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49
교랑의경 49화
“아씨, 우리가 어떻게 왔는지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노마님이 우리한테 돈 남겨 주신 거 없잖아요. 아씨께서 병을 치료할 줄 안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말해 봤자 안 믿을 거야. 주육낭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반근을 내려다봤다. 눈앞에 여인 하나가 떠오르는 듯했다. 넋을 놓고 인형처럼 멍하니 앉아 있던 그날의 그 여인이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그 여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일어섰다. 그 자신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말해 봤자 너희처럼 멍청한 인간들은 안 믿을 거야. 그녀는 조롱 섞인 웃음을 지으며 높은 곳에서 주육낭을 내려다봤다.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주육낭이 휙 몸을 돌려 병풍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 것이었다. 서화가 그려진 6폭 병풍이 와르르 쓰러지자 밖에 있던 몸종들이 깜짝 놀라 들어왔다가 주육낭의 호통에 도로 나갔다.
“반근.”
진 공자는 멍하니 있는 몸종을 한숨을 쉬며 바라봤다.
“노야께 가서 진 상공한테 사실대로 말씀드려. 너희 아씨는 아직 강주에 있다고.”
반근은 네 하고 대답했다. 분노하는 주육낭을 보자니 두렵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리기도 했다. 반근은 고개를 숙인 채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육낭, 이번엔 자네가 큰 잘못을 저질렀어.”
진 공자는 주육낭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슨 잘못을 해?”
주육낭은 콧방귀를 뀌며 옷소매를 뿌리치고 자리에 앉았다.
“저 애가 나한테 말을 안 하는데 바보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무슨 신선도 아니고.”
주육낭을 보던 진 공자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내가 잘못 말했네. 자네는 잘못이 없고.”
진 공자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주육낭을 쳐다봤다.
“자네, 아주 큰 사고를 쳤어.”
마차는 곧장 현묘관 앞으로 가 멈춰 섰다. 마차를 몰던 노복과 시종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한 사람은 마차에 타고 있던 노인을 부축하고 한 사람은 마차에서 커다란 대광주리를 꺼냈다.
“배고픈 병에 걸린 어르신이 또 오셨어요.”
문 앞에 있던 도동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노인은 껄껄 웃고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관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도관의 간식이요?”
영접하러 나왔던 손 관주는 영문을 모르겠는 눈치였다. 현묘관의 음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해졌나?
사찰이나 도관에서 공양하는 음식은 본디 참배객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워낙 유명하다 보니 돈을 내고도 밥 한 그릇 얻어먹기 힘들 정도였으며 아예 그 사찰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성 밖의 만녕사는 음식으로 이름을 날렸고 복주의 보타사는 간식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유명 사찰이나 도관의 일이었고 작고 평범한 사찰이나 도관은 끼니 해결조차 힘든 상황이라 신도들에게 식사나 간식을 공양하는 일은 언감생심이었다.
“겸손하실 것 없소이다. 내 이번에는 거저 얻어먹자는 게 아니오. 자, 식재료는 내가 가져왔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조리만 좀 해 주시오. 이 늙은이의 배고픈 병을 치료해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손 관주는 얼른 예를 표하며 사죄했다. 해황 등자라니, 먹어보기는커녕 이름조차 들어본 일이 없는데 대관절 어떻게 조리하라는 건지. 음식을 해서 신도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야 기꺼이 그 고생을 마다하지 않겠지만 그럴 형편이 아니었다.
“사부님, 전에 반근 언니가 만든 거예요.”
도동이 말했다. 경문을 읽던 여도사들도 밖으로 나왔다가 노인을 보고 기뻐하며 어찌 된 일인지 조잘조잘 떠들었다. 손 관주와 노인은 그제야 저간의 사정을 이해했다.
“은인이 여기 사셨구려.”
노인은 흠칫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도사님께서 말씀 좀 전해 주시오. 직접 만나 감사 인사를 하고 싶소이다.”
부엌에서 반죽을 하고 있던 반근은 얘기를 듣더니 의아해했다.
“어느 어르신이요?”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다.
“저한테 고맙단 인사를 한다고요?”
“그래요. 전에 그 어르신이 산에서 쓰러지셨을 때 사탕 귤을 주며 귀를 꼬집고 어쩌고 했던 거 기억 안 나요?”
여도사는 반근을 존경의 눈빛으로 보며 말했다. 진짜 착한 사람이네,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일마저 마음에 담아 두지 않다니. 몸종은 퍼뜩 깨달았다.
“아, 그분이요. 감사 인사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에요.”
반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 아씨죠.”
그 바보? 멈칫했던 여도사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정말 착한 몸종이네, 이토록 윗전을 잘 섬기다니.
“그리고 저번에 줬던 그 등자랑 게살인지 뭔지 그거도요. 어르신이 드시고는 엄청 좋아하셨어요.”
화제를 돌린 여도사가 기쁘게 말하며 대광주리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이거 봐요. 반근 주라고 이것도 특별히 가져오셨어요. 저번에 먹은 음식에 대한 보답이래요.”
몸종은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대광주리를 쳐다봤다. 그 안에는 둥그렇고 농익은 등자와 살이 통통하게 오른 게 몇 마리, 술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이게 목숨을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아니에요. 그 어르신은 해황 등자를 반근이 만들었다는 걸 모르셨거든요. 이건 그냥 지난번 먹은 음식에 대한 보답이지, 지지난번에 목숨을 구해 준 일에 대한 보답은 아니에요.”
여도사가 얼른 설명했다. 지난번과 지지난번, 보답이면서 그 보답은 아니라니. 아리송한 말에 몸종은 웃음을 터뜨렸다.
“네, 알았어요.”
몸종은 대광주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씨는 해황 등자가 먹고 싶다고 했지만 몸종이 산 아래로 내려가 구해 온 식재료가 별로라 입에 안 맞는다며 먹지 않았다. 그 후로 따로 언급이 없었기에 몸종도 잊고 지냈는데 때마침 이렇게 식재료가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잠깐만 기다려요.”
몸종이 말했다. 여도사는 대광주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몸종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길로 바라봤다. 산속의 날씨는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졌다. 전에 있던 대나무 문발을 치우고 한기를 막기 위해 종이로 된 문으로 바꿔 단 후였다. 여도사는 몸종이 문을 여는 동안 병풍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을 얼핏 봤는데 책을 보고 있는 듯했다. 바보도 책을 읽나? 여도사는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했지만 문이 닫히면서 시선을 가렸다.
“아씨, 이것 좀 보세요. 받을까요, 말까요?”
자초지종을 설명한 몸종이 공손히 물었다. 책을 내려놓은 정교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그 대광주리를 쳐다봤다.
“어디 좀 보자, 물건이 어떤지.”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얼른 대광주리를 가까이 가져가 등자며 게, 술 등을 하나씩 꺼내 보였다. 정교랑이 하나씩 들고 살펴봤다.
“이게 괜찮구나. 이것도 괜찮고.”
마음에 드는 게와 등자를 한쪽 옆에 빼놓은 정교랑은 마지막으로 술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더니 얼른 한쪽 옆으로 치워 버렸다.
“술 때문에 사레 드셨어요?”
꿇어앉아 있던 몸종이 긴장한 채로 몸을 곧추세우며 물었다.
“아니, 냄새가 역해서. 이것도 술이라니.”
물그릇에 있던 물을 다 마신 노인은 작은 술 주전자를 들어 그릇에 조심스레 따른 다음 조금씩 천천히 마셨다.
“어르신.”
옆에 있던 도동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약이 잘 안 넘어가세요?”
노인은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약이라니?”
“그럼 어르신은 왜 그렇게 조심스레…….”
도동의 말에 노인은 껄껄 웃었다.
“얘야, 맛이 끝내주는 술이라 아까워서 그런다.”
“노태야, 그런 술을 그리 많이 내주셨어요? 집에 있는 술을 다 털어 오셨잖아요.”
시종이 한쪽 옆에서 아까운 듯 불만을 토로했다.
“해황 등자를 만드는 데 술도 들어가요?”
“어리석은 것아, 당연히 술이 들어가지. 내가 먹어 봐서 알아.”
노인은 말을 이었다.
“아름다운 맛은 맛좋은 술과 어울려야 하는 법이다.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안 돼. 좋은 술만 있으면 아름답지 않거든.”
이쪽에서 그런 말을 나누고 있는 가운데 저쪽에서 여도사가 대광주리를 등에 지고 돌아왔다.
“또 없어요?”
“있어.”
도동이 얼른 묻자 여도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다고? 근데 왜 안 보이지?
“반근 언니가 뭘 이런 걸 가져오셨냐며 해황 등자를 만들어 사례하겠대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직접 만들어서 갖고 오겠다네요.”
여도사의 말에 노인은 크게 기뻐하며 잘됐다고 손뼉까지 쳤다.
“그런데 말이죠.”
여도사가 대광주리를 건네며 말했다.
“술이 안 좋대요. 새 술을 가져와야 맛이 제대로 날 거래요.”
“술이 안 좋다고?”
노인은 멈칫했다.
“뭐야, 우리 집 최고의 술이라고요. 이게 안 좋으면 이 세상에 좋은 술 같은 건 없어요.”
시종이 발끈해서 따지자 여도사는 몸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나, 나도 그런 건 잘 몰라요. 반근이 말한 거예요. 이 술은 안 좋다고 새로 담근 술을 가져와야 맛이 날 거랬어요.”
요리를 할 때 쓰는 술은 새로 담근 술이 잘 어울렸다. 이 술이 안 좋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음식에 쓰기엔 안 좋다는 뜻이었다. 퍼뜩 깨달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조예가 깊다니 음식에 얼마나 정통한지 알겠군. 그러니 그렇게 훌륭한 맛을 내지.
“그랬군, 그랬어.”
노인은 얼른 시종을 재촉했다.
“냉큼 가서 새로 담근 술을 가져오너라.”
몸종은 방금 꺼내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황 등자를 정교랑 앞에 조심스레 차려 놓았다.
“아씨, 이번엔 어떤지 드셔 보시겠어요?”
몸종은 기대에 찬 어조로 말했다. 정교랑이 젓가락을 들어 조금 짚더니 초간장에 찍은 다음 맛을 보았다.
“이 술도 새로운 맛이 조금 나는 정도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아닌가? 몸종은 낙담했다.
“산골마을이라 술이 너무 형편없나 봐요. 제가 성에 나가서 좋은 거로 구해 올게요.”
몸종의 말에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내 입맛엔, 최고의 술도, 별다를 게 없구나.”
“그 어르신이요? 그냥 평범해 보였는데 최고의 술을 가져오셨단 말이에요?”
몸종은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근심 걱정이 없어야 음식을 따지는 법이야. 맛좋은 음식을 위해 공들여 고른 식재료를 들고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걸 봐. 보통 사람이 그럴 수 있겠어?”
정교랑의 말에 몸종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예전엔 부엌에서 밥 한 그릇만 얻어도 기뻐 어쩔 줄 몰랐으니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씨를 모시고 난 후에야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음식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말해 뭣하겠는가.
“그럼 아씨도 근심 걱정이 없는 분이겠네요.”
몸종이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은 무표정한 얼굴로 팔걸이 책상에 기대 문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있었다. 예전엔 애지중지 자라 사치스럽게 살았던 사람이었나 보다. 그러니 이렇게 입맛이 까다롭겠지. 그렇다고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인 건 아냐.
흐릿하고 아득한 기억 속에서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지러이 겹쳐졌다. 가까이 다가가 확실하게 보려고 할 때면 두 눈이 따갑고 쓰렸다. 그녀는 자신이 정교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누구일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정교랑은 눈을 감았다.
“가서 그 어르신을 만나. 품위가 있는 분이니 같이 맞춰 드려.”
몸종은 아씨의 메마른 목소리 속에서 뜻밖에도 쓸쓸함이 묻어나자 내심 놀랐지만,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네 하고 대답한 후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