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79
교랑의경 479화
한원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저 대인께서 거절하실 듯싶습니다.”
한원조가 고개를 돌리고 홀로 앉은 수척한 사내를 쳐다보았다.
오늘 밤은 사람이 많은 탓에, 한원조 부자와 수척한 사내는 한 탁자에 합석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 사람 모두 말수가 적은 편이라, 간단한 인사 몇 마디를 나눈 것 외에는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다.
한원조 부자는 그 사내가 서둘러 상경 중인 관리일 거라고 확신했다. 다만 어디에서 왔는지, 뭘 하러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원조 부자는 사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거나 추측을 늘어놓지 않고 예의를 지켰다.
높은 관리에게는 아부를 떨고, 하찮은 이는 냉대하는 작은 역참에서조차 방을 얻지 못하는 걸 보면, 고위직 관료는 아닐 테고.
언행과 태도를 보아하니 몹시 강직하고 자중하는 사람이야. 원조의 말대로 이유 없는 호의를 받아들일 사람은 아니겠군.
한 대인은 대청 안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수척한 사내의 모습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도 어제 내리던 눈은 거의 그쳤고, 밤사이에 내린 눈도 두껍게 쌓이지는 않았다. 갈 길을 재촉하는 데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은 아침부터 떠날 채비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새로 바꾼 말을 보고 있자니, 정 이노야는 감격스러운 한편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저, 저, 소 대인. 어찌 감히 제가 역마를 쓸 수 있겠습니까. 저는 중요한 나랏일을 위해 길을 재촉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경성으로 가는 것뿐입니다.”
정 이노야가 말을 더듬으면서 말했다. 소 공사가 웃으면서 정 이노야의 팔을 잡았다.
“정 대인께서는 요직에 부임하고자 경성으로 가시는 게 아닙니까. 그게 어찌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명을 받들어 경성으로 가는 건데, 중요한 나랏일이고말고요.”
정 이노야가 웃음을 터트리며 소 공사의 어깨를 탁탁 쳤다.
“그럼, 대인의 호의를 감사히 받겠소이다.”
정씨 일가가 싱글벙글한 모습으로 길을 떠나자, 소 공사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소 공사 옆에 서 있던 호위가 침을 탁 뱉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퉤! 분수도 모르는 놈. 대인께서 체면 좀 세워 줬다고 감히 어딜 기어올라! 아무나 대인의 어깨를 칠 수 있는 줄 알아?”
소 공사의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서서히 걷혔다.
“뭐 하는 놈인진 몰라도, 고 대인께서 잘 보살펴 주라 하셨잖느냐. 하필 여기서 마주쳤는데, 고 대인의 당부를 무시할 순 없지.”
“고 대인도 참. 어떻게 저런 놈을 보살펴 주시려는 건지. 대인께서도 저놈을 너무 치켜세우신 것 같습니다.”
호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치켜세워야지. 암, 그렇고말고. 치켜세우지 않으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뜨리겠느냐? 어제 대청 안에서 저놈에게 불만을 품은 자가 한둘이 아닐 게다.”
소 공사가 냉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호위가 아, 하며 그제야 깨달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그래서 대인께서 일부러 백성들을 내쫓으신 거로군요. 소인은 내심 대인을 걱정했습니다. 몇몇은 꽤 까다로워 보였거든요. 관직에 있는 몸 같아 보이기도 했고요.”
“이 몸이 욕지거리 몇 마디 듣는 게 대수겠느냐? 본관은 참고 견딜 수 있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
소 공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한 뒤 몸을 돌렸다.
“자, 우리도 어서 길을 재촉해야겠다. 정 대인에게 역마를 내주었으니, 우리는 말을 바꿔서는 안 되겠다. 중요한 나랏일을 하시는 분께서 지체되면 큰일이야.”
호위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정 이노야 일행이 떠날 때는 정 이노야 일행을 구경하러 나온 이들이 역참 앞에 잔뜩 모여 있었다. 놀라워하거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고, 경외감 어린 눈으로 정 이노야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살아 있는 신선을 낳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나온 사람들로 인해 역참 앞이 왁자지껄했다.
한원조 부자는 역참 앞이 한산해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겨우 말을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때마침 어제 합석했던 수척한 사내도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야윈 말 세 필과 사환 두 명, 그리고 행낭 하나를 가진 단출한 차림으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역참 앞에 선 수척한 사내가 멀어져가는 정 이노야 일행을 내다보며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운 정 대인이라. 엄동설한에 백성들을 밖으로 내쫓고, 천자의 친위대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도 모자라, 역마로 가족이 탈 마차를 끌게 했다?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을 세운 정 대인일세. 참으로 대단한 정 낭자야.”
엄동설한에 백성들을 밖으로 내쫓고, 천자의 친위대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역마로 가족이 탈 마차를 끌게 했다······.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원조 부자였지만, 관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그들 부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또 누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을 저지른 사람은 결국 어떻게 될까.
선황제 때에는 술에 취한 재상(宰相)이 천자의 호위에게 칼을 내려놓고 술을 따르게 한 일이 있었다. 당시 그는 선황제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결국 어사대의 탄핵을 이기지 못하고 지방 관리로 좌천되었다.
지금의 황제가 등극한 후에는 설경이 아름답다는 말을 했던 관리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민가를 강제 철거했다는 이유로 관직을 잃기도 했다.
또 어느 무장은 역마로 집안 식량을 운반했다는 죄목으로 목숨까지 잃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휘말리게 된다면 꽤 골치 아픈 일들을 겪을 터였다. 심지어 세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사람이라면 그 말로는 가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이리라.
물론,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다 죽는 건 아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저런 짓을 저지르는 관리는 한둘이 아니었다. 백성들은 그런 일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듯 행동했고, 관리들 역시 대충 눈감아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굳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이고, 때로는 바로 그 예외가 가장 무서웠다.
한원조 부자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저 관리는 대충 눈감아주는 부류일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일까?
역승이 두꺼운 두봉을 들고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아이고, 풍 대인, 풍 대인! 바람이 거셉니다. 이걸 걸치시지요.”
“내 것이 아닌 것은 받을 수 없네.”
풍림은 역승이 건넨 두봉을 거절하고 유유히 역참을 떠났다.
“아이고 천지신명님, 감사합니다. 저 귀판관(鬼判官) 나리가 드디어 떠나셨네.”
“대인, 이번에는 다행히도 불이 나지 않았습니다.”
“닥치거라. 한 번 불탄 것으로 부족하더냐.”
역승과 역졸들이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역참 안으로 돌아갔다.
풍림!
한원조 부자가 놀란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풍림 대인이셨군요.”
한원조가 멀어져가는 수척한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2년 전, 삼사 판관 풍림이 어명을 받고 태창로를 조사하러 가던 길에, 누군가가 그가 묵은 역참에 불을 질러 그를 죽이려 한 일이 있었다. 화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풍림은 자신의 관을 짜서 태창로로 향했고, 그는 장장 1년 반이나 태창로에 머물며 전운사의 곡식과 자금의 흐름을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풍림은 족히 백 명에 가까운 관리들이 전운사 횡령에 가담했음을 밝혀내고 그들의 죄를 물었다. 죄인이 된 관리 중에는 감옥에 갇힌 자도 있고, 아예 자결을 택한 자도 있었다. 풍림이 태창로에 머문 기간 동안, 태창로는 피눈물을 흘리는 자들과 귀신이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이런 연유로 풍림은 귀판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저분께서도 경성으로 부임하시나 보군.”
한 대인이 고개를 저으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다면, 정 대인의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풍림은 정 대인의 모든 만행을 현장에서 목격했을 뿐만 아니라, 밤새 대청에서 사람들이 떠들어댄 이야기도 모두 귀담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풍림은 분명 화가 단단히 났을 터. 그러지 않고서야 좀 전과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풍 대인께서 경성에 들어가자마자 하실 일이 생겼네요.”
한원조가 말 위로 몸을 날리며 말했다.
“나라를 위해 대단한 공을 세웠다······.”
한원조가 숙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어마어마한 병기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의형제의 억울함을 푼 후에야 신비궁을 바치다니. 그걸 어떻게 나라를 위해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까. 관리가 자신의 안위와 이득만을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관리로서 자질이 부족하지(士而懷居, 不足以爲士矣 – 논어).”
튼실한 역마로 바꾸고 경성을 향해 힘차게 박차를 가하던 정 이노야는 자신이 어떤 함정에 빠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정 이노야가 저지른 만행은 아직 머나먼 경성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큰길 위에 깔린 눈은 완전히 그치기도 전에 말굽에 밟혀 녹아 버렸다.
사환들이 옥대교 저택의 대문 앞에 얇게 쌓인 눈을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어 두었다.
정교랑이 글씨를 쓰는 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았다. 귀한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은 사람들은 낮은 탁자와 깔개로 자리를 마련했고, 행색이 남루한 사람들은 대충 나뭇가지를 꺾어 와 맨바닥에 앉았다. 글씨를 쓰는 무리 속에는 매일같이 보이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글씨를 쓰는 새로운 얼굴도 있었다.
인파의 바깥쪽에 자리 잡은 진십삼은 정교랑의 손짓을 보면서 허공에 대고 글씨를 따라 그렸다.
“날씨가 부쩍 추워져 먹이 다 녹지도 않아요. 천막을 치거나 좀 더 넓은 대청을 찾아보는 건 어때요?”
글씨를 연습하는 시간이 끝나고, 마당 안으로 들어오던 진십삼이 말했다. 그가 반근이 건네준 손난로를 쥐고 있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난 글씨 쓰는 걸 가르칠 생각 없어요.”
그저 쓰기 위해 쓴다는 건가?
“아니, 나는 낭자가 추울까 봐서요.”
진십삼이 서둘러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십삼을 힐끔 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껍게 입기도 했고, 활쏘기를 끝내자마자 글씨 연습을 하는 거라서요.”
정교랑이 손을 앞으로 내밀고 좌우로 살짝 흔들었다.
“안 추워요.”
정교랑의 손은 가느다랗고 새하얬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온통 굳은살과 활시위 자국으로 가득한 손이었다.
진십삼은 이토록 거친 여인의 손을 처음 보았다. 어머니나 누이들,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시녀들의 손만 보았던 진십삼이기에 무릇 여인의 손이라면 섬섬옥수인 데다 색을 칠한 손톱에 반지나 가락지를 낀 모습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고, 손톱에 색도 칠하지 않은, 심지어 거칠기까지 한 여인의 손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진십삼은 지금 처음 알게 되었다.
“맞다, 이것 좀 봐요. 주육낭이 내게 선물한 단도예요.”
진십삼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내어 정교랑에게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진십삼에게서 단도를 받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난 벼루를 싫어해요.”
진십삼이 대뜸 말했다. 반근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진십삼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계속해서 단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그럼 뭘 좋아하는데요?”
“낭자가 만든 간식이든 차든, 뭐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난 벼루는 싫어요.”
진십삼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단도를 진십삼에게 돌려주었다.
“알겠어요. 다음에는 간식과 차를 선물할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십삼이 잠시 말없이 정교랑을 쳐다보자 실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정교랑이 자신의 앞에 놓여있던 간식 접시를 진십삼에게 밀어 주고는 그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