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61
교랑의경 461화
“소손, 마마께 죄를 청하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진안 군왕이 말했다.
“너는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태후가 진안 군왕에게 일어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이마를 땅에 대며 큰절을 올렸다.
“소손, 경왕과 함께 황궁을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위낭, 지금 애가를 탓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소손은 스스로 자책을 하는 겁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들어 태후를 쳐다보았다.
“마마, 소손은 마마와 폐하의 은총을 받기만 했을 뿐, 보답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 이미 2년, 아니 곧 3년이 지나가는데도 소손은 여전히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소손은 올해로 만 열아홉이 되었는데도 출궁하지 않고, 마마와 폐하의 비호에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마마와 폐하께서 만천하의 비웃음을 짊어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로 말입니다.”
“애가가 말하지 않았느냐. 감히 누가 너를 비웃는다고!”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호통쳤다.
“감히 어떤 놈이 애가의 집안일을 왈가왈부한다는 말이냐!”
진안 군왕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마마, 소손은 남들의 비웃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제는 저 자신이 부끄러워지려 합니다. 소손은 구석진 곳에 숨어서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소손이 피하고 숨는다고 해도, 생각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으며 보지 않는다 해도, 모든 것은 이미 변해 버렸습니다.”
“괜찮다, 괜찮아. 애가가 거처를 새로 찾아주마. 다른 사람이 절대 너희를 방해할 수 없도록.”
태후가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을 일으키려 했다. 진안 군왕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했다.
“마마, 소손은 더 이상 숨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왕이 다쳤다고는 하나, 남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존재가 된 것은 아닙니다. 소손은 경왕을 데리고 당당하게, 광명정대하게 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다시 한번 태후에게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소손, 출궁을 청하옵니다. 하오나 소손, 마지막으로 마마의 총애에 기대어 마마께 어려운 청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태후가 엎드려 있던 진안 군왕의 등을 다독이면서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태후가 끝내 눈을 감자, 눈물 두 줄기가 태후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말하거라.”
말하거라.
엎드려 있던 진안 군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고개를 들었다.
“소손, 경성에 남아 경왕과 같은 왕부에서 살기를 청하옵니다.”
“먼저 출궁을 청했다고?”
고능준이 놀란 눈으로 묻자, 수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마께서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리고는 손을 저어 수하에게 물러나라고 명했다.
“그러게, 그놈은 겉보기처럼 허술하고 생각 없는 놈이 아니라니까.”
고능준이 막료들에게 말했다.
“단번에 이 일의 관건을 알아차리고, 빠르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다니. 군왕의 심지가 만만치 않습니다.”
막료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고능준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태후와 폐하의 반응을 보자마자 경왕에 대한 애정이 예전보다 못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다니. 빠른 상황판단이야 누구나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결단력은 쉬이 가질 수 없지요. 진안 군왕과 경왕에 대한 폐하의 총애가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아예 사라졌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다른 막료가 맞장구를 쳤다.
황제의 총애가 아무리 옅어졌다고 한들, 진안 군왕과 경왕이 황궁 안에서 지내는 데에 불편함을 느낄 만한 것은 없었어. 하지만 이대로 출궁하면, 다시는 황궁 안으로 되돌아올 수 없겠지.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빠른 결단력으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판단해 내다니.
“이대로 폐하의 총애가 다할 때까지 버티는 것보다는 지금 한발 물러서는 게 낫지. 그럼 도리어 폐하와 태후께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는 모양새가 될 게야.”
고능준이 말했다.
“대인, 폐하께서 그들의 출궁에 동의하실까요? 진안 군왕이 황궁에서 지낸 세월이 십수 년인데. 아무리 폐하가 군왕의 친부가 아니라 해도, 부자지간의 정은 어느 정도 있지 않겠습니까?”
막료 한 명이 물었다.
“부자지간이 아닌데 부자지간의 정이 있을 리가.”
고능준이 냉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정말 폐하께서 그 정도로 군왕을 아낀다고 생각하는가? 폐하는 단지 체면을 위해 군왕에게 잘 대해 주시는 것뿐일세. 때마침 오성 병마사와 황성사 관리들이 이번 일을 직접 목격했으니, 진안 군왕을 내보내기엔 지금이 더할 나위 없는 시기지. 폐하께서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있겠나? 잊지 말게, 군왕은 올해 열아홉이야.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가정을 이루고 아비 노릇을 할 나이지.”
고능준이 ‘아비 노릇’에 힘을 실어 말했다. 막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와의 정을 논하자면, 우리 대황자야말로 진정 폐하와 정이 깊은 부자지간이지. 대황자도 출궁하여 왕부에 살기를 청했는데, 다른 이가 무슨 말을 하겠나?”
고능준이 말했다.
진소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황제가 결정을 내린 뒤였다.
“대황자는 평왕(平王)에 봉하여 왕부로 나가 살게 하고, 창의군 절도사로 임명한다. 경왕은 위위소경(衛慰少卿)직에 임명하여 출궁하도록 한다. 진안 군왕은 우위낭장(右偉郎將)직에 임명하고, 경왕부를 거처로 지정한다. 즉시 왕부 건물 보수를 시작하고, 보수가 끝나는 대로 각자 거처를 옮기도록 한다.”
수하가 읽어 주는 내용을 들으면서도 놀란 기색 없이 다른 상소문을 펼쳐 보던 진소가 잠시 붓을 멈추고 말했다.
“일찍이 그랬어야 하는 일이야. 여인들의 유언비어를 믿고 군왕을 오랫동안 황궁 안에서 키우다니, 그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황자들이 한꺼번에 출궁하게 되었으니, 어사대 관리들이 몹시 당황했겠습니다. 월례 보고의 내용도, 이제는 주제를 바꿔야겠네요.”
막료가 옆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사대는 늘 황자와 군왕이 오랜 시간 동안 황궁 안에 머무르는 일을 지탄해 왔다. 비록 황제는 그런 류의 탄핵에 신경조차 안 썼지만, 그래도 어사대 관리들은 끊임없이 그 일을 잡고 늘어졌다.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황자들만 도리를 어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출궁해야 할 사람들은, 황자 말고도 많지.”
예를 들면, 고능준.
아무리 종친이라고 해도, 고능준 그자도 일찍이 지방의 부임지로 보냈어야 했어. 그런데······.
“서북의 일이 우리 뜻대로 되었으니, 한동안은 폐하께서 다른 인사이동을 윤허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그러니 더더욱 고능준을 경성에서 내보낼 수 없겠지. 견제와 균형을 좋아하는 폐하께서 절대로 그를 내보내지 않을 것이야.
진소 또한 막료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자네는 어찌 그리 소문에 귀가 밝은가? 그나저나 올해는 무평(茂平) 지역의 가뭄이 더욱 심해진 모양이군.”
진소가 미간을 찌푸린 채 손에 쥔 상소문을 읽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나아지지 않았다고 합니까?”
막료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올해는 아무런 수확도 못 거둘 모양이야.”
진소가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지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칫하면 내년에 기근이 일어날 수도 있겠어. 전운사를 시켜 하루빨리 그들에게 돈과 식량을 나눠 주라고 하게. 무평 백성들이 적어도 겨울을 나고, 내년 봄에 파종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도록 해야 해.”
하급 관리는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소가 던진 상소문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9월 말, 10월 초의 경성에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우선은 경성의 폭죽 대가인 이씨 가문의 저택 반절이 불에 탄 일이었다. 순식간에 커진 불길 때문에 온 경성 사람들이 놀랐지만, 이씨 가문은 경성의 이름난 재력가답게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집을 수리하라고 목돈을 쥐여줬다. 그러고는 자기 집안의 자식을 직접 잡아들여 관청에 넘긴 덕분에 사건은 빠르게 해결되었다.
다른 하나는 황궁에 있던 이황자와 송자동자라는 별명을 가진 진안 군왕이 출궁한 일이었다. 이는 곧 황자들이 혼례를 올릴 시기가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혼담을 넣으러 가는 사람들 때문에 황궁 문턱이 닳을 정도라던데.”
“황실 문턱을 어디 자네 집 문턱처럼 그리 쉬이 넘을 수 있다던가.”
“어떤 여인이 평왕비가 될지 정말 궁금하지 않아? 폐하께서는 완평 강(康)씨 가문을 염두에 두고 계시다던데.”
“에이, 그런 소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강씨 가문이 퍽이나 황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겠다. 강씨 가문은 하루빨리 조당에 들어가 과거 강 상공의 명망을 되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황자와 혼례를 올리겠어? 그건 자신들의 앞길을 끊는 것이나 다름없지.”
경성의 찻집과 주점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한 달 사이에 다양한 일이 일어났지만, 결론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각자가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룬 듯했다.
황제는 민심을 앞세운 협박으로 다소 체면이 깎였지만, 강력한 병기를 얻은 덕에 서북에서 연달아 몇 번이나 대승을 거두었다. 진소는 주봉상을 잃은 대신 서북 전체의 군사력을 장악하게 됐다. 고능준은 이번 일에서 낭패를 보았지만, 그래도 진안 군왕을 출궁시켰으니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세간 사람들의 눈에 불쌍한 처지가 된 것은 진안 군왕뿐이었다. 더 이상 아무 필요도 없는 존재가 되어 황궁에서 버림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열아홉이나 된 송자동자라니, 어떻게 그를 계속 송자동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열아홉에도 송자동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다면, 송자의 의미가 사뭇 달라지리라.
황자들을 모두 출궁시키긴 해야겠지만, 황후나 비빈들은 그들이 황궁을 떠나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황후나 비빈들은 황자들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관저를 황자들의 왕부로 삼았다.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는 대황자와는 달리, 공부할 필요가 없는 진안 군왕은 황궁 안팎을 분주히 드나들었다. 그는 수리 중인 왕부를 사흘에 한 번씩 방문해 진행 상황을 살폈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 마음대로 출타할 수 있게 됐으니.”
진안 군왕이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과 가까운 시종만 곁에 두고, 왕부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수리를 담당하는 관리가 진안 군왕에게 공손하게 길을 안내하면서 왕부 안을 소개했다. 관리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 속으로 입을 삐쭉였다.
군왕이 영 맹하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네. 저 준수한 외모만 아깝지 뭐야.
역시 아이는 남의 손에서 길러지면 안 돼. 남의 손에 길러지니까 저런 폐인이 되는 거지.
“연못은 없어야 하니, 저곳은 전부 흙으로 메워두게. 물의 깊이를 잘 모르는 아이야. 잠시 한눈파는 사이에도 경왕이 위험해질 수 있어.”
관리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왕부를 한 바퀴 돌며 여기저기를 까다롭게 지적하고 요구사항을 말했다.
“듣자 하니, 자네들이 수리한 관저는 바람만 불어도 무너진다던데. 난 황자가 묵을 친왕부가 그렇게 허술하진 않았으면 하네.”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저렇게 대놓고 말해서는 안 되지. 폐하께서도 우리 체면을 지켜 주시는데, 저 생각 없고 철도 안 든 군왕 나부랭이가 감히 저런 말로 나를 모욕해?
관리는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도 연신 아니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한참이나 왕부 곳곳을 누비던 진안 군왕이 대문을 나섰다. 그가 문 앞에 잠시 서 있더니 좌우를 살폈다.
“전하, 환궁하시려는 겁니까?”
가까이 있던 시종이 물었다.
“거길 돌아가서 뭐 해? 앞으로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 여인의 집을 방문할 것이야.”
시종이 진안 군왕을 보며 피식 웃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