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16
교랑의경 516화
뜨거운 물수건을 얼굴 위에 펴 놓고 살살 문질렀다. 몸종의 손놀림은 극도로 조심스러웠지만 정 이노야는 그래도 흠칫 놀라 헙 숨을 들이마셨다. 정 이노야가 손을 들어 몸종의 뺨을 후려쳤다.
“썩 꺼져라.”
몸종은 뺨을 부여잡으며 말없이 물러났고, 정 이부인이 물수건을 받아 정 이노야에게 직접 얹어 주었다.
“그 주가 놈, 정말 손이 맵네요.”
정 이부인이 씩씩거렸다. 주가 놈이라는 말에 정 이노야는 자신이 당한 굴욕이 다시 떠올랐다.
“사람을 여럿 데려왔다고 유세 떤 거야. 어디 더 데려와 보라지.”
주 노야가 데려온 험상궂은 시종들과 발길질 한 번에 픽픽 쓰러지던 자신의 힘없는 시종들을 떠올리자 정 이노야는 울컥하는 마음에 이가 갈렸다.
호랑이도 산에서 나와 평지로 내려오면 개한테 물린다더니!
“노야, 진정하세요. 우리 친정에서 보낸 사람들이 곧 올 거예요.”
정 이부인이 얼른 말했다.
“지금 와 봤자 무슨 소용이야!”
정 이노야는 심드렁하게 대꾸한 후 수건을 쟁반으로 내던졌다.
“아주 상전이 따로 없군.”
“그땐 같이 올 방법이 없었잖아요. 우린 느릿느릿 움직이는 데다 오는 내내 이것저것 쉬지도 않고 샀어요. 그 사람들까지 같이 왔으면 아마 내년은 돼야 도착했을걸요.”
사들인 물건 얘기가 나오자 정 이노야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물건들!”
경성으로 오는 동안 발길이 닿는 곳마다 관리들이며 향신(鄕紳: 향촌에 살던 과거 급제자나 퇴직한 벼슬아치)들이 찾아오곤 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제공하고 쉴 곳을 마련해 주었으며 여기저기 유람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어디 그뿐인가. 떠나기 전에는 선물을 한 보따리씩 주는 통에 마차 한 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의 선물을 받았다.
전부 정 이부인이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이었다. 정 이부인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잘 보관해 두었어요. 아직 옷도 못 지은 능라는 뒀다가 봄옷으로 지을까 해요. 노야께서 받은 건 새해 선물로 보내도 되겠어요. 돈 아끼고 좋잖아요.”
정 이부인은 신이 나서 자신의 계획을 늘어놓았지만, 정 이노야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말을 잘랐다.
“보내긴 뭘 보내? 사람들이 와서 다 가져갈 텐데!”
정 이부인이 멈칫했다.
사람들이 와서 다 가져간다고? 그건 내 거야! 누가 감히 가져가?
그때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라, 서둘러. 물건들을 전부 옮겨라.”
귀청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시끌벅적한 소리였다.
정 이부인이 서둘러 문 앞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험상궂게 생긴 시종들이 우르르 들어왔고, 그 가운데 주 노야가 목에 힘을 주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들어왔다.
또 저놈이!
“노야!”
정 이부인이 놀란 눈으로 정 이노야를 바라보았다.
“저자가 또 뭘 하려는 거예요?”
분을 참다 못해 눈까지 시뻘게진 정 이노야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마당에 떡하니 서 있는 주 노야를 노려보았다. 또다시 어사대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게 다더냐?”
주 노야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물었다.
“역마 몇 필을 빌리고 식사 몇 끼 얻어먹은 게 다라고?”
주 노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손을 들어 채찍을 내리쳤다.
“대답해!”
주 노야의 윽박에 놀란 정 이노야는 쭈뼛거리며 뒤로 엉거주춤 물러섰고, 옆에 있던 어사들이 달려들어 주 노야를 막았다.
“주 대인, 진정하십시오. 할 말이 있으면 좋게 말로 하시지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어사대로 끌려온 사람이 어사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원.
정 이노야는 화가 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했다.
“고집부려 봤자 소용없어. 네놈이 저지른 일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상부에 보고됐단 말이다!”
주 노야는 분기탱천하여 채찍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우리 주씨 가문에 어찌 너처럼 망신스러운 놈이 태어났는지!”
누가 너희 주씨 가문에서 태어나!
정 이노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주 대인,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할 말이 있거든 좋게 말로 하시지요.”
어사들은 자신의 신분도 잊은 채 주 노야를 달랬다.
“이미 받은 선물을 돌려보낼 순 없는 노릇인데.”
상의를 마친 후 어사 하나가 말했다.
“지나치게 소상히 조사하기도 그렇고 말입니다.”
어사가 무슨 말인지 알지 않냐는 눈빛을 보냈다.
이 일을 소상히 조사하다 보면 선물을 보낸 이도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 경성으로 오는 동안 정 이노야 일행이 거쳐온 지역이며 연을 맺은 관리가 어디 한둘이던가. 선물을 받은 일로 조사를 시작하면 일이 보통 커지는 게 아니었다.
“돌려보낼 수야 없지요.”
또 다른 어사 하나가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주 노야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정 이노야를 바라보았다. 정 이노야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 노야의 눈빛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저 망할 놈이 또 무슨 치욕을 안겨 주려고?
“무평에 재해가 생겨 조정에서 구휼 중이오. 관부에서는 창고를 열고 곡식을 풀고, 향신들 또한 죽을 끓여 이재민들에게 나눠 주고 있소. 정 이노야도 조정과 백성을 위해 성의를 보여 주시구려.
집안의 재물을 전부 기부하시오. 본디 백성에게서 온 것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재물이니, 백성에게 돌려주란 말이외다.”
“그건 내 거예요!”
정 이부인의 앙칼진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정 이노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주씨 가문 시종들은 가산을 몰수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물건을 거침없이 옮기고 있었다.
“주가 놈아! 무슨 짓이냐!”
정 이노야가 벌떡 일어나 옷자락을 털며 소리쳤다. 주 노야도 지지 않고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다가섰다.
“너야말로 무슨 생각이냐! 뭘 하려는지 몰라서 물어? 그동안 관리 노릇을 얼마나 개같이 한 거야?”
정 이노야는 주 노야의 호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성문 밖에서 주 노야한테 따귀를 맞고 어사대로 끌려간 그 순간부터 정 이노야는 자신의 행적으로 인해 경성에서 뭔가 큰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관직에 몸담으며 관직 사회의 순리를 익힌 정 이노야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따지고 보면 정 이노야가 저지른 일이 무슨 엄청난 일이라 할 순 없었다. 하지만 관직 사회라는 게 그랬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파고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 해도 죄다 문제가 되고, 문제가 없다고 해서 덮으려 들면 모반의 뜻을 담은 시를 지어도 황제가 흡족하게 여기기 마련이었다.
이번 일을 끝까지 파고들게 할 순 없었다. 그랬다가는 결국 목숨까지 내놓게 될 테니까.
“노야, 노야.”
정 이부인이 정 이노야의 팔을 다급히 잡아끌며 재촉했지만, 정 이노야는 부인의 팔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옷자락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가 직접 하겠다!”
크고 작은 상자들이 들려 나오는 모습을 보고, 정 이부인은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쏟았다.
“내 보물들을!”
그녀는 정 이노야가 주 노야한테 붙잡혀 어사대로 끌려갈 때보다 더 상심한 듯했다.
한쪽 옆에 선 정칠랑은 두려움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손을 뻗어 정사낭의 옷소매를 꽉 붙잡았다. 모친의 통곡 소리가 귓가를 감쌌다.
경성. 경성은 하나도 좋은 게 없어.
– 걘 나쁜 사람이야! 그 바보는 나쁜 사람이라고! 너희들은 조만간 그 바보한테 당하고 말 거야!
정육랑이 외치던 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정칠랑은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정사낭이 갑자기 손을 확 놓더니 옆으로 움직였다.
왜 그러지?
고개를 든 정칠랑의 눈에 문밖을 향해 환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는 정사낭의 모습이 보였다.
“누이!”
정사낭의 목소리에서는 기쁨이 감춰지지 않았다.
누이?
정사낭의 시선을 따라 정칠랑도 고개를 돌렸다. 언제 온 건지 중문과 대문 사이에 있는 가림벽 앞에 사람이 몇 서 있었다. 그중 한 여인은 커다란 두봉을 두르고 있었다. 여인이 손을 뻗어 모자를 벗자 얼굴이 드러났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인상이었다. 여인은 이쪽의 사람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오싹 소름이 돋은 정칠랑은 뒷걸음질을 치며 여종들에게 기댔다.
“누이, 어떻게 왔어?”
정사낭이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내 집이잖아요. 곧 새해기도 하고 아버지도 오셨으니, 가족이 함께 보내야죠.”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돌아갔다고?”
진안 군왕 역시 내시의 입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곧 새해잖습니까.”
내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새해를 부모님과 함께 보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약간 멍한 눈치였다.
“위낭.”
저쪽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얼른 대답하며 다가갔다.
“그리 걱정할 것 없다. 반 시진도 채 안 되어 또 보고하게 하다니. 거기 있는 사람이 몇인데 경왕 하나 제대로 못 보살피겠느냐? 괜히 걱정할 것 없느니라.”
황제가 고개를 숙인 채 물러가는 내시를 보며 말했다. 진안 군왕은 웃으며 네 하고 대답한 후, 대황자와 다른 쪽에 앉았다.
“이 과제는 네가 직접 한 것이냐?”
황제가 앞에 놓인 종이를 보며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황제는 칭찬을 해 주고 종이를 넘겨 보며 말을 이었다.
“관청에 갔었느냐? 일을 인계받는 속도가 아주 빨랐다던데.”
“네, 폐하의 근심을 덜어 드리고 싶어서요.”
진안 군왕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황제는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진안 군왕과 황제를 번갈아 보는 대황자의 눈빛에 불쾌함이 스쳤다. 대황자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긴장감과 함께.
“네가 제일 명민하다는 건 짐도 안다. 마음을 쏟지 않을 뿐이지.”
황제가 종이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마음을 쓰도록 해라.”
진안 군왕이 네 하고 대답하며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겠나이다.”
저 녀석이 제일 명민하다고? 어떻게 저 녀석이 제일 명민해?
제일 명민한 건 나야! 내 과제야말로 최고라고!
대황자의 눈빛이 흔들거렸다. 대황자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최고는 바로 나야!
대황자와 진안 군왕의 상소를 본 황제는 이어 자신의 탁자 위에 놓인 상소들을 훑어보았다. 대전 안의 내시들은 발소리를 죽여가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세밑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황제의 주름살도 점점 깊어져 갔다. 부국강병과 강건한 신체, 연이은 경사도 월식으로 인한 근심을 상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천문 현상이 또다시 경고하고 있는 지금, 커지는 근심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엄청난 재앙이 언제 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상소문의 내용에 따르면 이재민의 수는 어마어마했고, 피해를 본 면적 또한 광범위했다.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고, 무엇보다도 민란이 문제였다.
“지금 무평 지역에서 창고의 문을 열고 곡식을 나눠 주고 있습니다. 겨울은 어떻게든 나겠지만 봄까지 버티고 여름철 수확까지 기다리기는 힘들 겁니다.”
귓가에 울려 퍼지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엇보다도 민란까지 일어났으니······.”
고개를 든 황제는 어느새 바짝 다가와 앉은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 역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수척해지셨습니다.”
멈칫하던 황제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다 봤느냐?”
황제가 진안 군왕에게 물으며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대황자는 아직도 내시의 시중을 받으며 상소문을 보고 있었다. 다 읽은 상소문은 몇 개 되지 않아서, 대황자 앞에는 아직 읽지 않은 상소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황제의 시선을 느꼈는지 대황자의 동작이 빨라졌다.
“다 봤습니다. 나이는 그래도 제가 더 많잖습니까.”
진안 군왕이 말했다. 황제가 웃으며 손짓을 하자, 옆에 있던 내시가 얼른 진안 군왕이 읽은 상소문을 옮겼다. 황제는 상소문을 천천히 넘겨 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이 간결하고 명확하구나. 확실히 이해하고 있어.”
“알고 보면 간단한 일입니다.”
“간단하다니?”
진안 군왕의 말에 황제가 눈썹을 꿈틀이며 물었다.
“보고 이해하는 건 간단하죠. 어떻게 행할 것인지는 어렵지만요.”
진안 군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 확실히 쉽지 않습니다.”
황제가 피식 웃고, 자신의 앞에 놓인 상소문을 진안 군왕에게 건네며 물었다.
“이걸 보거라. 네 생각엔 어떤 것 같으냐?”
진안 군왕이 상소문을 받았다.