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8
교랑의경 478화
날이 저물 무렵, 정 이노야 일행은 드디어 역참에 도착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낡고 허름한 다른 역참들과는 달리 새로 지은 역참이었다.
“그때 갑자기 큰불이 나는 바람에, 조정에서 돈을 하달하여 새로 지은 겁니다.”
문지기가 말했다. 문지기는 정 이노야 일행이 건넨 역권을 받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인, 정말 죄송하지만 방이 한 개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한 개?
정 이부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정 이노야의 뒤에는 딸아이 셋과 두 첩실, 그리고 일고여덟 명의 여종들과 몸종들, 열댓 명의 시종들이 서 있었다. 마당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자, 정 이부인은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파 왔다.
“방이 없다뇨?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데, 우리더러 방 하나에 부대끼고 있으라고요?”
정 이부인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외쳤다.
“최소한 방 세 개는 더 구해 오시오.”
미간을 찌푸린 정 이노야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명령조로 말했다. 그는 행여나 역졸이 자신의 직첩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 봐, 역졸의 눈앞에 대고 직첩을 흔들며 자신의 신분을 알렸다.
“대리시 관리라고? 대리시 관리라 한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여기에 묵고 있는 이들을 내쫓기라도 하라는 것이냐?”
역졸의 말을 들은 역승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바깥을 가리키며 한 마디 덧붙였다.
“지난번에 뭐 때문에 이곳이 불탔는지 그새 까먹었느냐? 아니면, 또 한 번 불이 나야 관리들이 정신을 차릴까!”
역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요. 이자 역시 관리 신분을 앞세워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돈이라도 더 내겠단 말도 없이요.
역졸의 말에 역승은 더욱 경멸스럽다는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어떻게 방이 없을 수가 있어?”
“그러게. 여긴 역참인데 말이야.”
“역권에 직첩까지 있는데, 어째서 여기 못 묵는단 거지?”
마당의 소란 때문에 역참 안이 시끌벅적해졌다.
유모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어린아이는 울음을 터트렸고, 첩실의 옆에 꼭 붙어 있던 아이들도 추워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역참의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정 이노야 일행을 쳐다보았다.
대청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탁자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밖을 내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요즘 들어 관리들이 점점 더 건방지네. 직첩은 본인한테나 있는 거지, 처자식한테도 있는 줄 알아?”
한 젊은 사내가 투덜댔다. 젊은 사내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연로한 사내가 그를 향해 그만하라고 손짓하자, 사내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우리 노야는 정씨라고요. 이번에 대리시에 부임하려고 경성에 가는 건데.”
바깥에서 말소리가 들리자 입을 다물고 있던 젊은 사내는 실소를 터트렸다.
“저런 관리도 대리시에 간다고?”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의자가 드르륵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호위 몇 명이 하얀 피부의 뚱뚱한 중년 사내를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오. 체통을 지킬 줄 알아야지.”
중년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를 지키던 호위들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칙사께서 납시는군.”
젊은 사내의 반대편에 앉아 있던 연로한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칙사라고 불린 중년 사내를 바라보았다.
중년 사내는 역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역참 안으로 들어올 때 관례에 따라 큰 소리로 신분을 알린 터라 다들 그가 어명을 전하는 칙사라는 사실을 알았다.
칙사는 자신의 신분만 알렸을 뿐, 그 후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도록 행동했다. 자신이 묵을 상등 방 한 칸 외에는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호위들을 마룻바닥에서 자게 두었다. 먼 길을 떠나온 터라, 칙사 일행은 잠시 대청에 머물며 조촐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칙사가 나선다는 것은, 청백리가 탐관오리에게 죄를 선고하는 일만큼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기대에 찬 모습으로 문가에 다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대인, 어찌하시겠습니까?”
대청을 등지고 있던 역졸은 칙사가 나온다는 것을 모른 채 정 이노야 일행에게 느긋하게 물었다.
“아니면, 여기 묵고 있는 백성들을 내쫓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허튼소리!”
뒤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오자 소스라치게 놀란 역졸이 고개를 돌려보았다. 역졸은 호통을 친 사람이 칙사임을 알아보고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대인, 대인, 그게 아닙니다. 소인이 그러겠다는 게 아니오라, 여기 이분이······.”
잠자코 듣고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들 말단 관리가 제일 얄밉다고들 하지. 내 지금껏 관직 생활을 하면서 말단에 있는 놈들의 괴롭힘을 수도 없이 당했지만, 지나가다 마주친 역졸 나부랭이까지 날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씌울 줄은 미처 몰랐네.
“네 이놈!”
정 이노야가 역졸에게 삿대질하며 혼을 내려던 찰나, 누군가가 한발 먼저 입을 열었다.
“감히 백성을 선동하여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를 욕보이려 하다니! 네놈은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칙사가 호통을 치고는 역졸의 면상에 거침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역졸은 하마터면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를 뻔했지만, 칙사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정 이노야에게 가서 읍을 했다.
“정 대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다니, 제가 실례했습니다.”
칙사가 정 이노야에게 겸손하게 말하자, 재미있는 구경을 하겠다는 기대를 잔뜩 안고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럴 줄 알았어. 청백리가 탐관오리를 혼쭐내는 장면은 연극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저 칙사 양반이 저리 겸손하게 대할 정도면, 저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더 높은 사람인 거야?
사람들이 수군대며 추측하는 사이, 칙사는 뒤늦게 뛰어나온 역승을 몰아붙이며 매섭게 혼을 냈다.
“예, 예. 대인께서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이 지금 당장 마련해 보겠습니다.”
역승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정 이부인에게 직접 길을 안내하면서 뒷마당으로 걸어갔다.
체면을 구기지 않게 된 정 이노야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대인께서는 누구신지······.”
정 이노야가 정중하게 답례하며 물었다.
“소경문(蘇景文)이라고 합니다. 중서문하성의 공사(公事)지요.”
칙사가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소 공사셨군요.”
정 이노야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며 내심 기뻐했다.
역시 경성에서 관직을 얻는 게 좋긴 좋아. 아무나 붙잡고 인사해도 죄다 중서문하성 관리니 말이야.
“소 공사께서는 타지에서 공무를 보고 경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입니까?”
정 이노야가 물었다.
“예. 명을 받아 무평 지역의 재해 상황을 살펴보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소 공사가 웃으면서 한 손으로 정 이노야의 팔을 잡고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
“정 대인, 안으로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지요.”
소 공사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그의 호위들이 즉시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을 내쫓았다.
“비키시오. 대인들께서 공무를 논하시는 자리니, 냉큼 자리를 비키시오.”
정당한 이유다 보니, 대청 안이 분주해졌다. 곧바로 사람들 열댓 명이 대청 밖으로 내쫓기고, 탁자 다섯 개가 비워졌다. 정 이노야는 소 공사의 탁자에,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탁자에 앉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속으로 열불이 뻗쳤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좀 전의 젊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연로한 사내가 그의 어깨를 세게 눌렀다.
“아버지.”
젊은 사내가 미간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인정에는 어긋나나, 이치에는 맞는 일이다.”
연로한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두 부자가 소 공사의 탁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 이노야와 소 공사가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제가 눈이 어두워 소 공사를 미처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정 대인께서 절 모르시는 건 이상할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제가 정 대인을 몰라뵙는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정 대인께서 큰 공을 세우시지 않으셨습니까.”
“소 대인께서 농이 지나치십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십수 년간 본분을 지키며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감히 큰 공을 세웠다기에는······.”
“정 대인의 따님께서는 의형제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폐하를 알현하기도 했잖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 여식이 철없이 군 탓이지요. 이번에 경성에 들어가면, 제가 꼭 폐하께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대화를 듣던 두 부자가 서로를 마주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게다가 정 낭자는 폐하께 새로운 병기인 신비궁까지 바쳐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웠습니다. 정 낭자를 낳고 길러 준 정 대인 또한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신 게 아닙니까.”
곧이어 두 대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대청을 가득 메웠다. 대청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두 사람을 흘깃 쳐다보았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정 이노야가 웃으면서 술잔을 높이 들고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자, 자, 정 대인. 소생이 대인께 한잔 올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소 공사의 호위가 웃으며 직접 정 이노야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아이고, 당치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 이노야는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정 이노야는 온몸을 철갑옷으로 두른 호위들을 쳐다보면서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잘들 봐 두라고. 무려 천자의 친위대인 신위군이 나한테 술을 따라 준다 이거야.
변방 지역의 관리와 조정 관리의 대우는 하늘과 땅 차이였어! 천양지차라는 말이 이런 뜻이로구나.
이제부터 나 정동(程棟)은, 넓은 바다에서 뛰노는 물고기가 될 테다!
한바탕 먹고 마시니 먼 길을 달려온 고단함에 정 이노야는 금세 취기가 올랐다. 그는 먼저 일어나겠다고 예를 표한 뒤, 가족들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정 이노야가 자리를 뜨자 소 공사도 호위들을 데리고 휴식을 취하러 갔다.
한참을 추위에 떨며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대청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정 대인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칙사조차 그를 깍듯이 대하는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오. 그 사람이 정씨라는 거 못 들었소? 게다가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따님이 있다잖소.”
누군가가 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더욱 수군대기 시작했다.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그 여인을 말하는 거야? 그 여인이라면 아주 유명하지.”
“도교 이 진인께서 직접 사사한 제자라던데.”
“그럼 신선이 아니오?”
“그러니까 칙사가 저리 깍듯이 대하는 게로군.”
사람들의 이야기가 점점 더 산으로 가자, 젊은 사내가 부친에게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지요.”
연로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두 부자가 탁자의 반대편에 홀로 앉아 있던 수척한 중년 사내에게 공수의 예를 표했다.
“관인(官人),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젊은 사내가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수재, 편히 쉬시구려.”
중년 사내가 답례했다.
“관인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방을 쓰는 건 어떠신지요?”
젊은 사내가 물었다. 중년 사내는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 앞에 놓인 냉채를 젓가락으로 집어 들고 천천히 씹었다. 그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거나 누운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도 여기서 자는데, 나도 그래야지 않겠소이까.”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연로한 사내는 몇 발자국 걸음을 옮긴 후 젊은 사내에게 조용히 말했다.
“원조, 가서 저 대인의 술값을 계산하거라.”
이들은 바로 한원조 부자였다. 한 대인은 진급으로 인해 경성에 가는 길이었고, 한원조는 과거를 보기 위해 부친과 함께 경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