 영광을 누리고, 정교랑이 잘못되면 우리도 좋을 게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 선을 그으려 해도 그을 수 없어요. 지금은 그럭저럭 넘어가더라도, 훗날 숙청되고 말 겁니다.”
“그렇게까지 될 일도 아닌데, 기어이 그 애 옆에 붙으려고 하니까 그렇지.”
주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둘 다 아쉬우니 그런 거잖아. 그냥 포기하면 그만인데. 버리면 그뿐이야.”
“어머니, 염려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겁니다.”
주육낭이 앞으로 다가가 주 부인 옆에 꿇어앉았다.
“어떻게 아무 일이 없어? 이렇게 큰 일이 벌어졌는데. 괜히 칼잡이로 쓰이는 거야. 누가 이기든 백성을 부추기고 선동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텐데, 조정에서 그런 자를 가만두겠어?”
주 부인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지만, 주육낭은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어머니도 그걸 아시네요.”
“지금 웃음이 나와?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 내가 이래 봬도 경성에서 지낸 게 몇 년인데.”
주육낭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걱정 마십시오. 정교랑은 칼이 아니라, 칼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 칼로 자기편을 해칠 리 없어요.”
초조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주씨 저택과 달리 황궁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진안 군왕의 궁은 더욱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어젯밤에 늦게 잔 데다 아침을 먹은 후 마당을 뛰어다니며 한바탕 공놀이까지 한 경왕은 피곤한지 또 자러 갔다.
경왕이 자는 시간은 진안 군왕이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서책을 들고 탁자 앞에 앉아 있으면서도 오래도록 책장을 넘기지 않았다. 전각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귀를 기울이던 진안 군왕은 아예 서책을 내팽개치고 회랑 아래로 나왔다.
“전하, 나가려 하십니까?”
수행하는 내시가 물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가로젓고, 꼼짝도 하지 않고 선 채 잠자코 바깥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혼자 있을 때면 언제나 과묵한 진안 군왕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8월 말에서 9월 초의 서늘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왔다. 그때 전각 밖에 내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시는 손에 상소문을 들고 빙긋 미소를 지으며 걸어왔다.
황제의 시중을 드는 종육품 내시관이었다. 그가 오는 모습을 본 진안 군왕은 곧 활짝 웃음을 지었다.
“전하, 폐하께서 전하께 상소문을 보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내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돌아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내시가 뒤따라 들어가자 문밖에 있던 내시가 문을 닫아 주었다.
“그 여인은 봤는가?”
진안 군왕이 돌아서며 물었다. 내시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며 웃고 있었다.
“전하, 소인이 하는 일인데도 마음이 안 놓이십니까?”
내시가 상소문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마시고 우선 이것부터 보시지요.”
그러고는 수다스러운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하, 이러시는 거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지난번에도 폐하 안전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가 다른 이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셨습니까. 또 무슨 약점이라도 잡히면 큰일입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손을 뻗어 상소문을 받았다.
“큰일 나면 나라지. 무슨 대수라고.”
진안 군왕이 다시 재촉했다.
“어떻게 됐는가? 그 낭자를 보긴 했어?”
“봤습니다.”
“전해 줬고?”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묻자 내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던가? 슬퍼했어? 아니지, 아니지. 슬퍼도 겉으로 드러낼 사람이 아니야. 그럼······ 그 낭자가, 어때 보였는가?”
소년이 밝은 얼굴로 두서없는 질문을 해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시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전하, 어린 낭자가 집 밖으로 나왔습니다. 게다가 목적지는 어사대였고요. 얼굴을 안 가렸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가 곧 실소를 터트렸다.
“수고했네, 공공.”
진안 군왕이 입을 다물자 도리어 내시가 궁금한 듯 물었다.
“전하, 겁내지는 않더냐고 물으시는 게 맞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은 웃으며 탁자 앞에 앉아 상소를 펼쳤다.
“겁낼 여인이 아니다.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거든. 그저······ 가끔 좀 슬플 뿐이지.”
내시가 천천히 물러나 문을 닫았다.
한편 같은 시각 어사대.
단상에 앉은 어사가 아래에 선 이들을 보며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너희 같은 평민 신분으로 여기 선 이는 너희가 처음이다. 여긴 관료들만 올 수 있는 곳이거든. 그러니 영광인 줄 알아라.”
물론 이런 영광을 원하는 이는 없겠지만.
웃음기를 거둔 어사가 경당목을 탁 내리쳤다.
“범강림, 네 죄를 알렷다!”
“소생은 모릅니다.”
“노정과 어떻게 아는 사이지?”
“소생은 모르는 이입니다.”
어사대 대청에서 묻고 답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는 안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들으려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북향으로 지어진지라 어사대 관청의 실내는 대체로 어두웠다.
자리에 앉은 어사중승은 오늘 어사대가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밖에서 또다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인, 동 내한께서 오셨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더니, 키 크고 풍채 좋은 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자문(子文) 아우, 오랜만일세.”
어두운 실내에 쾌활한 사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은 어사중승의 관직이 동 내한보다 높지만, 어사중승 역시 한림원 학사 출신인지라 동 내한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다만 어사중승의 자리가 자리다 보니 다른 신료들과 조금 소원해졌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자문은 동 내한을 향해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이 드릴 말씀입니다. 중정(中正) 형님은 요즘 얼굴 한번 뵙기 힘듭니다그려.”
“내가 몸이 좀 안 좋았잖나.”
동 내한이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동 내한은 시원시원한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말을 돌리다가 한참 만에 본론을 꺼내던 이전 두 사람과 달리 동 내한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사중승이 미소를 지었다.
어사대에서 조금 떨어진 관청 안에 있는 고능준 역시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창피해할 일도 아니지. 진시황이나 한무제도 신선이 되는 방법을 구하려 하지 않았던가. 신의 낭자가 바로 눈앞에 있어. 허황된 소문이 아니라고. 그러니 다들 공손하게 대할 만도 하지.”
고능준의 말에 측근들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고능준은 손에 들고 있던 상소를 탁자로 집어 던지며 말을 이었다.
“와서 편들어 줄 사람이 많을수록 좋아. 거리에 나가 소문을 내게. 무려 신의 낭자를 붙잡아 왔으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잖나.”
측근들이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어사대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각종 추측과 소문이 새어 나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소문 들었어? 정 낭자가 잡혀갔대.”
“이렇게 원통한 일이 있나. 전사한 이들한테 공로를 챙겨 주지는 못할망정, 가족이며 지인들한테도 화를 입히다니.”
“신의 낭자는 도조 진인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인데, 천벌이 두렵지도 않나.”
“가세. 어서 구경하러 가자고. 도조 진인께서 현현하실지 몰라.”
누가 먼저 제안한 건지 찻집에 있던 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분명 고능준의 사람이 여기저기 소문을 퍼트린 거야.”
주육낭의 말에 진십삼 역시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큰일이군. 신선이 부처니 하는 말로 감정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그러길래 병을 고치지 말았어야지!”
주육낭이 못마땅한 투로 대꾸했다.
“그래서 세 가지 원칙을 세운 거야.”
진십삼이 주육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 말을 이었다.
“세상만사는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있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순 없는 법이지. 그땐 병을 고치는 일로 그 여인이 득을 본 게 더 많아.”
“그럼 지금은?”
주육낭이 물었다.
전사한 다섯 형제에 대해 만백성이 울분을 터트리고 욕을 해대는 건 황제에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백성이 신의 낭자를 떠받들고 추앙한다면 황제의 눈에 달리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동씨 가문과 팽씨 가문에 이어 수많은 이가 어사대로 달려가 음으로 양으로 사정을 알아보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진소가 말했다.
“이번 일을 노정의 잘못으로 돌리려는 게지. 정 낭자 일행은 노정한테 이용당했을 뿐이니, 이번 일과 무관하다는 건가?”
진 노태야의 물음에 진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아버지도 어서 가서 정 낭자를 도와주세요.”
진십팔랑이 불쑥 끼어들었다. 진소가 진십팔랑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능준도 그리 생각할 거다.”
진십팔랑은 멈칫하며, 자신의 말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은혜를 입으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기 마련이지.”
진 노태야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천자께서 가장 겁내는 게 바로 은혜지 않느냐.”
이 세상에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건 천자 한 사람뿐이어야 했다. 누구든 그 일을 함께 나누려 들면······.
“그 낭자가 단칼에 베어 버린 영덕 대사처럼 조만간 누군가의 칼에 목이 잘리겠죠.”
진소가 말했다.
영덕 대사는 또 누구지? 사람은 또 언제 죽인 거야?
진십팔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부친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번 일이 정말 그렇게까지 커진 건가? 그냥 의남매들의 장례를 치르고 안장한 거 아닌가? 그 정도는 인지상정인데.
“이게 바로 앞으로 나선 결과다. 앞으로 나서지 않으면, 아무도 널 볼 수 없어.”
진소가 말했다.
“그 말은 틀렸다. 사람이 평생 뒤에 숨은 채로 살 수 있겠느냐? 앞으로 나섰다면, 나설 만큼 자신감이 있어서겠지.”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그렇게까지 할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일인데 천천히 말하면 뭐 어떻습니까. 꼭 이렇게 급히 움직여야 했느냔 말입니다.”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은 큰일의 가치가 있고, 작은 일 역시 작은 일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값지다 여겨지면 값진 것이지.”
진 노태야가 말했다. 진소는 웃으며 진 노태야에게 예를 올렸다.
“그럼 소자는 값진 일을 하러 가 보겠습니다.”
부친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진십팔랑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